한 분향소의 조문객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연합뉴스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계엄을 선포한 윤 대통령은 여전히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지만 자유대학 등 젊은 층에선 ‘계몽절’을 기념해 집회를 갖고 행진하며 ‘윤 어게인’을 외쳤다. 민주당에선 늘 하던대로 ‘내란 종식’을 되뇌는 등 시큰둥한 반응이었는데 막상 소동은 국민의힘에서 있었다.
1주기를 즈음해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계엄에 대한 사과와 윤 대통령과의 절연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더니 12월3일 당일이 되자 보란 듯이 국민의힘 소속 의원 25명이 국회 소통관에서 집단 사과문을 발표하며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을 선언했다.
그 25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기억하자.
고동진·권영진·김건·김성원·김소희·김용태·김재섭·김형동·박정하·박정훈·배준영·서범수·송석준·신성범·안상훈·안철수·엄태영·우재준·유용원·이상휘·이성권·정연욱·조은희·진종오·최형두
이들 25명은 당연히 그러려니 했던 인물들이다. 그래서 이 25명만 쳐내면 국민의힘은 깨끗해지고 진정한 보수정당으로 거듭나게 될 테니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의견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바로 그다음 날 12·3 비상계엄 관련 공식 사과 참여자 40명의 명단이 유튜브 이영풍TV 등을 통해 발표되었다. 이들 국민의힘 소속 의원 40명은 앞서 사과문을 발표한 25명을 비롯해 사과 행사에 참석하거나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힌 인물들이다.
그런데 뜻밖이다. 평소 친윤으로 분류되던 인물, 윤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의원 뱃지를 단 인물, 대통령 체포 소동 때 용산 대통령실 앞을 지킨 의원들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대체 무슨 사태란 말인가.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민의힘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내부 균열이 다시 도지고 있다. 문제는 더불어민주당의 공세가 아니라 제1야당으로서 여당인 민주당을 상대하기도 전에 스스로 싸움을 포기하자고 외치는 ‘당내 회색 세력’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윤한홍 의원이 장동혁 대표 앞에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비판하는 꼴”이라는 극언을 쏟아내며 지도부를 공격한 데 이어, 권영진 의원은 “2018년 지방선거의 악몽이 재현될 수 있다”는 위기론을 꺼내 들었고, 김용태 의원 역시 “다수 국민과 함께해야 한다”며 중도 확장론을 반복했다. 이들의 주장은 하나같이 ‘사과하면 산다’는 논리다.
그러나 보수 진영의 역사와 세계 정치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이 노선이 패배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 없다. 문제는 장동혁 지도부가 아니라 오히려 내부에서 끊임없이 노선을 묽게 만들고, 윤석열정부와 가치를 공유하기를 꺼리는 당내 회색 세력이다.
윤한홍 의원은 과거 ‘원조 친윤’이라는 평가까지 받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계엄 논란의 원인을 민주당의 입법 폭주라 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사실상 민주당식 프레임에 굴복하는 발언을 했다. 계엄의 원인이 민주당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규정하자는 것인지조차 말하지 못하면서 지도부를 향해 독설만 퍼붓는 모습은 정치적 책임을 회피한 채 눈치만 보겠다는 태도로 읽힌다. 이를 보고 민주당 등 여권에서는 “친윤을 자처하던 인사가 위기 국면이 되자 가장 먼저 선 긋기에 나서는 모양새”라는 냉소마저 나온다.
권영진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는 대구시장 재직 시절인 2019년 11월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전국 14개 시·도지사와 함께 ‘경기도정이 중단없이 지속되기를 간곡히 요청 드립니다’라는 제목의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한 바 있는 인물이다.
그는 2018년 지방선거 참패의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중도층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사과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2018년 지방선거 참패는 강성 노선 때문이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보수 진영이 정체성을 잃고 무기력하게 주저앉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 이미 정치권의 상식이다. 그럼에도 권영진은 그 실패의 원인을 왜곡하며 ‘사과’와 ‘유약함’의 노선을 다시 선택하자고 외치고 있다.
김용태 또한 중도 확장론을 들고 나서며 지도부를 흔드는 데 가세하고 있다. 그는 “다수 국민과 함께 가야 한다”며 선명한 노선보다 중도 이미지를 우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바보는 보수가 중도 행세로 성공한 사례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김용태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당내 논쟁에서 중심을 잡기보다 여론의 눈치를 보는 행보를 반복해 왔고, 이번에도 핵심 가치의 강화가 아니라 이미지 조정이라는 피상적 처방만을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장동혁 대표 체제는 이재명 정권을 ‘약탈·파괴 정권’이라 규정하며 맞서고, 사전선거 폐지안 발의와 내란 재판부 논란 대응 등에서 선명한 메시지를 내고 있다. 김민수 최고위원을 비롯해 대변인단도 민주당의 법치 파괴와 사법 방탄을 정면 비판하며 ‘싸우는 보수’의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
이 방향은 핵심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혼란스러운 정치 지형 속에서 명확한 기준을 세우는 데 효과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그러나 당내 회색 세력들이 계엄 사과와 윤석열 대통령과 거리두기를 요구하며 메시지를 분열시키면서, 오히려 민주당의 공격 기회를 넓혀 주고 있다.
국제 정치 흐름 역시 보수 정당이 어떻게 승리하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영역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불법 이민 차단과 워싱턴 기득권 세력에 대한 투쟁을 앞세워 재집권했고, 아르헨티나의 밀레이, 이탈리아의 멜로니, 네덜란드의 빌더르스까지 모두 선명한 보수 노선으로 승리했다.
세계적으로 중도 이미지 조정을 통해 집권에 성공한 보수 리더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럼에도 윤한홍·권영진·김용태 등은 시대와 역사가 증명한 노선을 외면한 채 ‘사과하면 살 수 있다’는 낡고 무기력한 구호만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법치주의·자유시장경제·한미동맹이라는 네 기둥을 중심축으로 분명한 노선을 세우고, 장동혁 지도부를 중심으로 일관된 메시지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당 핵심 지지층의 요구이자 보수의 생존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이대로 내부에서 당을 흔드는 목소리가 커진다면 민주당은 이를 발판 삼아 더 강하게 공세를 펼칠 것이고, 2018년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에 전국 17개 광역단체장 중 14곳을 내준 뼈아픈 전철을 되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민의힘은 국민이 좌파를 상대해 대신 싸우라고 세운 정당인데 스스로 무릎을 꿇고 사과부터 하자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사실상 백기를 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방선거의 승패는 결국 누가 더 선명한 노선으로 유권자에게 다가가느냐에 달려 있다. 윤한홍·권영진·김용태의 발언이 계속된다면 이는 민주당에게 칼을 쥐여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결속이며, 그 중심은 장동혁 지도부가 되어야 한다. 보수의 승리는 언제나 선명함에서 나왔음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