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벌에서 ‘부정선거 재선거’를 외치는 청년들. Ⓒ한미일보
우리는 왜 자유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에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인류 역사 이래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온 인간 존엄에 관한 근본적 물음이다.
답은 명확하다. 자유가 없는 개인은 주체성을 상실한 노예로 전락할 뿐이며, 정의가 메마른 사회는 불의와 부조리가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기 때문이다.
자유와 정의의 존재 여부는 단순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우리 후손들의 삶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운명까지 좌우하는 인류의 중차대한 역사적 과제다.
대한민국 헌법은 명백하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국가의 근간으로 규정하고 있다. 헌법이 지향하는 자유, 인권, 법치라는 핵심 가치는 결국 ‘자유’와 ‘정의’라는 위대한 두 축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과연 그러한가. 헌법이 보장한 가치들이 소리 없이 잠식당하고, 국민이 자신의 자유를 반납하는 기이한 현상이 도처에서 목격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왜 자유와 정의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는가? 누가, 어떻게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자유를 찬탈하고 있는가? 이 거대한 위기의 실체를 냉철하게 해부해 보아야 한다.
헌법에서 ‘자유’ 문구를 왜 빼려고 하는가?
우리가 자유를 빼앗기게 되는 첫 번째 경로는 정치적·체제적 변질이다. 지난 수년간 우리는 헌법 개정 과정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고의로 삭제하려는 일련의 시도를 목격했다. 헌법에서 자유를 지우겠다는 것은 단순한 자구 수정이 아니다. 이는 국민의 실질적 자유를 박탈하고,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인민민주주의나 민중민주주의라는 체제로 이행시키려는 시도라고 본다.
여기에 더해, 큰 정부(Big Government)를 지향하는 포퓰리즘 체제는 국민의 자유를 직접적으로 억압한다. “큰 정부와 작은 정부 중 누가 국민의 자유를 더 보장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역사가 증명한다. 큰 정부는 필연적으로 규제를 양산하며, 국민의 정치적·경제적 자유를 비롯해 일상생활 전반을 감시하고 규율한다.
일찍이 구소련이 수많은 정부 부처와 거대한 각료 조직을 두고 개인의 모든 삶을 통제하려 했던 것이 전형적인 예다. 정부가 비대해질수록 국민의 사적 영역은 소멸한다.
이러한 전제주의 체제의 비극이 극대화된 실체가 바로 북한이다. 북한 역시 형식적인 헌법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체제는 헌법 위에 노동당이 존재하고, 당 위에 절대 존엄이라 일컬어지는 ‘수령’이 군림하는 철저한 1인 독재 체제다.
모든 권력은 수령이라는 단 한 사람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인간에게 무오류성과 절대성을 부여하는 순간, 그는 사실상 신(神)의 자리를 대체하게 된다.
인간이 신의 지위에 오르는 순간, 종교적 절대자의 존재는 부정되며,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정신적 영역인 신앙의 자유는 자연스럽게 소멸하고 만다.
불법적이고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쟁취한 정치 세력은 그 권력을 항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들의 궁극적 목적은 영구 집권이며, 이를 위해 국가의 제도와 시스템을 ‘큰 정부’라는 탈을 쓴 전제주의 체제로 개편해 나간다.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에서 경고했듯,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던 기만적 슬로건은 결국 ‘어떤 동물들은 더 평등하다’는 독재 계급의 영구 집권 책략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권력에 굴복하는 제도 권력과 삼권분립의 붕괴
자유민주주의는 권력을 제한하기 위하여 부단히 투쟁한 결과 만들어진 제도이다. 그러므로 이 제도가 무너지면 자유민주주의도 함께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정치권력의 타락에는 국가의 정의를 수호해야 할 제도 권력이 법으로 주어진 권한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근대 사상의 기초를 닦은 몽테스키외는 그의 저서 ‘법의 정신’을 통해 사법권이 입법권 및 행정권과 분리되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삼권분립’의 원칙을 천명했다. 권력의 집중과 폭주를 막는 사법부의 독립이야말로 자유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법부의 현실은 이 엄중한 원칙을 무색하게 만든다. 법원은 법률과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재판하여 사법 정의를 실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법부가 권력의 눈치를 보며 인사권자의 의중에 영합하기 위해 불공정하고 편향된 판결을 하는 모습을 목격해 왔다. 개인의 사익을 위해 사법의 독립성과 양심을 내팽개친 일부 법관들에 의해 정의는 외면당하고 법치는 무너져 내렸다.
이러한 현상은 사법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권력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 행정 공무원들과 거대 권력의 칼날을 쥔 검찰 역시 본연의 임무를 잊고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욱 참담한 것은 지성의 요람이어야 할 강단의 학자들마저 권력에 유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리를 탐구하고 사회의 불의를 비판해야 할 지식인들이 권력의 입맛에 맞는 이론을 급조하고, 곡학아세(曲學阿세)를 일삼으며 독재 권력에 학문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뼈대가 제도 권력 내부의 타락으로 인해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다.
감시 기능 상실한 언론과 대중의 정신적 오염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진리 앞에, 권력을 제한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실현하는 언론은 이른바 ‘제4부’의 사명을 지닌다. 역사적으로 권력이 진실을 은폐하려 할 때, 언론과 지성의 외침이 사회를 구원한 사례가 있다.
19세기 말 프랑스를 뒤흔든 ‘드레이퓌스 사건’이 대표적이다. 군부와 기존 권력이 가짜 뉴스와 거짓 증거로 유대인 장교 드레이퓌스를 간첩으로 몰아 매장하려 했으나, 문호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정의로운 글로 진실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권력의 음모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언론 환경은 어떠한가. 권력에 아부하며 사익을 챙기기 위해 언론 본연의 사명을 잊은 미디어들이 곳곳에 넘쳐난다. 과거 구소련의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Pravda, 역설적으로 러시아어로 ’진실‘을 뜻함)’, 중국의 ‘인민일보’, 북한의 ‘로동신문’처럼, 오직 권력의 입맛에 맞는 기사만 전파하는 관제 선동 기구들과 다를 바 없는 행태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사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진실을 왜곡하며, 편향된 이념적 잣대로 대중을 선동하는 보도가 일상이 되었다.
이러한 편향 보도와 왜곡 선동은 일반 국민의 정신을 부지불식간에 오염시킨다. 특정 정치 이념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국민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고 비판적 사고가 마비된 수동적 대중으로 전락하게 된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예견한 ‘이중사고(Doublethink)’, 즉 권력의 거짓말이 뻔히 보임에도 그것을 진실로 믿어버리는 정신적 노예 상태가 현실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 속 나치 치하의 독일을 기억해야 한다. 2차 대전 후 전범 재판에서 부역자들은 “위에서 시켜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했으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 그것은 사유하지 않은 죄, 즉 ‘악의 평범성’일 뿐이었다.
독재자 한 사람의 강요가 아니라, 언론의 선동에 오염된 대중이 권력 앞에 스스로 굴종하며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적극적으로 동조했던 역사적 과오를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포퓰리즘의 덫: 경제적 자유의 상실과 배급의 노예
정치적·정신적 억압과 더불어 국민의 손발을 묶는 가장 치명적인 무기는 경제적 자유의 박탈이다. 경제적 자유는 사유재산권을 근간으로 하며, 영리 활동의 자유, 거주 이전과 이동의 자유를 포함한다. 사유재산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 개인의 독립된 삶은 존재할 수 없으며, 경제적 자립이 무너진 곳에서 자유는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그의 저서 ‘노예로 가는 길’에서 정부가 선한 의도나 사회 정의를 내세워 경제를 통제하고 계획하려 할 때, 그것이 어떻게 개인을 파멸적 노예 상태로 이끄는지를 정밀하게 경고했다. 현대의 위선적인 정치 세력이 들고 나오는 포퓰리즘 기반의 무분별한 무상 복지가 바로 그러한 과정의 출발점이다.
“공짜 점심은 없다.” 국가가 베푸는 온갖 무상 혜택과 금전에 눈이 먼 국민은 점차 스스로 땀 흘려 일하려는 근로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 과거 구소련이나 아르헨티나 등의 사례가 보여주듯, 권력이 주는 달콤한 배급 체제에 중독되면 권력에 대한 건전한 비판 정신은 마비된다. 오직 더 많은 배급과 혜택을 받기 위해 국가 권력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치는 경제적 노예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퍼주기’ 식 포퓰리즘 정부의 말로는 베네주엘라처럼 비참하다. 선심성 정책을 남발하려면 중과세가 일상화되고, 국민의 혈세는 고갈되어 국가재정은 파탄을 맞이하며 결국 극심한 경제적 빈곤으로 치닫게 된다. 그 결과는 일부 특권층을 제외한 국민 전체가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하향 평준화의 비극이다.
이는 과거 일부 국가들이 겪었던 재정위기의 본질적 원인이었으며, 최근 유럽의 선진국들마저 좌파 포퓰리즘 정책으로 인해 유사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생생한 반면교사다.
이익 카르텔의 기득권 확장과 방어
자유와 정의를 잠식하는 또 다른 은밀하고도 강력한 적은 사회 도처에 둥지를 튼 ‘카르텔(Cartel)’이다. 이들은 국가와 공동체의 이익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이익 집단을 형성하여 끼리끼리 특권을 확장하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온갖 불법과 부정을 서슴지 않는다.
국민의 권한을 위임받아 놓고 온갖 면책특권과 포퓰리즘 입법으로 전횡을 일삼는 정치 카르텔, 자신들만의 이념적 편향성을 후대에 주입하고 이권을 챙기는 교육 카르텔, 특정 법연구회 등을 중심으로 사법부의 요직을 독식하며 판결을 거래하는 사법 카르텔, 기득권 노동자의 이익만을 대변하며 국가 경제를 볼모로 잡는 노동 카르텔, 그리고 진실을 왜곡하며 대중의 눈을 가리는 언론 카르텔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는 실로 다양하다.
이러한 직종별 카르텔은 공정한 경쟁을 가로막고, 법치주의를 무력화하며, 사회적 정의의 기준을 왜곡한다. 카르텔의 기득권이 공고해질수록 평범한 대다수 국민의 기회는 박탈당하고 경제적·사회적 자유는 극도로 제한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권 구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국가 시스템의 붕괴나 주권의 상징인 선거의 왜곡마저도 묵인하거나 동조하는 반(反)국가적 집단으로 변질되기 쉽다. 따라서 이 강고한 카르텔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자유와 정의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깨어 있는 국민만이 자유와 정의를 지킨다
인류 역사를 통해 알게 된 권력 현상의 본질은 탐욕과 확장에 있다. 그러므로 자유와 정의는 공기처럼 거저 주어지는 공짜가 아니며(Freedom is not free) 매 세대마다 피와 땀으로 지켜내야 하기에 매우 연약하다. 이를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는 결국 국민 자신이다.
권력과 이익 카르텔이 행하는 사소한 움직임 하나에도 이성적 혜안을 가지고 불의에 대해 매서운 비판과 지적을 아끼지 않는 깨어 있는 국민이 많아야만 비로소 자유와 정의를 지켜낼 수 있다.
특히 최근 치러진 6월3일 지방선거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하여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하고, 도처에서 부정 의혹이 제기되는 현실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민주주의의 꽃이어야 할 선거의 무결성과 공정성 마저 무너져 위기에 온 국민은 감시의 끈을 단 한 순간도 놓지 말아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눈을 감으면 우리의 자유가 사라지고, 우리가 침묵하면 우리의 정의가 매장된다. 현 정권의 반헌법적 행태와 선거 부정 의혹에 맞서 우리 세대와 미래 후손들의 운명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항상 깨어나 감시의 눈을 부릅떠야 한다.

◆ 신동춘 박사
행정학 박사, 자유통일국민연합 대표. 제21회 행정고시 합격 후 공직 생활을 거쳐 기업 CEO, 대학 교수, 언론 기고, 저술, 글로벌항공우주산업학회장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