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부산의 미군 진주 환영 시가행진 [사진=한국영상자료원]
1945년 8월, 해방은 축복이었지만 동시에 공백이었다. 국가가 사라진 자리에 질서가 들어서기까지의 시간은 언제나 위험하다.
이 공백기에 한국의 좌파, 특히 이후 ‘종북 좌파’로 불리게 될 계열이 저지른 첫 번째이자 결정적인 오류는 북한을 ‘진보’로 오인한 것이었다. 이 그릇된 판단은 이후 80년을 관통하는 정치적·도덕적 파탄의 출발점이었다.
해방 직후 한반도 북부는 소련 군정(1945~48) 아래 놓였다. 소련군은 평양을 중심으로 빠르게 행정·치안·선전 체계를 장악했고, 1945년 10월 김일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김일성은 항일 무장투쟁의 상징으로 포장되었지만, 실질 권력은 소련 군정과 그 정치적 후원에 의해 형성되었다.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고, 토지개혁과 기업 국유화가 단기간에 단행되었다. 이 급진적 조치들은 남한 좌파에게 ‘북은 개혁을 실행하는 진보, 남은 기득권에 묶인 반동’이라는 도식적 인상을 심어주었다.
北 장악한 김일성… 문제는 권력의 성격
문제는 속도와 형식이 아니라 권력의 성격이었다. 북에서 진행된 개혁은 다원적 합의나 시민의 자유를 전제로 하지 않았다. 반대 정파는 숙청되었고, 언론과 결사의 자유는 허용되지 않았다.
1946년부터 1948년 사이 북에서는 공산당 일당체제가 사실상 완성되었고,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권력은 김일성 개인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남한의 좌파는 이 체제를 “미완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완성형 진보”로 착각했다.
이 착각의 배경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식민지 경험의 분노가 판단을 흐렸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다는 이유만으로, 권위주의적 통치와 폭력적 숙청은 ‘과정의 문제’로 치부되었다.
둘째, 이념의 단순화였다. 반제, 반미, 반자본이라는 표지가 붙으면, 자유의 억압과 인권의 말살은 뒤로 밀렸다. 진보를 결과가 아니라 의도로 판단하는 습관이 이때 굳어졌다.
北을 진보 모델로 삼은 좌파
남한에서는 미군정(1945~1948) 아래 혼란과 갈등이 이어졌다. 좌우 대립, 경제난, 치안 불안이 중첩되자 일부 좌파는 북의 ‘질서’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 질서는 자유의 대가를 치르는 질서였다.
북은 선거를 통해 권력을 교체할 수 없는 체제로 빠르게 고정되었고, 권력 비판은 곧 반국가 범죄가 되었다. 이 사실을 외면한 채 북을 진보의 모델로 삼은 선택은, 이후 한국 좌파가 민주주의와 거리를 두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1948년 이후 이 오인은 되돌릴 기회를 여러 차례 가졌다. 한국전쟁(1950~1953)은 그 체제가 어떤 성격의 권력인지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일부는 남침의 책임을 흐리거나, 폭력을 ‘역사의 필연’으로 설명했다. 최초의 오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오히려 더 큰 왜곡을 낳았다. 한 번 ‘진보’로 규정한 대상은, 어떤 증거가 쌓여도 재검토되지 않았다.
진보는 변화의 방향이지, 특정 체제의 면허가 아니다. 자유와 책임, 권력의 견제와 시민의 권리를 결여한 체제는 어떤 개혁을 수행하더라도 진보가 아니다.
해방 직후 북한을 진보로 착각한 판단은 단순한 시대적 한계가 아니라, 사실보다 신념을 앞세운 선택이었다. 이 선택을 성찰하지 않는 한, 종북 좌파의 언어는 언제나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고,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시인, 역사·철학 연구자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로 전 이승만학당 이사를 지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으며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