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두희(오른쪽)는 1949년 6월26일 서울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를 쐈다.
안두희를 옹호한다는 말이 곧바로 김구 암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다.
1949년 6월26일 안두희는 서울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를 쐈다. 그날 오전 11시30분경, 육군 정복 차림의 안두희가 경교장을 찾아가 면회를 청했고, 김구를 만나자 권총을 발사했다는 점은 이미 여러 사료가 일치하게 적고 있다.
김구는 1876년에 태어나 1949년에 사망했고, 안두희는 1917년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해방 뒤 월남한 뒤 서북청년회에서 활동하고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에 입교한 인물이었다. 이 기본 사실은 흔들리지 않는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안두희를 단순한 실행범으로만 남겨 두지 않았다.
실제 행위보다 더 넓은 상징을 뒤집어쓰다
그에게는 실제 행위보다 더 넓은 상징이 덧씌워졌다. 어떤 사람은 그를 “민족반역의 모든 죄를 응축한 악마”로 그렸고, 어떤 사람은 “이승만 정권의 완전한 꼭두각시”라고 단정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돈과 명령에만 움직인 하수인”으로만 취급했다.
반대로 다른 한쪽에서는 “완전한 단독범”이라고 잘라 말한다. 안두희를 옹호한다는 말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확인된 사실보다 더 많은 말을 뒤집어씌우는 태도, 또는 확인된 정황을 아예 지워버리는 태도, 그 두 가지 모두가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먼저 안두희를 둘러싼 가장 흔한 왜곡은 “이미 모든 배후가 다 밝혀졌는데도 안두희만 입 다물고 버틴 자”라는 식의 단정이다. 실제 사료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안두희는 체포 뒤 재판 과정에서 단독 범행을 강하게 주장했다.
1949년 8월 6일 고등군법회의에서 그는 “간단히 말하면 내 마음은 평온하다. 그간 정치적 고민을 살해로써 해결하니 할 일을 다했다고 느낀다”는 취지로 진술했고, 인간적으로는 김구를 존경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자신이 옳다고 믿었다는 식의 말을 남겼다.
그는 사형을 요구하는 듯한 발언도 했다. 이 진술은 분명히 남아 있다. 따라서 “안두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생각도 없던 단순한 고용 킬러였다”는 말은 사료와 맞지 않는다.
그의 생각이 옳았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자기 나름의 정치 판단과 확신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안두희는 생각 없이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또 하나의 왜곡은 “안두희는 미친 자였다”는 식의 낙인이다. 그러나 안두희의 이력을 보면, 그는 아무 조직에도 속하지 않은 무연고 떠돌이가 아니었다.
신의주상업학교를 나왔고, 일본 메이지대 전문부 법과에 들어간 이력이 있으며, 해방 뒤에는 서북청년회에 몸담았고, 이후 육군사관학교 8기에 입교했다.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을 단순한 광인으로 처리하는 것은 사건의 정치성을 덮는 방식일 뿐이다. 안두희는 분명 위험한 정치적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고, 그 신념이 폭력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버튼을 누른 기계가 아니었다.
이 대목에서 안두희를 옹호한다는 말은 그의 범행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실보다 더 저열하고 비어 있는 존재로만 그리는 후대의 단순화를 비판하는 뜻이다.
세 번째로 짚어야 할 것은 “안두희는 완전한 단독범이므로 더 따질 것이 없다”는 설명이다. 이것도 사료에 어긋난다. 안두희 본인의 단독범행 진술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해방 직후 서북청년회와 군, 정보선과 맞닿아 있던 인물로 오래 거론되어 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김구 암살의 일차적 배후를 군부로 적고 있으며, 이승만의 직접 개입 증거는 없으나 뒤처리 개입은 확인된다고 서술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안두희를 옹호하려면 오히려 이 부분을 더 냉정하게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모든 죄를 혼자 만들어 낸 창조주가 아니다.
실행자는 안두희였지만, 사건 이후 벌어진 처리 과정을 보면 누군가가 그를 비호했을 가능성을 부정하기 어렵다.
안두희 개인에게 역사적 악의 전부를 몰아 넣는 방식은, 오히려 그를 둘러싼 권력의 흔적을 지워주는 효과를 낸다. 이것은 안두희에게도 억울하고, 역사 인식에도 해롭다.
이 부분은 재판 이후의 처리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안두희는 1949년 8월6일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그해 11월 형이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6월27일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
이어 1950년 7월10일에는 국방장관 특별명령으로 육군 소위에 복귀했으며, 1952년 2월15일 형 면제, 1952년 12월25일 소령 진급과 동시에 예편이라는 흐름이 이어진다.
그 뒤에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 식료품 공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안두희는 범행 직후부터 끝까지 철저히 버림받은 인간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비호, 누군가의 편의, 누군가의 눈감음이 있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다.
그렇다면 후대가 안두희 한 사람만을 ‘절대악’으로 만들고 분노를 몰아준 것은, 실제 권력 작동을 가리는 방식이 된다. 안두희를 옹호한다는 말의 뜻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분명 살인자였지만, 동시에 더 큰 판의 일부였고, 그 점이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채 홀로 지옥의 상징이 되었다는 뜻이다.
박기서의 안두희 살해는 사적 보복… 미화되선 안 돼
네 번째 왜곡은 “안두희는 평생 아무 사죄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1992년 2월28일, 안두희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김구 묘소를 참배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그는 묘소 앞에서 엎드려 사죄했고, “전 국민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한다. 그러나 범행 당시 배후는 없었으며 우발적인 범행이었다”고 말했다. 이 장면 하나로 그의 진정성이 다 증명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끝까지 비웃고 살았다”는 식의 상투적인 묘사는 사실과 맞지 않는다. 그는 공개적으로 사죄했다. 그 사죄가 늦었는지, 믿을 만한지, 계산이 섞였는지는 따로 따져도 된다.
하지만 실제로 있었던 사죄 장면을 통째로 지워버리고 “일말의 후회도 없던 괴물”로만 그리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왜곡이다. 안두희를 옹호하는 글이라면 바로 이런 부분을 되살려야 한다.
다섯 번째, 안두희에 대한 가장 감정적인 왜곡은 1996년 그의 죽음을 “정의가 마침내 완성된 날”로만 묘사하는 태도다.
안두희는 1996년 10월23일 인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박기서에게 피살되었다. 박기서는 이른바 ‘정의봉’이라 적힌 몽둥이로 안두희를 때려 살해했고, 이후 자수했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통쾌한 복수처럼 소비되었다.
그러나 법률적으로는 사적 보복 살인이다. 안두희의 죄가 무겁다는 것과, 박기서의 행위를 법치 차원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는 다른 문제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이 두 문제를 자주 뒤섞어 버렸다.
안두희를 향한 분노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를 때려죽인 행위는 곧바로 “국민의 판결”처럼 미화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안두희의 실제 죄와 허구의 죄가 구분되지 않는다.
그가 저지른 범행 자체로 충분히 무거운 데도, 한국 사회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모든 미움을 더 얹었다. 그것이 바로 안두희가 역사왜곡으로 억울한 이유다. 죄는 죄대로 묻되, 사실보다 더 부풀린 비난과 집단적 린치를 덧씌워서는 안 된다.
여섯 번째로 짚어야 할 대목은, 안두희가 한국 정치사에서 “모든 악의 출발점”처럼 과장된 점이다.
김구 암살은 물론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1948년과 1949년의 한반도는 이미 남북 정권 수립, 미소 대립, 좌우 충돌, 제주 4·3과 여순사건, 친일 청산 좌절, 단독정부 수립 논쟁 등으로 폭발 직전의 상태였다.
이런 복합 상황을 무시하고 “안두희가 김구를 죽였기 때문에 대한민국 역사가 전부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말하면 역사 해석이 지나치게 단순해진다. 안두희는 큰 사건의 실행자였지만, 한국 현대사의 전부를 한 사람에게 밀어 넣는 것은 균형을 잃은 서술이다.
그를 악마화할수록 오히려 당시 한국 정치 전체의 난폭함과 국가 권력의 책임은 뒷전으로 밀린다. 이 또한 안두희 개인에게는 일종의 과잉 전가다.
일곱 번째 왜곡은 “안두희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곧 김구를 모욕하는 일”이라는 태도다. 역사 연구는 그런 방식으로 할 수 없다. 김구를 존경하는 일과 안두희를 사실대로 보는 일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돌해서는 안 된다.
백범 김구는 1945년 11월23일 환국한 뒤 서울 종로구 평동 경교장을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했고, 그곳에서 1949년 6월26일 생을 마쳤다. 경교장은 지금도 사적으로 지정되어 그 비극을 증언한다.
그런데 바로 그 비극이 너무 컸기 때문에, 안두희에 대해서는 냉정한 서술이 어려워졌다. 사람들은 김구를 높이기 위해 안두희를 더 낮춰야 한다고 느꼈고, 그 과정에서 실제보다 더 많은 말을 얹었다.
하지만 김구의 위대함은 안두희를 괴물 이상으로 과장한다고 해서 더 커지지 않는다. 사실대로 적는 것이 오히려 김구에 대한 예의다.
여덟 번째로, 안두희는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말을 바꾼 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것도 절반만 맞는 말이다. 그는 공개적으로는 줄곧 단독범행을 주장했고, 비공개 추적 과정에서는 다른 진술을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1960년 4·19 이후 결성된 백범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위원회는 1961년 4월18일 안두희를 붙잡아 배후를 자백받았다고 적고 있다. 이 점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진술이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지, 법정에서 다시 검증되었는지, 어디까지가 직접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후대 재구성인지도 따져야 한다.
역사가는 언설의 충돌 그 자체를 기록해야
안두희의 말은 충돌한다. 그렇다면 역사가는 그 충돌 자체를 적어야 한다. 한쪽만 떼어 쓰면 안 된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대개 자기 입맛에 맞는 부분만 떼어 썼다.
안두희를 옹호하는 글이 할 일은 그를 무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한 사람의 진술과 기록을 정직하게 다루자는 데 있다.
안두희가 억울하다는 말은 그가 억울한 희생자라는 뜻이 아니다. 그는 분명 김구를 죽인 실행범이고, 그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다만 그는 자기 죄보다 더 큰 상징으로 소비되었다.
어떤 이는 그를 “민족반역의 총합”으로 만들었고, 어떤 이는 “한 개인의 우발 범행”으로 축소했다. 어느 쪽도 정확하지 않다. 안두희는 정치적 신념을 가진 장교였고, 동시에 더 큰 권력판 안에서 비호받은 흔적이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사죄도 했고, 침묵도 했고, 말을 바꾸었다는 의심도 받았고, 결국 법정이 아니라 사적 보복으로 죽었다. 이런 복잡한 실체를 가진 사람을 ‘괴물’ 한 단어로 밀어붙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쉬운 말은 대개 사실을 잘라낸다.
그래서 안두희를 옹호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 된다.
첫째, 그를 무지한 광인이나 텅 빈 꼭두각시로만 그리지 말자는 것이다. 둘째, 그의 범행을 한국 현대사의 모든 파탄으로 과장하지 말자는 것이다. 셋째, 그가 실제로 남긴 진술과 사죄 장면, 재판 기록, 형집행과 군 복귀 과정, 1996년 피살에 이르기까지의 구체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다.
넷째, 안두희 개인에게만 모든 죄를 몰아넣는 태도가 오히려 그를 둘러싼 군부와 권력의 흔적을 감춘다는 점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다섯째, 그가 죽임당한 일을 “정의의 승리”로만 미화하는 태도 역시 법치와 역사 인식 모두에 해가 된다는 점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를 빼면 안두희 문제는 연구가 아니라 구호가 된다.
1949년 6월26일의 총성은 바꿀 수 없다. 1949년 8월6일 무기징역 선고, 그해 11월 감형, 1950년 6월27일 형집행정지, 7월10일 군 복귀, 1952년 2월15일 형 면제, 12월25일 소령 예편, 1992년 2월28일 효창공원 참배, 1996년 10월23일 인천 신흥동 자택 피살이라는 날짜들도 지워지지 않는다.
이 숫자와 날짜들이 말해 주는 것은 한 가지다. 안두희는 단순한 한 줄짜리 인물이 아니다. 그는 범행의 실행자이면서도, 한국 사회가 자기 분노를 오래 덧칠해 온 대상이었다. 이 점에서 안두희는 역사왜곡으로 억울하다.
그 억울함은 무죄의 억울함이 아니다. 사실보다 더 많은 죄목과 상징을 뒤집어쓴 억울함이다. 역사 앞에서 필요한 태도는 영웅 숭배도 아니고, 악마 만들기도 아니다. 있는 사실을 끝까지 구분해서 적는 일이다. 안두희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말들은 그 구분을 자주 놓쳤다. 바로 그 점에서 안두희 옹호는, 실은 역사 옹호에 더 가깝다.

◆ 松山(송산)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역사심리학 해설서 ‘신화가 된 조선’(2026)을 펴냈다. 현재 자유주의 문화운동의 연구와 실천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