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4월 서울 시내에서 고등학생들이 교련 수업의 일환으로 행진을 하고 있다. 고등학생들도 기초 군사훈련을 받던 시절.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짧은 시간 안에 압축된 근대화를 경험한 나라다. 1945년 해방, 1948년 정부 수립,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연속된 격변 속에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기준은 단 하나였다.
공산주의에 맞서는 것, 즉 반공이었다. 이 기준은 단순한 정책이 아니라 국가 생존의 문제로 이해되었고, 그 결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오랫동안 반공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공산 체제였고, 실제로 전쟁을 일으켜 남한을 무력으로 통일하려 했다.
반공 교육은 곧 생존 교육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반공은 단순한 이념이 아니라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반공 교육은 곧 생존 교육이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사회 전반에서 반복된 반공 교육은 국가를 지키는 기본 장치로 작동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반공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데에는 탁월했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은 하나의 기준일 뿐이다. 그것만으로 국가의 방향과 개인의 삶의 기준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대한민국은 오랫동안 “공산주의는 나쁘다”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주입했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지향하는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설명만 제공해왔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반복했지만, 그 ‘자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개인에게 어떤 책임과 태도를 요구하는지에 대한 교육은 매우 부족했다.
자유는 단순히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상태가 아니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책임지는 상태다.
이 개념은 단순한 구호로는 전달되지 않는다. 역사, 철학, 법, 경제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 형성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교육은 이러한 자유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데에는 소홀했다.
예를 들어보자.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왜 그것이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가져오는 책임은 무엇인지에 대한 교육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를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한다. 자신이 지지하는 의견에는 관대하고, 반대하는 의견에는 쉽게 억압을 정당화한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경제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장경제가 무엇인지, 경쟁이 왜 필요한지, 사유재산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교육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성장과 분배라는 결과만 강조되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은 자유시장 경제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기보다, 단기적인 이익과 감정적 반응에 따라 판단하는 경향을 보인다.
법치주의 역시 충분히 내면화되지 못했다. 법이 왜 존재하는지, 왜 절차가 중요한지, 왜 개인의 정의감보다 제도가 우선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은 약했다.
법보다 ‘정서적 정의’ 앞서는 현상 만연
그래서 때로는 법보다 ‘정서적 정의’가 앞서는 현상이 나타난다. 특정 사건이 발생하면 법적 판단보다 여론 재판이 먼저 이루어지고, 결과에 따라 법의 정당성이 흔들리기도 한다.
결국 대한민국의 정체성 교육은 ‘부정의 기준’은 강했지만 ‘긍정의 기준’은 약했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이유는 반복적으로 학습했지만, 자유민주주의를 왜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부족했다. 이 불균형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큰 문제로 드러났다.
특히 냉전이 끝난 이후 이 문제는 더욱 선명해졌다. 과거에는 외부의 위협이 분명했기 때문에 반공이라는 기준만으로도 사회를 어느 정도 통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고 세계가 복잡해지면서, 단순한 이념 대립만으로는 사회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여전히 반공 중심의 사고에 크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 결과 나타난 현상 가운데 하나가 ‘정체성의 공백’이다. 무엇을 반대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무엇을 지향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은 상태다.
이 공백은 다양한 방식으로 채워진다. 어떤 사람은 민족주의로, 어떤 사람은 감정적 정의감으로, 어떤 사람은 단순한 반대 심리로 이 공백을 채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일관된 기준을 제공하지 못한다.
또 다른 문제는 극단적인 대립이다. 공통의 기준이 약해질수록 사람들은 서로 다른 기준을 절대화하게 된다. 그 결과 정치적 갈등은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수준으로 격화된다. 반공이라는 공통 기준이 약해진 자리에 새로운 통합 기준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정교한 교육 필요한 시점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반공 교육을 강화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자유에 대한 정교한 교육이다. 자유가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 그것이 개인과 사회에 어떤 책임을 요구하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자유는 방임이 아니다. 자유는 규칙 위에서 작동한다. 법치주의, 책임, 계약, 신뢰 같은 요소가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유지된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유는 쉽게 혼란으로 변한다. 따라서 자유 교육은 단순한 이념 교육이 아니라 생활 방식에 대한 교육이어야 한다.
또한 역사 교육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제도와 가치가 형성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단순한 사건 나열이 아니라, 선택과 결과의 연쇄를 이해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시민 교육도 다시 설계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투표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고, 합의 가능한 기준을 찾으며, 패배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는다. 반복적인 교육과 훈련을 통해 형성된다.
결국 대한민국의 위기는 단순한 정치 문제나 경제 문제가 아니다. 더 깊은 수준에서 보면 정체성의 문제다.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공통 이해가 약해진 상태다. 반공이라는 기준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기준이 충분히 자리 잡지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단순한 구호나 감정적인 호소로는 부족하다. 자유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 법과 제도에 대한 존중,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의 태도, 그리고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함께 형성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정체성 교육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이미 경제적으로, 기술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에 걸맞은 정신적 기반이 충분히 구축되었는지는 다시 점검해야 한다. 물질적 성장은 빠르게 이루어졌지만, 그것을 지탱하는 가치와 기준은 상대적으로 늦게 형성되었다.
이 불균형이 바로 지금의 혼란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외부의 적을 상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내부의 기준을 정교하게 세우는 작업이다. 자유를 이해하고, 책임을 받아들이며, 법을 존중하는 시민을 길러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앞으로 대한민국이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 松山(송산)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역사심리학 해설서 ‘신화가 된 조선’(2026)을 펴냈다. 현재 자유주의 문화운동의 연구와 실천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