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일 재판에 들어가기 전 형사법정 앞에서 김규나 작가. [사진=임요희 기자]
유엔 인권이사회는 지난 3월30일(현지시간) 북한의 인권 상황에 관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다음은 북한 외무성이 발표한 성명의 일부이다.
“20년 넘게 지속된 북한을 겨냥한 ‘인권 결의안’ 채택 관행은 유엔 인권 분야의 비참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며, 이는 정치화, 편파성, 이중잣대로 오염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오늘날 유엔 인권이사회가 직면한 시급한 과제는 패권 세력의 국가 테러와 주권 침해로 자행된 극악무도한 반인도적 범죄를 철저히 조사하고 책임을 묻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은폐 수단으로서의 언어
이것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다. 언어가 폭력을 은폐하고 현실을 왜곡하는 데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정치범 수용소, 강제 노동, 인신매매는 논의에서 사라지고 “정치화” “이중잣대” “주권 침해”와 같은 단어들로 대체되었다.
폭력은 여전히 존재한다. 언어는 단지 그것을 보이지 않게 할 뿐이다.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는다. 문화, 언어는 어떻게 사라지는 걸까? 그리고 그 소멸이 어떻게 인권 침해의 한 형태로 변하는 걸까?
문화는 어떻게 사라지는가
오늘날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종이와 펜은 우리 곁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화면에 글을 쓰고, 화면으로 읽는다. 종이와 펜의 소멸은 언어와 문화가 서서히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가는 징조일지도 모른다.
전쟁 중에 문화가 사라지고, 도서관이 무너지고, 책이 불타고, 사람들이 흩어져 책을 읽을 시간조차 없게 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전쟁터에서도 책은 언제나 살아남았다. 병사들은 신문과 잡지를 곁에 두고 혼란 속에서도 지식을 넓혀갔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며 잉크와 종이를 통해 잠시나마 평화를 찾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전쟁 속에서 책과 편지는 종종 우리의 인간성을 지켜주는 마지막 문화적 피난처가 된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대에는 문화가 조용히 사라져 간다. 박해 때문이 아니라 무지와 무관심 때문이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사회가 “그 주제는 논의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질문하기를 주저할 때, 비로소 문화는 위축되기 시작한다.
북한은 이러한 과정을 그 어느 곳보다 명확하게 보여준다. 1956년 해방 후, 김일성은 이른바 “반당, 반혁명 파벌 숙청”을 명령했다. 우리는 이를 ‘8월 종파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 단 하나의 사건이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작가, 학자, 심지어 친구의 말 한마디, 한 줄의 실수가 누군가를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버렸다.
북한의 문화 통제 구조
초창기부터 책과 언어는 국가 통제의 대상이었다. 출판물, 신문, 문학, 영화, 텔레비전, 심지어 일상적인 대화까지 감시와 검열을 받았다.
1949년 3월 북한 수상 김일성(가운데),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김일성 뒤), 부수상 홍명희 등 북한 정부 대표단이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소련 모스크바 크렘린궁에 들어서고 있다.
1970년대에는 혁명 오페라들이 텔레비전 화면을 가득 채우며 반일·반미 선전을 펼쳤다. 학교 교과서에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신천에서 무고한 어머니와 아이들을 학살했다는 등의 날조된 이야기가 실려 있었고, 이는 어린 학생들의 마음에 증오와 공포를 심어주었다.
북한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이것이 언어 통제나 문화 말살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국가가 어떤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지 정하고 있다.
다른 언어나 표현을 사용하면 누군가를 ‘반사회주의자’라고 낙인찍을 수 있으며, 한 사람의 말 한마디가 세대에 걸쳐 사람들을 수용소나 사형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외부 영향력을 범죄화하는 것
북한의 문화 말살 정책이 심화되는 가운데, 2009년 이후 시장을 통한 외부 정보의 확산은 정권에 새로운 위협을 가했다. 젊은이들이 한국어, 이름,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정권은 청소년 교육 보장법(2021), 반동 사상·문화 배척법(2022), 평양 문화 언어 보호법(2023)을 제정했는데 이 법들은 한류 콘텐츠를 차단하고, 언어를 제한하며, 국가가 승인한 발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행위조차 범죄화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북한에서는 외국 서적을 읽거나 외국 영화를 보거나 심지어 한국식 표현을 사용하는 것조차 불법이다. 심지어 영화 ‘오징어게임’을 봤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당한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영화, 드라마, 책, 음악, 심지어 소셜미디어에 올린 한 줄의 글까지 처벌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작가와 예술가는 질문을 하거나 다른 관점을 제시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한 검열이 아니다. 이는 문화적 말살이며, 기억, 상상력, 과거와 미래를 단절시키려는 시도이다.
정권이 기억을 불태울 때
역사는 반복된다. 나치 독일에서 책이 불태워졌을 때,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책이 불타는 곳에서 자유도 불타오른다”고 경고했다. 윈스턴 처칠은 “사람들이 책을 불태우는 것은 자신의 정신을 불태우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 수많은 책과 지식, 그리고 기억들이 지워졌다. 시대와 장소는 달랐지만, 그 방법은 언제나 같았다. 권력은 책을 통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왜냐하면 책은 다른 세계로 통하는 창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화 경고
이러한 교훈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 경고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최근 김규나 작가의 사례가 대표적인 예다.
작가는 역사와 문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소셜 미디어에 게시했고, 그녀의 발언은 5·18 민주화 운동 관련 법률에 따라 형사 기소의 근거가 되었다.
소설가 한강은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보편적 권리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김규나는 자신의 보편적 권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쟁점은 그녀의 글이 옳았는지 그른지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국가가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왜 어떤 사람의 의견은 보호받는 반면 다른 사람의 의견은 범죄가 되는 것일까?
이것은 단지 한 명의 한국 작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3만4000명이 넘는 북한 탈북민이 한국에 살고 있으며, 그중 많은 사람이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는 종종 "“이거 반북 선전 아닌가?”라는 의심을 받았으며, 작가의 권리는 편견에 의해 자주 침해당했다.
5·18민주화운동 특별법은 허위 정보 유포를 막기 위해 제정되었다. 그러나 “허위” “해석” “의견” 사이의 경계는 항상 명확하지는 않다.
이러한 법률이 확대될 경우, 북한의 악명 높은 “삼대악법”처럼 정보와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국가가 언어의 한계를 규정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침묵하기 시작한다. 단 한 문장, 단 한 줄의 글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위험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러한 자발적인 침묵은 전체주의로 가는 첫걸음이다.
민주주의의 기준
국제 기준은 명확하다.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19조는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며, 어떠한 제한도 최소한이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의견, 특히 논란이 되거나 불편한 의견을 범죄화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거듭 강조해 왔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지난 3월30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북한의 인권 상황에 관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EPA=UPI)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시끄럽다. 논쟁과 의견 불일치, 불편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시끄러움은 결점이 아니라 자유 사회의 본질이다.
오직 하나의 해석만이 허용될 때, 민주주의는 우리가 거부한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전체주의로 무너져 내린다. 자유 사회에서 사람들이 침묵을 선택하기 시작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 이미 검열은 시작된 것이다.
북한의 문화 통제는 극단적이지만, 김규나와 같은 사례는 민주 사회에서도 공포가 어떻게 확산될 수 있는지에 대한 조기 경고 신호 역할을 한다.
전쟁에서 책이 불타는 이유는 간단하다. 책은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미래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문화는 다양성을 지닐 때 비로소 살아남는다. 단 하나의 해석만이 남게 되면, 문화는 이미 죽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작가들은 질문을 던진다. 국가는 질서를 유지한다. 이 둘 사이의 긴장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 긴장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질서가 아니라 침묵이다.
자유가 사라지는 온도
사람들은 흔히 조지 오웰을 떠올리지만, 1953년에 출간된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화씨 451도’도있다. 화씨 451도, 즉 섭씨 232.8도는 책이 불타는 온도다.
브래드버리의 디스토피아에서 소방관들은 불을 끄는 대신 책을 불태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책을 통해 자신을 재발견하고 통제된 사회에 저항한다.
책은 화씨 451도에서 불에 타지만, 문화는 훨씬 낮은 온도에서 사라진다. 그것은 우리가 질문을 멈출 때, 다른 의견을 두려워할 때, 침묵을 선택할 때 시작된다.
침묵은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는 문장들, 쓰지 않는 단어들, 감히 묻지 못하는 질문들 속에서 조용히 자라나는 것이다.
문화는 다양성을 통해서만 살아남는다. 자유는 우리가 말할 수 있을 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말할 권리가 있다고 믿을 때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이 지켜야 할 것은 “올바른 발언”이 아니라, 발언의 자유 그 자체이다.
책이 불타는 온도는 정해져 있다. 하지만 자유가 사라지는 온도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다.
박지현 씨는 아시아태평양전략센터(Center for Asia Pacific Strategy)의 인권 안보 분야 선임 연구원으로 한국계 영국인 보수당 정치인이자 한국지역평론지(Korea Regional Review)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칼럼니스트다. 그는 탈북자 출신으로, 1998년 첫 탈출 시도는 강제 송환으로 실패했지만 2008년 두 번째 탈출 시도는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