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파들은 왜이리 양심도 없고, 역지사지를 못하는 건지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참정권을 강탈당한 2030 청년들의 거룩한 분노를 다룬 내 글에, 한 방문자가 찾아와 점잖은 척 댓글을 남겼다. “태극기 든 극우 세력이 끼어들어 자기 세력인 양 부정선거를 외치며 본질을 흐리는 게 더 문제다.”
나는 이 익숙하고도 얄팍한 방어 기제 앞에서, 잠시 감정을 누르고 차갑게 되물었다.
“제발 양심에 손을 얹고 양 진영의 역사를 돌아보라. 광우병 괴담부터 세월호, 사드, 후쿠시마, 이태원 참사에 이르기까지, 좌파 진영이 남의 비극에 끼어들어 매번 마치 자신들의 전리품인 양 탈취했던 것은 단 한 번이라도 비판해 본 적이 있는가?”
역사의 궤적을 건조하게 복기해 보라. 이 나라에 거대한 비극이나 사회적 이슈가 터질 때마다, 가장 먼저 달려가 광장을 선점하고 정치적 깃발을 꽂았던 자들이 과연 누구였던가.
순수한 추모와 우려가 모인 자리에 어김없이 민주노총의 조끼와 특정 정파의 깃발이 난입했다. 그들은 타인의 아픔을 숙주 삼아 ‘정권 퇴진’이라는 자신들의 낡은 청구서를 천연덕스럽게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때 좌파 지식인들과 언론 중 그 누구 하나 “극좌 세력이 끼어들어 시민의 순수성을 오염시킨다”며 비판의 날을 세운 적이 있던가. 오히려 그 불순한 하이재킹(Hijacking)을 ‘위대한 시민의 연대’라며 칭송하고 미학화하기에 바빴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의 진영에 치명적인 선관위의 헌정 유린 사태가 터지고, 표를 도둑맞은 청년들이 거리에 나서자 그들의 잣대는 돌연 180도 뒤집힌다. 분노한 우파 지지자들이 태극기를 들고 그 시위에 동참하는 현상을 두고, 돌연 엄격한 사상 감별사로 돌변해 ‘극우의 오염’이라며 핏대를 세운다.
자신들이 남의 슬픔과 분노에 숟가락을 얹어 판을 키우는 것은 정의로운 ‘시민 연대’이고, 보수 시민들이 빼앗긴 헌법적 주권을 되찾기 위해 청년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는 것은 배격해야 할 ‘극우의 난동’인가. 이 지독하고도 구역질 나는 내로남불 앞에서는 헛웃음조차 아깝다.
이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드는 ‘극우’라는 프레임의 본질은 너무도 투명하다. 그것은 논리적 궁지에 몰렸을 때 도망치기 위한 가장 값싼 비상구다.
전국 수십 곳에서 투표용지가 증발하고 핵심 증거가 대낮에 쓰레기차에 실려 불태워진 이 전대미문의 국가 범죄 앞에서, 그들은 팩트로 반박할 능력이 없다.
그러니 시위대의 구성원 중 일부를 악마화하여 메신저 자체를 매장하려 드는 것이다. “극우가 묻었으니 저 시위의 본질은 훼손되었다”는 식의 조악한 연좌제 씌우기다.
광장에는 늘 다양한 생각과 상징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태극기가 펄럭이든, 누가 옆에서 부정선거 구호를 외치든, 헌법 기관이 주권자의 표를 훔치고 증거를 소각했다는 그 서늘한 본질적 팩트는 결코 지워지거나 훼손되지 않는다.
내 편의 숟가락 얹기는 숭고한 연대고, 남의 편의 동참은 극우의 선동이라 규정하는 그 편협하고 얄팍한 시선. 남의 광장에 묻은 티끌을 비웃기 전에, 비극을 정치적 자판기로 써먹으며 광장을 오염시켜 온 당신들 진영의 그 끔찍한 ‘하이재킹’의 역사부터 먼저 뼈아프게 성찰하기를 권한다.

◆ 박주현 작가
작곡가, 음악감독, 칼럼니스트, 수필가. 페이스북에서 정치, 시사,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해 수많은 이의 공감을 얻고 있다. 에세이집 ‘폭풍의 바다를 건너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