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투표 용지는 동이 나도록 방치했던 선관위가, 정작 사전투표 용지는 실제 투표자의 두 배가 훌쩍 넘는 2390만 명 분량을 넉넉하게 준비해 두고 있었다. [사진=연합뉴스]
우연이 반복되면 그것은 필연이다. 그리고 그 필연이 오직 한 진영에만 유리하게 작용한다면, 그것은 우연을 가장한 기획, 즉 ‘조작’이다.
6·3지방선거에서 벌어진 사상 초유의 본투표 투표용지 부족 사태. 민주주의의 심장인 투표소에서 주권자가 용지가 없어 발길을 돌려야 했던 이 참담한 사태를 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그저 수요 예측에 실패한 행정적 실수라며 고개를 숙이는 척했다. 그런데 그 변명의 장막이 걷히고 드러난 이면의 팩트는 참으로 서늘하고도 기괴하다.
사전투표 용지는 실제 투표자의 두 배 준비
본투표 용지는 동이 나도록 방치했던 선관위가, 정작 사전투표 용지는 실제 투표자의 두 배가 훌쩍 넘는 2390만 명 분량을 넉넉하게 준비해 두고 있었다.
특히 좌파의 정치적 텃밭인 광주에는 실제 선거인 대비 무려 256.1%라는 압도적인 물량을 비축했다. 반면, 본투표를 선호하는 보수층의 표심은 ‘용지 부족’이라는 물리적 장벽에 가로막혀 철저히 질식당했다.
왼쪽 주머니는 흘러넘치도록 채워주고, 오른쪽 주머니는 구멍을 내버린 이 정교한 불균형. 선관위는 현장에서 롤을 잘라 쓰다 보니 길이가 달라 넉넉히 준비했다는 얄팍한 핑계를 대지만, 이 조악한 변명을 곧이곧대로 믿어줄 만큼 대중은 어리석지 않다.
‘개헌안’ 국민투표 용지까지 미리 준비했다
더욱 소름 끼치는 팩트는 따로 있다. 국회 본회의 문턱도 넘지 못한 ‘개헌안’ 국민투표를 대비한다며, 선관위가 250만 명 분량의 투표용지를 미리 찍어낼 준비를 해 두었던 것이다.
‘5·18정신 수록’과 ‘비상계엄 국회 통제권 강화’ 등을 담은 이 개헌안은 다분히 이재명과 민주당의 당리당략이 담긴 정치적 어젠다였다. 결국 국민의힘의 불참으로 투표 불성립 폐기될 사안에, 선관위가 앞장서서 예산을 들이고 김칫국을 마시며 출격 대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헌법상 독립 기구여야 할 선관위가 거대 여당의 입맛에 맞춰 알아서 기는 것을 넘어, 아예 이재명 체제의 선거 기획을 대행하는 ‘외주 하청업체’로 전락했음을 스스로 증명한 완벽한 알리바이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여전히 “부정선거는 음모론”이라며 앵무새처럼 핏대를 세우는 분들이 있다. 투표소에 인민군이 소총을 들고 서서 반대표를 찍는 자들을 즉시 사살하는 정도는 되어야, 부정선거라고 인정할 텐가?
막걸리 선거만 부정선거가 아냐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부정선거인가. 투표함에 뭉칫돈처럼 표를 쑤셔 넣던 막걸리 선거 시대의 아날로그 조작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21세기의 부정선거는 아주 세련되고 행정적인 얼굴을 띠고 온다.
본투표는 품절시키고 사전투표와 개헌에는 덤핑을 친 선관위. 이 노골적인 이중잣대 앞에서도 선관위가 민주당과 한패가 아니라고 우긴다면, 그것은 지능의 문제이거나 양심의 파산이다.
선거의 룰을 관리하는 심판이 한 쪽 팀의 유니폼을 입고 뛰는 경기장. 그곳에서 내려지는 결과를 우리는 더 이상 선거라 부를 수 없다. 그것은 투표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민주주의에 대한 거대한 능욕일 뿐이다.

◆ 박주현 작가
작곡가, 음악감독, 칼럼니스트, 수필가. 페이스북에서 정치, 시사,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해 수많은 이의 공감을 얻고 있다. 에세이집 ‘폭풍의 바다를 건너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