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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민경국]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누구의 것인가?
  • 민경국 강원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 등록 2026-06-26 18:3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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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병준 교수의 동일한 제목의 글에 대한 하이에키안적 재해석

삼성전자 노사 간 특별성과급 합의를 둘러싸고, 영업이익의 귀속 문제가 학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사진=연합뉴스]김병준 교수의 ‘삼성전자의 영업이익 누구의 것인가?’는 삼성전자 노사 간 특별성과급 합의를 둘러싸고, 영업이익의 귀속 문제를 재무경제학·상법·지배구조·노사관계의 관점에서 분석한 글이다. 

 

이 글의 핵심적 문제의식은 매우 명확하다. 즉, 기업의 영업이익은 본질적으로 누구의 몫인가, 그리고 노동자가 영업이익에 대해 사전적 청구권을 가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글 전체는 대체로 주주 잔여청구권(residual claimancy)의 우선성을 강조하며, 노동자에 대한 성과공유 확대가 자본주의 질서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는 문제의식 위에서 전개된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하이에크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단순히 “주주의 권리가 우선한다”는 법적·재무적 주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이에크의 핵심적 관심은 언제나 “누가 더 도덕적으로 정당한가”보다 “어떤 제도가 장기적으로 자생적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이익은 시장을 통해서 자생적으로 형성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단순히 “노동”만의 결과도 아니고 “주주”만의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소비자 수요, 기술혁신, 글로벌 공급망, 장기적 설비투자, 연구개발, 경영판단, 국제금리, 환율, 지정학적 리스크 등 수많은 요소가 결합된 복잡한 질서의 산물이다.

 

김 교수의 글은 시장질서를 지나치게 “주주 중심의 법적 권리 체계”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하이에크는 사적 소유를 매우 중시했지만, 특정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적 소유는 분산된 개인들이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실험할 수 있게 만드는 문명적 장치였기 때문이다. 즉 사적 소유는 자생적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규칙이지, 특정 이해집단의 도덕적 특권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김 교수의 글이 반복적으로 “노동자는 위험을 부담하지 않는다”고 서술하는 부분은 부분적으로 타당하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다. 실제 현대적인 대기업 노동자들 역시 상당한 위험을 부담한다. 

 

기술 변화에 따른 구조조정 위험, 경기침체에 따른 해고 가능성, 특정 기술 숙련에 대한 인적자본 투자 등은 노동자 개인이 감수하는 실질적 위험이다. 물론 이것이 주주와 동일한 종류의 위험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의 기여를 단순한 “고정 계약”으로만 환원할 수도 없다.

 

더 중요한 문제는, 하이에크가 결코 기업 내부를 완전한 계획질서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업 역시 내부적으로는 계획된 조직(taxis)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시장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적응해야 하는 질서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성과공유 요구가 반드시 사회주의적 통제로 이어진다고 단정하는 것은 과도하다. 실제로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이 RSU(Restricted Stock Unit, 양도제한조건부주식: 임직원에게 일정 기간 근속이나 성과 목표 달성 등의 조건을 충족하면 회사의 자사주를 무상으로 직접 지급하는 주식 기반 보상 제도) 방식의 성과보상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현실을 보더라도, 시장은 스스로 다양한 보상 체계를 진화시켜 왔다. 하이에크는 오히려 이러한 제도적 실험 자체를 시장의 자생적 진화 과정으로 이해했다.

 

특히 김 교수의 글은 기업 내부의 조직으로서 자유로운 계약에 형성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거의 전면적으로 사회주의적 통제로 연결 짓고 있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모든 사회적 조정을 국가계획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그의 핵심 비판 대상은 예를 들면 노랑봉투법처럼 특정 목적을 위해 경제 전체를 중앙집권적으로 설계하려는 “구성주의적 합리주의(constructivist rationalism)”였다. 

 

따라서 자발적 협력과 계약을 통한 성과공유 자체까지 반시장적으로 보는 것은 하이에크의 입장보다 더 강경한 시장주의에 가깝다. 오히려 하이에크적으로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즉, 삼성전자의 이번 성과급 합의가 장기적으로 생산적 질서를 강화하는가, 아니면 정치화된 분배투쟁을 확산시키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김 교수의 글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의 글이 지적하듯, 영업이익 기준의 성과공유가 강제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하면, 협력업체·타기업 노조·정치세력·시민단체 등 다양한 집단이 동일한 논리를 근거로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는 하이에크가 ‘노예의 길’이나 ‘자유헌정론’에서 경고했던 “집단 간 분배정치의 확대”와 유사한 현상이다. 하이에크는 민주주의 자체보다, 민주주의가 특정 집단의 경제적 청구권 경쟁으로 변질될 때 자유질서가 붕괴된다고 보았다.

 

특히 “영업이익의 일정 비율”을 정치적으로 배분하기 시작하면, 시장은 자생적으로 생성된 가격 질서가 아니라 이해집단 간 협상질서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하이에크에게 이는 매우 위험한 징후이다. 왜냐하면 가격은 분산된 정보를 반영하는 신호체계인데, 정치적 배분은 이 신호체계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기업의 투자유인이 약화되고, 자본축적의 예측 가능성이 낮아지며, 이는 결국 생산성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김 교수의 글이 지적하는 “노노갈등” 문제 역시 하이에크적으로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하이에크는 사회정의 개념 자체에 회의적이었다. 왜냐하면 복잡한 시장질서에서는 누구의 기여도를 객관적으로 계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성전자 사례에서도 DS 부문과 DX 부문, 메모리와 비메모리, 적자사업부와 흑자사업부 간의 기여도를 절대적으로 산정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도덕적 기준으로 “공정한 배분”을 시도하면 끝없는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하이에크가 말한 “사회정의의 신기루” 문제이다.

 

결국, 김 교수의 글이 갖는 가장 중요한 하이에크적 의미는 현대적인 대기업이 단순한 기업을 넘어 하나의 정치적 분배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는 데 있다. 노동조합, 소액주주, 시민단체, 협력업체, 정치권력 모두가 기업의 영업이익에 대해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주장하기 시작할 때, 기업은 더 이상 시장 질서의 생산 단위가 아니라 이해관계 조정의 정치 공간이 된다. 하이에크는 바로 이러한 현상을 자유주의 질서의 장기적 위협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이에크는 단순히 “주주 절대주의”를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특정 집단의 승리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일반규칙 아래에서 즉 법의 지배하에서 시장질서가 지속될 수 있는가였다. 따라서 핵심은 노동자 성과보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치적 강제가 아니라 자유계약과 시장경쟁 속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성전자의 RSU 방식은 하이에크적으로 비교적 흥미로운 제도 실험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을 단순 임금계약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 기업가치와 연결시키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제도 역시 시장경쟁 속에서 검증되어야 하며, 국가권력이 강제하는 일반 모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결론적으로 김 교수의 글은 하이에크적 관점에서 상당한 통찰을 제공한다. 특히 영업이익의 정치화, 이해집단 간 분배경쟁, 투자유인 약화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의 기여와 제도적 진화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주주권리를 거의 절대적 기준으로 환원하는 경향 역시 존재한다. 

 

하이에크는 “누구의 몫인가”라는 질문 자체보다, “어떤 규칙이 장기적으로 자유로운 시장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더 중요하게 보았다.




민경국 강원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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