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호놀룰루에 살았을 때의 젊은 이승만(왼쪽)과 1948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직후의 이 대통령. [연합뉴스 자료사진]
오늘날 이승만을 이야기하면 가장 흔히 따라붙는 수식어 가운데 하나가 ‘반일주의자’다. 한일회담을 거부했고, 평화선을 선포했으며, 일본에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러한 몇 가지 정치적 사건만으로 이승만을 반일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그의 사상과 외교 전략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해석이다.
오히려 이승만은 감정보다 국익을 우선했던 현실주의 정치가였으며, 일본을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반드시 넘어야 할 경쟁국으로 인식했던 인물이었다. 이승만을 이해하려면 ‘반일’이라는 감정의 틀에서 벗어나 그의 국가관과 국제정치 인식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이승만은 일본이라는 민족 자체를 증오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차례 일본 국민과 일본 정부를 구분했고, 일본을 미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조선을 독립시키는 것이 목적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는 “나는 일본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그의 관심은 복수가 아니라 국가의 생존이었다. 일본을 미워하는 감정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가 그의 정치의 출발점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승만이 제국주의 자체를 반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글과 연설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그는 모든 제국주의를 동일하게 보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강대국이 약소국을 어떻게 대하는가였다.
그는 조선을 병합하고 발전시키지 않은 일본의 식민 통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반면 미국이 하와이를 개발하고 교육을 확대하며 자치를 넓혀 간 과정에는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다시 말해 그는 ‘제국이냐 아니냐’보다 ‘어떤 통치이며 어떤 문명을 가져왔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기독교 세계관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이승만은 문명의 발전을 단순한 경제 성장으로 보지 않았다. 자유, 법치, 민주주의, 기독교 윤리, 개인의 권리가 함께 성장해야 진정한 발전이라고 믿었다.
미국을 높게 평가한 이유도 단순히 군사력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기독교 문명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일본이 조선을 그러한 방향으로 이끌지 못했다는 점을 비판한 것이지, 일본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초기 독립운동에서도 이러한 현실주의는 그대로 나타난다. 오늘날 우리는 독립운동이라고 하면 처음부터 완전한 독립만 주장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당시 국제질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이미 국력을 상실했고 열강은 식민지를 경쟁적으로 확대하고 있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승만은 국제정세를 냉정하게 분석했다.
그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조선이 하와이와 비슷한 수준의 자치를 확보한 뒤 점진적으로 독립을 이루는 방안까지 검토했다. 이것은 독립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한 길을 찾으려는 외교 전략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승만은 혁명가라기보다 외교가였다. 그는 이상만 외치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언제나 국제질서 속에서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길을 계산했다. 현실을 무시한 민족주의보다 국제정세를 이용하는 외교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의 독립운동은 감정의 정치가 아니라 힘의 정치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이러한 현실주의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은 일본을 동아시아의 핵심 동맹국으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6·25전쟁 이후에는 그 흐름이 더욱 분명해졌다.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은 산업 생산과 군수 지원의 중심이었고, 대한민국은 공산주의를 막는 최전선이었다. 이승만은 이 구도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과의 관계를 감정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는 대한민국이 충분한 국력을 갖추기 전까지는 일본과의 협상에서 쉽게 양보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만약 미국이 일본만 중시하고 대한민국을 소홀히 한다면 한국은 일본의 경제적 종속국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따라서 그의 강경한 대일정책은 반일 감정보다 국가의 협상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평화선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흔히 평화선을 일본을 향한 적대 정책으로 설명하지만, 이승만에게 그것은 해양 주권을 확보하고 대한민국의 생존 기반을 지키기 위한 국가 전략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에서 수산업은 매우 중요한 산업이었다. 그는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는 바다를 먼저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감정이 아니라 국가이익의 문제였다.
더 중요한 것은 이승만의 최종 목표였다. 그는 일본을 영원한 적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한민국이 일본보다 강한 국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다시 말해 그의 노선은 ‘반일’이 아니라 ‘극일’이었다. 일본을 미워하는 데 시간을 쓰기보다 일본을 뛰어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의 교육 정책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문맹 퇴치와 의무교육 확대를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국민이 배우고 산업이 성장하며 민주주의가 정착해야 일본과 경쟁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감정만으로는 국가가 강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승만의 통일관 역시 같은 맥락이다. 오늘날 우리는 분단이 너무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도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달랐다. 그는 공산주의 체제가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믿었다. 자유세계가 결국 승리하고 대한민국 중심의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지도자들도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공산주의의 붕괴를 예상한 사람도 적지 않았으며, 실제로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은 훗날 해체되었다. 이승만의 통일관은 현실을 외면한 망상이 아니라 자유 진영의 승리를 믿었던 시대적 확신의 연장선에 있었다.
그에게 통일은 단순한 영토 회복이 아니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한반도 전체로 확대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통일 문제에서 쉽게 타협하지 않았다. 분단을 영구적인 상태로 받아들이는 것은 국가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종종 정치를 현실과 이상 가운데 하나만 선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했다. 외교에서는 누구보다 냉정한 현실주의자였고, 국가의 미래에서는 누구보다 강한 이상주의자였다. 현실에서는 계산했고, 미래에서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정치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따라서 이승만을 단순히 ‘반일주의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의 정치사상을 감정의 틀 속에 가두는 일이다. 그는 일본을 미워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강하게 만들려는 정치인이었다. 그의 대일정책은 증오가 아니라 국익이었고, 외교는 감정이 아니라 전략이었다.
오늘날 한일관계를 바라볼 때도 이승만을 감정의 정치인으로 기억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가 남긴 가장 큰 교훈은 국가 간 관계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생존과 미래를 위한 전략이라는 점이다. 이승만은 반일을 국가 목표로 삼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언제나 자유롭고 부강한 대한민국이었다. 일본을 넘어서는 나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나라, 그리고 언젠가 자유통일을 이루는 나라. 그것이 이승만이 평생 추구했던 국가 비전이었다.

◆ 松山(송산) 정광제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