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왼쪽)과 존 러기 유엔 사무총장 특별보좌관(오른쪽)이 2004년 6월 24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글로벌콤팩트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다. [사진=UN 홈페이지]
유엔의 명분, 금융의 규칙… 지수제국을 설계한 사람들
①편(세계의 돈은 누가 설계하나)에서는 지수회사가 자본의 지도를 그리고, 자산운용사가 그 지도 위로 돈을 이동시키는 구조를 살펴봤다.
그러나 지수도 진공 속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무엇을 위험으로 볼지, 어떤 기업을 책임 있는 기업으로 인정할지, 어떤 정보를 투자 판단에 넣을지에 관한 더 큰 규범이 먼저 존재한다.
그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유엔의 지속가능발전이었다. 1987년 유엔 세계환경개발위원회는 미래 세대의 필요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현재의 필요를 충족하는 발전을 지속가능발전으로 정립했다.
2015년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는 이를 빈곤·보건·기후·에너지·산업 등 17개 목표로 확장했다. 이 가치에 가격표를 붙이고 자본시장의 언어로 번역한 것은 금융기관들이었다.
□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연 문
1999년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기업 지도자들에게 유엔과 기업이 공유하는 가치와 원칙의 ‘글로벌콤팩트’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듬해 출범한 유엔 글로벌콤팩트(UN Global Compact)는 인권·노동·환경·반부패의 10대 원칙을 기업 활동에 확산시키는 자발적 이니셔티브였다.
여기서 기업은 국제규범의 적용 대상에 머물지 않고, 유엔과 함께 규범과 실행방법을 만들어 세계 기업망으로 확산시키는 파트너가 됐다. 코피 아난은 기업을 국제규범의 수용자에서 공동 설계자로 끌어올렸다.
결정적인 장면은 2004년이었다. 코피 아난은 세계 주요 금융기관 55곳의 최고경영자에게 환경·사회·지배구조(ESG)를 자산운용과 증권분석에 통합할 지침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가 “Who Cares Wins” 보고서다.
9개국 20개 금융기관이 개발에 참여했고 총 운용자산은 당시 6조 달러를 넘었다. 표지에는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도이체방크, HSBC, UBS, BNP파리바, 국제금융공사(IFC), 세계은행그룹 등 23개 승인기관이 적혔다.
출발점은 자선이 아니었다. ESG를 잘 관리하는 기업은 위험을 줄이고 규제변화를 예측해 주주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투자 논리였다.
환경과 인권, 노동과 지배구조가 ‘좋은 일’에서 기업가치에 영향을 주는 금융정보로 바뀐 순간이다.
현대 ESG 투자체계는 유엔이 금융회사에 내려준 규칙이 아니었다. 유엔이 금융회사들에 직접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 규칙이었다.
□ 정부는 강제력, 시장은 세부 규칙
“Who Cares Wins”는 정부와 규제기관에 ESG 공시와 책임에 관한 최소한의 법적 틀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동시에 세부 기준은 시장 주도의 자발적 이니셔티브를 통해 설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증권거래소에는 상장기업 공시에 ESG를 포함하라고 했고, 회계기준기관·신용평가사·지수사업자에는 일관된 기준을 만들라고 촉구했다. 연기금에는 운용사 선정과 투자위임에 ESG를 반영하고, 자산운용사에는 투자분석과 의결권 행사에 ESG를 통합하라고 권고했다.
구조는 명확했다. 정부는 최소한의 강제력을 제공하고, 금융시장은 그 안에서 사용할 세부 규칙을 만든다.
2006년 출범한 유엔 책임투자원칙(PRI)은 이를 기관투자자의 실행체계로 옮겼다. ESG를 투자분석과 의사결정, 주주권 행사, 기업공시 요구에 통합한다는 여섯 가지 원칙이 만들어지면서 ESG는 연기금과 자산운용사의 행동규칙으로 이동했다.
①편에서 살펴본 지수제국도 여기에서 연결된다. ESG 원칙이 기업공시가 되고, 평가회사가 이를 점수로 만들며, 지수회사가 편입과 비중의 기준으로 사용한다. 자산운용사는 그 지수를 추종해 돈을 움직인다. 유엔의 가치언어가 금융회사의 분석언어를 거쳐 자본의 배분규칙으로 변환된 것이다.
□ 유엔의 이름, 민간의 돈
유엔 글로벌콤팩트는 유엔 정규예산을 받지 않는다. 정부는 신탁기금에 기여하고, 기업은 미국 뉴욕주 비영리법인인 글로벌콤팩트재단에 분담금과 기부금을 낸다.
재단은 유엔과 법적으로 별개지만 양해각서를 통해 유엔 글로벌콤팩트의 모금·인력·행사·연구·프로그램을 지원한다. 2023년 감사재무제표를 보면 기업 참가자와 서명기관의 정기 분담금은 약 2886만 달러, 별도 기부금과 보조금은 약 1981만 달러였다. 이 가운데 약 1372만 달러에는 기부자가 정한 사용 목적이 붙어 있었다.
어느 사업과 의제에 돈을 쓸지 지정할 수 있다면, 그 돈은 조직의 우선순위에 더 가까이 접근한다. 유엔은 이름과 국제적 정당성, 외교적 소집력을 제공하고 기업과 금융기관은 자금·데이터·전문가·실행력을 제공한다. 글로벌콤팩트는 두 힘을 결합해 민간의 기준을 국제규범의 언어로 바꾸는 공공·민간 복합체다.
□ 가장 큰 시장을 얻은 사람들
이 구조에서 가장 넓은 새 시장을 얻은 쪽은 금융산업이었다. 자산운용사는 ESG 펀드와 상장지수펀드(ETF)를 만들었고, 은행은 녹색채권·지속가능대출·전환금융을 확대했다. 평가·데이터·지수회사는 ESG를 점수와 등급으로 만들어 반복적으로 판매했다. 회계법인과 컨설팅회사에는 공시·검증·전략자문 시장이 생겼다.
그렇다고 ESG가 모두 허구라는 뜻은 아니다. 기후위험과 노동권, 부패와 기업지배구조는 기업가치와 사회에 영향을 준다. 문제는 누가 위험을 정의하고 측정 기준을 정하며, 그 점수로 자본의 가격과 이동 방향을 결정하느냐다.
규칙의 적용을 받을 금융기관들이 규칙의 초안을 직접 썼고, 그 규칙을 상품화할 능력도 보유했다는 사실은 이해상충의 질문을 피할 수 없게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ESG와 국제기구 중심의 다자주의를 공격하는 이유도 이 구조에서 읽을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ESG를 투자수익보다 정치적 목표를 앞세우는 자본배분으로 규정해 왔다. 2025년에는 ESG와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의제를 중시하는 의결권 자문회사의 영향력을 문제 삼고 관련 규정과 주주제안 규칙을 재검토하도록 지시했다.
트럼프와 유엔의 충돌은 국제협력 여부만의 논쟁이 아니다. 유엔·금융·지수 네트워크가 만든 세계 공통 규칙과, 선출된 국가권력이 산업·에너지·투자정책을 직접 결정해야 한다는 주권 정치의 충돌이다.
지수제국의 속살은 거대한 비밀조직이 아니었다. 유엔의 권위, 정부의 강제력, 금융기관의 돈과 전문성이 서로를 필요로 하며 만든 공개된 권력망이었다.
지속가능발전은 명분을 제공했고, ESG는 가격표를 붙였으며, PRI는 자본을 움직이는 실행규칙을 만들었다.
⓵편에서 우리는 자본이 움직이는 지도를 봤다. ②편에서는 그 지도를 그린 규칙 설계자들을 추적했다. 이어지는 ③편에서 다룰 주제는 ‘그 지도도 영원하지 않다’는 점이다.
지금 세계에서는 두 권력이 충돌하고 있다. 하나는 유엔의 보편적 명분과 금융자본의 실행력이 결합한 초국적 권력이다. 다른 하나는 선거와 국경, 국가주권을 앞세운 정치권력이다.
최종 승자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세계의 돈을 지배하는 사람은 돈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돈이 따라야 할 규칙을 정하는 사람이다. 트럼프의 반란은 바로 그 규칙을 누가 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싸움이다.
※이 기사는 “주간 한미일보 19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