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7형’ 시험발사를 단행한 다음 날인 2022년 3월25일, 김정은(가운데)이 휘하를 거느리고 걸어가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대한민국 대북 정책 기조의 일대 전환을 선언했다.
지난 정부의 완전 비핵화, CVID(한글 코믹 풀이: Complete: 시원하고 완벽한 제거, Verifiable: 브레인 검증 가능, Irreversible: 아예 재조립 불가역 방지, Disarmament: 디테일한 종결) 원칙을 사실상 폐기하고 선(先) 평화와 핵 없는 한반도 실현이라는 새로운 정책 프레임을 공식화했다.
정 장관은 남북 대화가 끊어진 지 7년이 된 상황에서 대화의 입구에 비핵화를 고수하면 판이 열리지 않는다며, 영변 원자로와 지하 우라늄 농축 시설의 원심분리기가 작동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핵과 미사일 고도화를 우선 중단시키고 단계적 군축을 거쳐 비핵화로 나아가는 3단계 접근법을 제안하는 한편, 국립북한인권센터 설립 중단과 통일 지향의 평화적 두 국가 구상을 주요 기조로 발표했다.
겉으로 정 장관의 제안은 동북아 정세의 냉혹한 현실을 해결하려는 방법의 하나를 제안한 것처럼 보이지만, 비핵화 외교사와 협상 구조, 그리고 헌법적 가치라는 다각도의 렌즈로 들여다보면 평화 허상으로 안보를 파괴하는 반역적 처사다.
무엇보다 CVID 원칙을 보수 진영의 단순한 유물로 치부하며 포기하려는 시도는 비핵화 외교 역사를 모르는 짓이다. 역사적 사실을 돌이켜보면 2002년 북한의 비밀 고농축 우라늄 계획이 발각되며 제2차 핵위기가 발생했을 당시, 한·미·일 공동선언을 통해 CVID를 대북 원칙으로 처음 확립한 주체는 김대중 정부였다.
노무현 정부 역시 2003년 한미정상회담에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북핵 폐기에 공식 동의했다. 과거 진보 정권들조차 북한의 플루토늄 재처리 중단만 믿었다가 뒤로 우라늄을 농축했던 이중성을 경험했기에 CVID를 한반도 안보의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삼아왔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외면한 채 CVID 원칙을 스스로 내려놓는 것은 평화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 아니라 검증 장치도 없이 북한의 핵 기득권을 추인(追認)해 주는 우를 범하게 된다.
또한 정 장관이 제시한 3단계 접근법은 공산주의 세력 특유의 ‘뒤통수 협상’ 전술에 휘말릴 위험성을 내포한다.
6·25전쟁 당시 미 극동해군 사령관이자 유엔군 측 초동 정전협상 수석대표를 지낸 찰스 터너 조이(Charles Turner Joy, 1895~1956) 제독은 자신의 저서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How Communists Negotiate)’에서 공산세력에게 협상이란 타협의 장이 아니라, 공격을 피하고 시간을 벌어 전력을 보강하는 수단임을 설파한 바 있다.
INF 조약 파기(2019), ABM 조약 탈퇴(2002), New START 중단(2023) 등 강대국 간의 핵군축 협정조차 수시로 무력화되는 판국에, 수시로 말을 바꾸는 북한을 상대로 비핵화라는 명확한 최종 출구와 철저한 현장 사찰이 담보되지 않은 선(先) 중단 협상은 북한에게 제재 완화라는 반대급부만 제공한 채 핵전력을 고도화할 시간만 벌어주는 결과로 귀결되기 쉽다.
정 장관이 올 11월 미·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미·북 대화 재개를 기대하는 것 역시, 뜬구름이다. 우리가 비핵화 목표를 후퇴시킨다면 5000만 국민의 안보를 북한의 불확실한 선의에 종속시키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이번 정 장관의 기조 전환에서 더욱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한 지점은 국가 정통성과 헌법 가치와의 정합성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명시하여 북한 지역과 북한 주민이 우리의 영토이자 국민임을 선언하고 있으며, 제4조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국가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반면 북한 김정은 정권은 이미 민족과 통일 개념을 파기하고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재규정하고 비무장 지대에 장벽과 전술 도로를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평화적 두 국가를 공식 표방하는 것은, 자칫 북한의 분단 고착화 전략에 논리적 명분을 제공하고 한반도 자유 통일이라는 국가적 지향점을 스스로 약화시킬 위험이 크다.
아울러 국립북한인권센터 사업 중단 등 북한 인권 문제를 대화 재개의 걸림돌로 취급하는 접근 역시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외교적 거래 수단으로 상정함으로써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지녀온 도덕적 리더십을 훼손할 수 있다.
막힌 대화를 재개하기 위해 정책적 유연성을 모색하는 것은 정부의 당연한 책무다. 그러나 유연함은 확실한 안보 억제력과 원칙 안에 있을 때 비로소 효과를 발휘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세 가지 실행 과제를 명확히 추진해야 한다.
첫째, 8월에서 11월 사이 미·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미·북 대화가 재개되어 단계적 접근법이 추진되더라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현장 사찰과 원심분리기 동결에 대한 실질적 검증 절차가 동시 이행 조건으로 담보되어야 한다. 검증 없는 동결 협상은 결국 과거의 실패한 유화책을 되풀이할 뿐이다.
둘째, 대화 타진과 별개로 한미 핵협의그룹(NCG)을 통한 전략자산 운용과 우리 군의 고성능 재래식 전력 연계 체계는 흔들림 없이 가동되어야 한다. 억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대화 유인책은 상대의 전략적 오판을 부를 뿐이다.
셋째,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과 헌법이 부여한 자유 통일의 당위성은 남북 대화 재개라는 단기적 성과를 위해 후순위로 밀려나서는 안 된다. 원칙 있는 가치 외교를 복원하여 상호 존중의 틀 안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평화는 단순히 군사적 충돌이 없는 정적 상태가 아니다. 위협의 근원을 완전 해소하는 과정에서 완성된다. 비핵화라는 명확한 좌표를 잃은 평화론은 결국 일시적인 안도감을 줄 뿐 한반도의 근본적 안보 불안을 해결하지 못한다.
정 장관은 북한 비핵화는 대한민국 생존과 직결되는 안보 문제이기에 감상적 차원의 독선적 주장을 멈추고, 보안 누설로 북한 정보 제공이 끊어진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안보라인은 북한은 대한민국의 일부라는 헌법적 기반 위에서 접근하는 일관성이야말로 진정한 한반도 평화를 이끄는 동력임을 각성하길 바란다.

◆ 박필규 위원
한미일보 편집위원
육군사관학교 40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