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D.C.의 백악관에 도착한 이재명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목차]
① NSS로 읽는 트럼프-바이든-트럼프의 연속성
② 트럼프 2기 안보전략이 보내는 정책 신호들
③ 위기 관리형 억제 전략의 종착역은 어딘가
④ 한반도에 적용되면 무엇이 달라지나
거래가 끝난 뒤 남는 것, 그리고 선택이 강요되는 순간
트럼프 2기의 전략은 ‘동맹국들에 대한 비용 청구’, 즉 ‘수금’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전략 방향 전환, 제도화, 동맹국에 대한 비용 전가까지 마친 미국의 안보 전략은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미국은 새로운 목표를 세우기보다 기존 관계를 정리하고 핵심 파트너를 가려내는 일에 집중한다. 더 이상 모든 동맹을 같은 비중으로 관리하지 않으며, 비용 지불에 따른 역할과 책임을 기준으로 동맹을 다시 분류하는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동맹국에 대한 비용 전가 이후 미국 전략의 본질은 세력 확장이 아니다. 전선을 넓히거나 개입을 늘리는 대신, 이미 구축된 전략 틀을 슬림화하고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향이다.
이는 패권의 포기가 아니라 유지 비용을 낮춰 실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미국은 주도권을 놓지 않되, 불투명한 안보 약속 대신 확실한 ‘거래 조건’을 내건다. 각국이 분담할 역할과 책임을 수치로 철저히 계산하여 국제 질서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 단계 1. 동맹의 ‘등급화’
‘수금 전략’ 이후 가장 먼저 나타나는 변화는 동맹의 서열화다. 동맹이라는 하나의 묶음이 깨지고 핵심 파트너, 특정 기능 조력자, 일시적 협력 파트너로 나뉘게 된다.
등급을 나누는 기준은 민주주의 가치나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가시적인 기여도와 실질적 대응 능력이다. 이 과정에서 어떤 동맹은 전략을 공유하는 핵심 멤버가 되고, 어떤 동맹은 특정 역할만 수행하는 하청 파트너로 밀려난다. 미국이 제공하는 보호의 수준은 이 등급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 단계 2. 자동 참전에서 위기 관리로
두 번째 특징은 억제 방식의 변화다. 위기 시 자동으로 참전하던 과거의 방식은 더 이상 기본값이 아니다. 이제 미국은 사태를 관리하는 수준의 억제에 집중한다. 도발을 원천 봉쇄하기보다 위기가 확산되지 않도록 통제하고 비용을 줄이는 데 주력한다.
미국의 개입 여부는 사건의 성격, 동맹의 기여도, 미국의 이익에 따라 나중에 조건부로 결정된다. 동맹국은 미국의 보호를 믿고 기대하기보다 발생한 위험을 스스로 먼저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 단계 3. 경제·기술·공급망 통합이 핵심
미국이 실리 위주로 전략을 재편하면서 안보의 범위는 전방위로 넓어진다. 이제 군사와 외교뿐만 아니라 경제와 기술, 공급망 자체가 곧 안보다. 관세와 수출 규제, 기술 표준 등은 더 이상 보조적인 수단이 아니다.
이는 동맹국들을 미국의 전략에 맞춰 줄 세우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된다. 앞으로 동맹인지 적인지를 판가름하는 잣대는 전통적인 군사 협력이 아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기술과 공급망 체계에 얼마나 깊이 발을 담그느냐가 생존의 기준이 된다.
△ 단계 4. ‘미국 설계, 지역 실행’
미국은 전체적인 판을 짜는 데 집중하고, 실행에 따르는 부담은 각 지역 동맹국에 떠넘긴다. 인도·태평양에서는 일본의 역할이 커지고, 유럽에서는 주요 국가들이 자기 지역을 책임지도록 못 박는다.
미국은 뒤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으면서 초기 비용과 위험은 각 지역국가들이 감수하게 만드는 구조를 굳힌다. 이는 개입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먼저 나설지의 순서를 뒤집는 방식, 즉 미국의 개입을 ‘마지막 순번’으로 돌리는 방식이다.
△ 단계 5. 모호성의 선택적 유지
흥미로운 점은 전략적 모호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만 이 모호성은 동맹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선택권을 지키기 위해 활용된다.
동맹이 맡을 역할과 치러야 할 비용은 갈수록 분명해지지만, 미국이 언제 어떻게 개입할지는 끝까지 안갯속에 둔다. 이는 협상의 여지를 두려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할 권리를 미국이 독점하겠다는 것이다.
△ 한국에 던지는 질문
이 단계는 동맹의 해체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동맹을 실용적으로 뜯어고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 변화는 되돌리기 어렵다.
한번 서열이 매겨지고 역할이 굳어지면, 유사시 미국이 제공할 보호의 수준도 그 틀 안에서 정해지기 때문이다. 전략의 방향을 따질 시기는 이미 지났다. 이제 남은 것은 미국이 짠 판의 어디쯤에 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앞으로 한국이 마주할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단순히 미국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등급에 배치될 것인가의 문제다. 핵심 파트너로 남을지, 특정 업무의 조력자가 될지, 아니면 단순 관리 대상으로 분류될지가 갈수록 분명해질 것이다. 이 등급은 그간의 선택들이 누적되어 나타나는 냉혹한 성적표가 될 것이다.
미국의 안보 전략은 거창한 새 선언과 함께 시작되지 않는다.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누구를 핵심 파트너로 삼고 누구를 배제할지를 가려내는 선별 작업이 진행될 것이다.
이 과정이 위험한 까닭은 갑작스러운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변화가 일상처럼 서서히 진행되어, 뒤늦게서야 돌이킬 수 없는 비용을 치르게 된다는 것이 진짜 문제다.
미국의 다음 전략 단계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남은 관건은 그 변화의 실체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우리 눈앞에 완전히 드러날 것인가이다.
이러한 전망이 그대로 현실화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전략적 대응에선 언제나 일이 벌어진 사후 해석보다 미리 내다보는 사전 분석이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미국이 동맹에 비용을 청구하고 실리를 우선하는 ‘수금’ 단계의 상황에서, 그들의 안보 전략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 읽어내는 일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한 대응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미국 국가안보전략 보고서 원문 링크>
트럼프 1기 NSS (2017, PDF)
https://trumpwhitehouse.archives.gov/wp-content/uploads/2017/12/NSS-Final-12-18-2017-0905.pdf?utm_source=chatgpt.com
바이든 행정부 NSS (2022, PDF)
https://bidenwhitehouse.archives.gov/wp-content/uploads/2022/10/Biden-Harris-Administrations-National-Security-Strategy-10.2022.pdf
트럼프 2기 NSS (2025, PDF)
https://www.whitehouse.gov/wp-content/uploads/2025/12/2025-National-Security-Strategy.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