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혁명당에 가담했던 신영복(왼쪽)과 ‘JMS’ 교주 정명석.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은 1960년대를 떠들썩하게 한 최대 규모의 간첩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총 158명이 검거되고 50명이 구속됐으며 이 가운데 주범 격인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사형에 처해졌다. 우리가 잘 아는 ‘처음처럼’의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0년 복역 후 전향서를 쓰고 석방됐다.
이상향을 꿈꾸는 사람들
신영복(1941~2916)은 경남 의령 태생으로 열 살 무렵 6·25전쟁을 겪었다. 1959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한 뒤에는 4·19와 5·16을 겪으며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1964년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교관으로 재직하던 중 통일혁명당 창당에 가담하게 된다.
통혁당은 “민중민주주의혁명을 통해 부패한 반봉건적 사회제도를 일소하고 민주주의제도 수립, 민족 재통일 성취하자”를 당 강령으로 내걸었던 명백한 이적단체다. 그들의 최종 목표는 공산주의 건설이다.
공산주의의 철학적 기반인 변증법적 유물론은 물질만이 유일한 실재라고 주장한다. 신이나 영혼 같은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인간의 정신적 활동마저 경제 구조의 산물로 본다.
놀라운 것은 종교의 공통 덕목인 이상향(Utopia)의 존재가 종교를 배척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상향은 사유재산과 계급, 국가가 소멸하고 자본주의의 모순인 착취와 불평등이 완전히 해결된 최종 단계의 사회다.
기독교의 이상향이 사후에 예비된 ‘천국’이라면, 공산주의자의 이상향은 살아서 누리는 ‘지상천국’인 셈이다.
그들의 표적이 된 명문대생
그런데 이 땅에는 통혁당 말고도 지상천국 건설이 최종 목적인 단체가 또 있다.
기독교복음선교회(JMS) 같은 사이비 종교 단체가 바로 그들이다. JMS는 천국은 사후에만 가는 곳이 아니라, 이 땅에 ‘새 하늘과 새 땅’을 건설함으로 실현되는 지상천국이라고 주장한다.
JMS의 교주 정명석은 ‘메시아’ ‘재림예수’를 자처하며 신도들을 금전적으로, 성적으로 착취했다. 누가 이런 허접한 논리에 속을까 싶지만 놀랍게도 이 단체를 이끄는 이들은 명문대생으로 대표되는 사회 엘리트층이었다.
JMS는 키가 크고 외모가 뛰어난 젊은 여성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재학생 등 명문대생을 주요 타겟으로 삼아 댄스나 미술 수업, 봉사 활동을 빙자해 그들에게 접근했다.
JMS는 대상자의 고민을 들어주는 등 친밀감을 형성한 후 정명석을 ‘메시아’ 또는 ‘선생님’으로 세뇌시켰다.
JMS는 신도를 유입할 때 ‘포섭–보고–지시–실행’이라는 단계적 전략을 사용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통혁당도 이 방법을 따랐다는 것이다.
통혁당은 조직원 포섭 단계에서 ‘선(先) 진보적 인텔리, 후(後) 기층인자’라는 원칙에 따라 대학가 지식인, 언론인 등 엘리트층에 접근했다. 특히 서울대생이 주요 타겟이었는데 학내 운동 조직에 침투해 이들을 지하당 당원으로 영입하는 데 주력했다.
보고하면 지시하고, 지시하면 실행한다
두 번째 절차인 ‘보고 단계’에서 JMS의 2인자 정조은은 포섭된 신도들의 명단, 사진, 키, 성격 등을 정리하여 정명석에게 보고한 뒤 미모와 기타 조건을 갖춘 여성들을 ‘스타’라는 조직으로 구성하여 관리했다.
통혁당 역시 주범인 김종태 등은 남한 내 조직 활동 상황과 군 정보, 시위 상황 등을 정리해 북한에 보고했다.
세 번째 지시 단계에서 JMS의 정명석은 간부들에게 특정 신도를 충남 금산군 월명동 수련원이나 해외 본거지로 부르도록 지시했다.
마찬가지로 북한 수뇌부도 남한의 지하당인 통혁당에 무장 폭동과 인민봉기를 목적으로 한 지하당 건설, 군부 내 침투 공작 등을 지시했다.
네 번째인 실행 단계에서 JMS의 간부들은 정명석이 특정 신도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뒤 신도에게 행동 지침을 전달했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은폐하고, 구성원을 회유하여 이탈을 방지했다.
이적단체인 통혁당도 ‘청맥’이라는 합법적인 잡지를 통해 사회과학·문학·시사 담론으로 손쉽게 대중에 접근한 뒤 지하신문인 ‘혁명전선’을 통해 조직의 정체성과 노선, 행동강령을 유포했다.
또 학원가에 침투해 학내 동향을 파악하고 민족해방전선’ ‘조국해방전선’ 등을 조직해 지하당 조직을 체계적으로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김종태는 북한으로부터 6만6000달러(당시 환율로 약 1815만 원)의 공작금을 받아 조직 운영비로 사용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종교 집단인 정명석과 정치 집단인 통혁당이 공통적으로 엘리트층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는 점이다.
엘리트층 통해 사회적 영향력과 정통성 확보
그들이 엘리트층에 주목한 이유는 간단하다.
엘리트를 안고 가야 사회적 영향력과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엘리트들이 이들 단체에 지지를 표명하면, 해당 단체는 ‘사이비’나 ‘불순한 조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벗고 사회적으로 건전하고 주류적인 집단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또 명문대생이나 외모가 출중한 젊은이들을 포섭하면 더 넓은 사회적 인맥과 정보에 대한 접근이 쉬워지며, 이들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법적 문제라든가 홍보, 대외 활동에서 조직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성으로 무장한 엘리트들이 이런 허접한 포섭에 쉽게 휘말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성적인 고학력 엘리트들은 아이러니하지만 바로 많이 배웠다는 사실 때문에 함정에 잘 빠진다는 게 사회학자들의 설명이다.
“나는 똑똑해서 사기당하지 않아”라는 확신은 자신이 믿고 싶거나, 자신의 논리 체계에 맞는 정보만 수용하게 만든다. 그래서 일단 사이비 교리나 불온한 사상에 호기심을 느끼면, 그것들이 논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증거들만 찾게 된다.
또 엘리트들은 사회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내면에는 공허가 자리잡고 있다. 물론 공허감은 인간 공통의 정서다. 그것을 모른다는 게 ‘이성의 한계’지만 말이다
‘따뜻한 공동체’ ‘이상적인 사회 전설’ 같은 달콤한 말들은 마른 솜에 물 스며들듯 공허한 마음을 온기로 채워주게 된다.
사기꾼들이 종종 승리하는 것은 사람의 ‘단단한 머리’가 아닌 ‘말랑한 가슴’을 공략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가슴과 머리의 언어를 구분하지 못한다. 자신의 이성을 지나치게 신봉하는 자일수록 더 그렇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주 당연해 보이는 일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요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