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그의 이름은 콜 토마스 앨런(Cole Tomas Allen)이라 했다. 나이가 불과 31세. 미국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총격 사건이 자주 발생하지만,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르기에 너무 젊다. 사람의 삶이 길지 않다 해도 감옥에서 보내기엔 또 너무 길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그가 반기독교적이라 했지만 일 저지르기 십 분 전에 가족들에게 보냈다는 선언서(manifesto)는 자신의 행위가 기독교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한다.
그는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 대라”는 구절은 타인이 억압받는 상황에서는 통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런 상황이라면 억압하는 자를 살해해서라도 억압의 사슬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매번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는 말을 하기 불편하지만, 나의 짧은 이해로도 그의 견해는 궤변스럽다. 사랑의 사상과 증오의 사상이 구별되는 것은 그가 바로 그가 지적한 상황에서일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만큼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없어 보인다. 한국문학은 이 말의 함축에 대한 긴 해석의 역사를 갖고 있다. 예수의 시대에는, 제롯(열심당) 사람들이 있어, 저마다 로마 병사 하나를 죽이고 저도 죽기를 각오한다면 유대인은 해방될 수 있으리라 했다. 이 문제는 일제 강점기의 한국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이효석의 희곡 ‘역사’(문장, 1939.12)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취급한 최초의 작품이었다. 김동리의 장편소설 ‘사반의 십자가’(현대문학, 1955.11~57.4)는 이 해방 이후의 새로운 현실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 한 것이었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민음사, 1979)의 주인공 아하스 페르츠는 허무나 증오를 인간적인 것으로 인준하고자 했고, 때문에 예수와 극단적인 대립 관계에 섰다.
투쟁이냐, 사랑이냐 할 때, 우리 ‘사람의 아들’들은 투쟁의 사상에서 자유롭지 않다. 콜 앨런이라는 청년을 미국 대통령은 ‘아픈 사람’이라 했고, “지금 우리는 미친 세상에 살고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 극한적 투쟁의 세계에서 투쟁이 아닌 사랑에서 길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사랑을 말하는 이들도 잘못된 세상, 거꾸로 선 정의, 부정선거, 사태를 호도하는 전체주의 개헌에 대한 싸움을 말하고 있으므로, 도대체 사랑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도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을 대립하는 것들의 투쟁으로나 설명하는 증오의 '사상가'들은 사랑을 위해 투쟁하라고 하기에 어떤 주저함도 없다.
그래서, 미국의 암살 미수범은 심히 정신이 아픈 사람임에 틀림없건만, 한쪽에는 반드시 그를 칭송하고 그의 ‘미수’를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 미국인 친구는 확실히 많이 아프기는 한 것이, 미국 행정부의 고위 관료들을 고위직 순으로 제거 대상으로 삼겠다고 했고, 문맥에 따르면 그들이 이 글에서 담기 어려운 범죄자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25일(현지시간) 백악관 출입기자단 연례 만찬장(WHCA)에서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을 저격하려 했던 콜 토마스 앨런. [사진=트루스소셜·AP]
정말 그러할까? 그가 말하는 끔찍한 범죄라는 것은 제프리 엡스타인(Jeffrey Epstein)이라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불확실한, 어떤 범죄자에 관련된 일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그와 시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그 범죄를 자행한 이들은 지금의 행정부와 전혀 관련이 없고, 클린턴이니 오바마니 바이든이니 하는 정반대 정파의 인사들이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사실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사실, 진실이 어둠에 가려진 시대다. 어떤 사실, 진실도 정치적인 문제가 되는 이상 자명한 것은 없다. 어떤 암살 미수 사건이 자작극이냐 실제 사건이냐 하는 것은, 그것이 사실임에 틀림없다고 확신에 차 있는 사람이 자신만만해하는 것과 달리 그리 자명하지 않다.
반드시 그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할 만한 꼬투리들이 있다. 꼬투리에 불과한 것처럼 생각되던 것이 알고 보면 그것이야말로 진실에 다가서는 핵심적 열쇠였던 것으로 드러날 수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가짜뉴스의 시대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했는데 보시다시피 어둠이 빛을 이기고 있지 않던가.
현재 시점, 정녕 어둠이 빛을 이기고 있는데도, 어둠에 길들여진 이들은 빛이 어둠을 이기고 있는 줄 안다. 이 얼마나 黑白顚倒(흑백전도)·以僞亂眞(이위난진)의 시대런가.
어둠에 취한 이들이 자신만만해들 한다. 트럼프는 미친 인간이고 이스라엘은 잔인한 자들이고, 또 어느 누구는 내란범이라 한다. 미국이 이란을 공격한 것은 약육강식 논리의 극단이라 한다. 내정간섭에 자주권 유린이라 한다. 자기는 먼 옛날부터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한다.
후후, 글쎄다. 이제 마르크스가 위험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나 보다, 생각한다. 세상의 위험에서 잔뜩 물러서서 눈치나 보다가 상이 차려지면 턱 앞발을 들어 올리는 실력! 참으로 훌륭한 知飾人(지식인)이다. 知殖人이다. 知蝕人이다. 知息人이다.
낡아빠진 전체주의 마르크시즘에 너무 서서히 중독되어 남들 깨어날 때 어둠에 젖어 있는 줄 모르고 그것이 옳은 줄 아는 지식의 지진아들은 공감의 능력도 엉뚱하기도 하다.
자국 국민들을 수만 명씩 학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라도 드리는 모양이다. 인민의 자유와 생존권을 맷돌로 갈아 매일의 양식으로 삼는 이들과 세계 평화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그 지극정성은 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
어둠으로 가는 것이 빛이 되는 이들이여. 증오를 일삼는 것이 사랑이 되는 이들이여. 전체주의로 가는 것이 민주주의가 되는 기적을 부리는 이들이여.
나는 다가오는 지방선거라는 것이 진짜 선거라고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네. 개헌에 어떤 미사여구를 붙이고 살라미 치즈를 아무리 얇게 썰어 내놓아도 넘어가지 않을 작정이라네. 나는 극악한 범죄자들이 내 손을 자신들의 죄로 더럽히려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을 작정이라네. 이것이 나의 비상하기 짝이 없는, 이 시대에 대한 공감능력이라네.
그래도 나는 그대들을 절대로 증오하지 않을 작정이라네. 어둠 세상을 살아가는 이 나라 모든 불행한 이들과 똑같이, 나는 그대들을 반드시 사랑하네. 우리는 모두 이 덧없는 세상에 와 있다네. 이 아름다운 삶을 언젠가는 두고 떠나야 한다네.

◆ 방민호 교수
문학박사, 서울대 국문과 교수. 계간문학잡지 ‘맥’ 편집주간(2022년~)이자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저서로 ‘연인 심청’(2015), ‘통증의 언어’(2019), ‘한국비평에 다시 묻는다’(2021), 서울문학기행(202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