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 [사진=로이터 연합뉴스]
“트럼프 방중 앞두고 동아시아 환율 질서 흔들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의 동아시아 순방은 겉으로는 미일 경제 협의와 미중 정상회담 사전 조율 일정이다.
그러나 흐름을 따라가면 핵심은 환율이다. 도쿄에서는 엔화, 서울에서는 원화와 위안화, 베이징에서는 미중 통화·무역 균형이 순차적으로 걸린다.
베선트 장관은 11일부터 일본과 한국을 차례로 방문한 뒤 베이징에서 열리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 일정에 합류한다.
그는 13일 서울에서 허리펑 중국 국무원 부총리를 만난 뒤 중국으로 향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도 베선트 장관이 13일께 서울을 찾아 한국 고위 당국자들과 외환시장 및 경제·금융 현안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번 순방을 단순한 경유 일정으로 보면 의미를 놓치게 된다.
도쿄는 미일 무역·환율 현안의 조율장이고, 서울은 미중 정상회담 직전 경제라인의 사전 협상장이다. 베이징은 이 사전 조율을 바탕으로 정상 간 담판이 벌어지는 최종 무대다.
즉 동선은 일본·한국·중국 방문이지만, 구조는 엔화·원화·위안화 문제를 차례로 정리하는 환율 동선에 가깝다.
도쿄 일정의 성격은 비교적 분명하다.
로이터는 베선트 장관이 일본 총리, 재무상, 일본은행 총재 등을 만날 예정이며, 투기적 엔화 매도 억제, 희토류와 에너지 조달 같은 경제안보 문제, 이란 전쟁 문제 등이 논의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은 엔화 약세로 수입 물가와 가계 부담이 커진 상태이고, 미국과 일본은 지난달 환율 정책 소통을 강화하기로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희토류나 에너지보다 엔화다. 희토류는 공급망 문제이고, 에너지는 수입 비용 문제다. 그러나 두 문제 모두 마지막에는 환율로 연결된다.
엔화가 약해지면 에너지 수입 비용이 커지고, 물가 부담은 다시 정치 부담으로 돌아온다. 일본이 환율시장 개입 명분을 확보하려면 미국 재무부의 묵시적 이해가 필요하다.
베선트 장관의 도쿄 방문은 일본의 엔저 방어 전략에 미국이 어느 정도 선을 그어줄지 확인하는 자리로 볼 수 있다.
서울 일정은 더 미묘하다.
베선트 장관은 한국에 오지만, 핵심 장면은 한국 정부와의 양자 회담보다 허리펑 중국 국무원 부총리와의 회동이다.
그렇다고 한국이 배경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 원화는 최근 엔화와 함께 약세 압력을 받아 왔다.
지난 3월 한일 재무장관은 원화와 엔화의 급격한 절하에 우려를 표명하며 과도한 외환시장 변동성에 대응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당시 로이터는 이란 전쟁에 따른 안전자산 달러 수요와 에너지 수입 부담이 원화·엔화 약세를 키웠다고 분석했다.
한미 간에도 원화 문제는 이미 테이블에 올라와 있다.
지난달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과 베선트 장관은 워싱턴에서 만나 원화의 과도한 변동성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고, 외환시장 협의를 계속하기로 했다.
따라서 베선트 장관이 서울에 들르는 것은 단순한 지리적 경유가 아니라, 원화 안정과 미중 통화 협상을 연결하는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허리펑 부총리와의 회동 의제도 환율을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공개 의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방중과 미중 정상회담 사전 조율이다.
실제로 베선트 장관과 허 부총리는 지난달 말 화상 통화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의 중국 방문과 양국 경제·무역 현안을 논의했다.
베선트 장관은 당시 중국의 역외 규제가 글로벌 공급망에 냉각 효과를 준다고 지적했고, 중국은 미국의 대중 무역 제한 조치에 우려를 표시했다.
그러나 무역 갈등의 밑바닥에는 위안화 문제가 있다.
미국이 중국에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관세를 낮추거나 미국산 농산물을 더 사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중국이 수출 경쟁력을 환율과 보조금, 산업정책으로 떠받치고 있는지, 위안화 가치가 시장 흐름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지, 자본 이동과 외환시장 운용이 얼마나 투명한지가 모두 연결돼 있다.
미 재무부는 올해 1월 환율보고서에서 주요 교역상대국 가운데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한 국가는 없다고 밝혔다.
다만 외환 개입과 비시장적 정책을 통한 통화가치 조작 여부를 면밀히 보겠다고 강조했고, 일본·한국·대만 등과 환율 관련 공동성명을 통해 투명한 환율 정책과 긴밀한 협의를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베선트 장관의 순방이 돌발 일정이 아니라, 이미 진행돼 온 미국의 환율 감시·협의 체계 위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자본시장 개방도 이 틀 안에서 봐야 한다.
중국 자본시장 개방은 별도 금융 의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안화의 국제화와 외국 자금 유입, 자본 통제, 환율 방어 능력과 맞물린다.
중국이 시장을 더 열면 위안화 수요가 커질 수 있지만, 동시에 자금 이탈 리스크도 커진다. 미국은 중국 금융시장 접근성과 투명성을 요구할 수 있고, 중국은 미국의 대중 투자 제한 완화를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본질은 ‘돈의 출입구를 누가, 어떤 조건으로 통제할 것인가’라는 환율·자본 흐름 문제다.
이란 문제도 환율과 무관하지 않다.
베선트 장관은 최근 중국이 이란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구매하고 있다며, 중국이 호르무즈 해협 문제 해결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압박했다. 미국은 이 문제가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정상회담 의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호르무즈 리스크는 유가를 흔들고, 유가 상승은 에너지 수입국인 일본과 한국의 통화 약세 압력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란·에너지 문제도 별도 외교 현안이 아니라 동아시아 환율 안정의 배경 변수다.
결국 이번 순방의 구조는 명확하다.
도쿄에서는 엔화 약세와 미일 경제 현안을 정리한다. 서울에서는 원화 문제를 가진 한국을 지나면서 중국 경제라인과 위안화·무역·자본 흐름을 맞춘다.
베이징에서는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이 모든 쟁점을 정상 차원에서 다룬다.
관세는 눈에 보이는 무역전쟁의 도구다. 그러나 환율은 그 밑에서 가격 질서를 다시 짜는 보이지 않는 협상이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관세 인하가 아니라, 달러를 중심으로 한 통화 질서 안에서 일본·한국·중국의 환율 움직임을 관리가 가능한 범위로 묶어두는 것이다.
베선트 장관의 동아시아 순방을 “미일 무역 협의와 미중 정상회담 준비”로만 읽으면 절반만 본 것이다.
이번 일정의 진짜 가격표는 환율이다. 도쿄의 엔화, 서울의 원화와 위안화, 베이징의 미중 통화 균형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돼 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다. 무역이 겉의 의제라면, 환율은 이번 베선트 순방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