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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山의 시사읽기] 호치민과 여운형, 그리고 상하이 혁명 네트워크
  • 松山 작가
  • 등록 2026-05-25 19: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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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낭만의 상하이, 실체는 코민테른의 ‘혁명 항구’
  • 반일(反日)은 민주주의의 보증수표일 수 없어

1890년생인 호치민(Hồ Chí Minh, 왼쪽)과 1886년생 여운형.

호치민(Hồ Chí Minh). 본명 응우옌신꿍(Nguyễn Sinh Cung). 1890년 5월19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응에안에서 태어나 1969년 9월2일 하노이에서 사망했다. 오늘날 그는 베트남 독립의 상징처럼 기억된다.

 

여운형(呂運亨). 1886년 5월25일 경기도 양평 출생.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되었다. 그는 해방 직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호치민은 공산 혁명가, 여운형은 순진한 민족주의자

 

오늘날 한국 사회는 두 사람을 자주 “민족 지도자” “독립운동가” “반제국주의 인물”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역사 연구는 감상이나 도덕적 이미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엇에 저항했는가만이 아니라, 무엇을 세우려 했는가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호치민과 여운형은 다시 읽혀야 한다.

 

여기서 핵심 공간은 상하이다. 핵심 공간은 상하이다. 많은 한국인은 상하이를 낭만적으로 기억한다. 임시정부가 있었고, 망명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던 도시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실제 1920~30년대 상하이는 훨씬 복잡하고 위험한 정치 공간이었다.

 

1920년대 상하이 모습.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중국 상하이에는 열강의 공동 통치 구역인 국제 조계지(International Settlement)가 설치됐다. 

그곳에는 단순한 민족주의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코민테른 조직, 중국 공산세력, 국제 혁명가, 소련 혁명 네트워크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코민테른은 식민지 민족운동을 세계혁명의 일부로 활용하려 했고, 상하이는 그 연결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즉 상하이는 단순 망명지가 아니라 혁명의 항구였다. 호치민은 바로 그 국제 혁명 네트워크 속에서 성장한 인물이었다. 그는 1920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고, 이후 모스크바와 광저우를 오가며 코민테른 활동가로 움직였다. 관련 연구와 국제 자료들은 그가 레닌주의 혁명 전략의 강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단순한 “베트남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 공산주의 혁명가였다. 호치민에게 독립은 최종 목적이면서 동시에 혁명 권력을 세우는 통로이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 식민 지배를 거부했지만, 그 이후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세우려 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구축한 국가는 공산당 일당 체제였다.

 

1924년 말 광저우에 도착한 호치민은 코민테른 조직과 함께 활동하며 1925년 베트남혁명청년회를 조직했다. 이것은 훗날 인도차이나 공산주의 운동의 핵심 기반이 된다.

 

바로 이 시기 조선 독립운동 세력 역시 상하이와 광저우 축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여운형 또한 그 공간 안에 있었다. 몽양기념관 자료와 여러 연구들은 여운형이 중국 혁명 인사들뿐 아니라 호치민과도 교류 관계를 가졌다고 설명한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선 여운형 

 

오늘날 일부 서술은 이를 “아시아 혁명가들의 국제 연대”처럼 미화한다. 그러나 실제 정치 현실은 훨씬 위험했다. 당시 상하이에는 반일 민족주의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국제 공산주의, 급진 혁명운동, 반제국주의 네트워크가 서로 결합하고 있었다. “민족 해방”이라는 말 뒤에는 종종 혁명 권력 구축이라는 목표가 함께 숨어 있었다.

 

문제는 여운형이 이런 공간과 지나치게 가까웠다는 점이다. 물론 여운형은 박헌영처럼 노골적인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해방 직전과 직후 좌익 혁명세력의 본질적 위험성을 끝내 선명하게 끊어내지 못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여운형을 흔히 “합리적 중도주의자” “통합의 정치가”처럼 기억한다. 그러나 당시의 좌우합작은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 내부의 온건한 협치 개념과는 전혀 달랐다.

 

그 시대 좌익은 소련 혁명 노선과 연결된 급진 정치세력이었다. 자유민주주의와 혁명 공산주의는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었다. 국가 체제 자체를 둘러싼 충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운형은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좌익과 우익을 함께 묶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고, 이후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흐름과 연결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은 자유선거와 헌법 절차를 통해 성립된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아니었다. 혁명적 정치조직 성격이 훨씬 강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항일”이라는 단어 앞에서 지나치게 많은 면죄부를 발급해 왔다. 일제에 저항했다는 이유만으로 민주주의자처럼 기억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반일과 자유주의는 같은 말이 아니다. 독립운동과 민주주의 역시 자동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20세기 역사는 이미 이를 증명했다. 러시아 혁명은 자유를 약속했지만 일당 독재로 갔다. 중국 혁명 역시 개인 자유보다 혁명 권력을 우선시했다. 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 호치민은 식민지배를 무너뜨렸지만, 그 이후 세운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공산당 중심 체제였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이런 문제를 충분히 비판하지 못했다. 특히 상하이 혁명 네트워크에 대한 낭만화는 위험하다. 당시 상하이는 단순 독립운동 공간이 아니었다. 국제 혁명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 뒤섞이며 급진 정치가 확산되던 공간이었다. 조선·중국·베트남 활동가들은 그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호치민은 그 흐름의 대표적 성공 사례였다. 여운형은 그 공간의 위험성을 충분히 경계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결국 역사는 감정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누가 일본에 반대했는가만 보는 것은 절반의 역사다. 그들이 어떤 국가를 만들려 했는가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 자유를 중심에 둔 국가를 꿈꾸었는가, 아니면 혁명 권력을 우선하는 체제를 지향했는가를 냉정하게 따져야 한다.

 

그 기준에서 보면 호치민은 더 이상 단순한 민족 영웅으로만 남을 수 없다. 그는 국제 공산주의 혁명가였다. 여운형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해방기의 혼란 속에서 민족 통합을 말했지만, 자유민주주의와 혁명 공산주의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지 못했다. 그 정치적 모호함은 결과적으로 혁명세력에 공간을 열어줄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낭만적 추억이 아니다. 냉정한 정치사 읽기다. 항일이면 모두 선이라는 유치한 역사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비로소 20세기 동아시아 혁명의 실체와, 그 속에서 움직였던 인물들의 정치적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있다.





◆ 松山(송산)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 松山은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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