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5일 경기도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둘러싼 언론 보도에서 가장 먼저 따져야 할 문제는 선관위의 지위다.
선관위는 이번 사태를 밖에서 설명하는 제3자가 아니다. 투표용지 인쇄·배분·보관·추가 송부 체계를 관리한 책임의 당사자다.
따라서 사건으로 비화될 경우 조사 또는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는 기관의 말을 언론이 사실의 출발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선관위는 설명자가 아니라 책임의 당사자
선관위 주장을 보도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선거관리기관이 어떤 입장을 내놓았는지는 국민에게 전달돼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책임 기관의 자기 진술이다. 독립 검증 전까지 선관위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 주장이다.
언론의 역할은 그 주장을 전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주장이 실제 기록과 맞는지 확인하는 데서 시작된다.
중앙선관위는 6·3 지방선거 본투표 당시 전국 67개 투표소에 투표용지를 추가 송부했고, 이 가운데 실제 추가 투표용지가 사용된 투표소는 50곳,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가 일시 중단됐다 재개된 투표소는 22곳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최근 선거에서 사전투표율이 높아지면서 본투표용 투표용지가 많이 남는 경향이 있었고, 회수·보관·폐기 부담을 고려해 감축 인쇄가 필요하다는 내부 의견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숫자와 원인 설명은 선관위의 1차 주장일 뿐이다.
실제 몇 장을 인쇄했는지, 어느 투표소에 몇 장을 배정했는지, 예비분은 어디에 보관됐는지, 추가 송부는 누가 어떤 절차로 지시했는지 확인되기 전까지 확정 사실로 볼 수 없다.
특히 선관위가 스스로 “현재까지 파악한 바”라고 전제한 수치라면, 언론은 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밝혔다’와 ‘주장했다’는 다르다
이 지점에서 올드미디어의 보도 태도가 문제로 떠오른다.
일부 보도는 선관위의 말을 “주장했다”가 아니라 “밝혔다”, “설명했다”, “전했다”, “확인됐다”는 술어로 처리했다. 공식기관 발표를 전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사안에서는 다르다. 선관위는 중립적 관찰자가 아니라 책임의 당사자다. 당사자의 자기 진술에 사실의 술어를 붙이면, 독자는 그것을 검증된 결과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선관위는 주장했다”와 “선관위는 밝혔다”는 같지 않다. 전자는 거리 두기다.
후자는 공식 사실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더구나 “확인됐다”는 표현은 언론이 독립적으로 사실관계를 검증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선관위 자체 조사 결과를 근거로 한 보도라면, 그것은 확인이 아니라 선관위의 자체 파악이다. 기사 문장의 술어 하나가 사건의 성격을 바꿔버릴 수 있는 것이다.
MBC는 중앙선관위의 1차 자체 조사 결과를 전하며 “전국 50곳의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것으로 확인됐다”는 흐름으로 보도했다.
이 표현은 독자에게 선관위 발표가 곧 확인된 사실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근거가 선관위 자체 조사이기 때문에, 이는 독립 검증의 결과가 아니라 선관위가 스스로 파악했다고 밝힌 내용으로 처리해야 한다.
연합뉴스도 선관위 브리핑을 중심으로 추가 송부 투표소 67곳, 실제 부족 투표소 50곳, 투표 일시 중단 투표소 22곳이라는 수치를 전했다. 보도 자체는 공식 발표 전달이라는 점에서 필요하다.
하지만 선관위가 제시한 “사전투표율 증가”, “잔여 투표용지 부담”, “감축 인쇄 필요성”, “투표소별 편차”는 원인으로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선관위 주장으로 남겨둬야 한다.
원인은 발표가 아니라 기록으로 검증해야
이번 사태의 본질은 단순히 투표용지가 부족했다는 데 있지 않다. 투표용지는 국민이 선거권을 행사하기 위한 물리적 조건이다.
투표소에 도착한 유권자가 투표용지 부족으로 기다리거나 투표하지 못했다면, 이는 행정 착오를 넘어 참정권 침해 문제로 번질 수 있다.
이런 사안에서 책임 기관의 말을 사실처럼 전제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뒤, 고양이의 말을 그대로 장부에 적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언론이 먼저 물었어야 할 질문은 “선관위가 원인을 무엇이라고 설명했는가”가 아니었다. “선관위 주장은 어떤 기록으로 검증되는가”였어야 한다.
각 투표소별 선거인 수, 사전투표자 수, 본투표 예상치, 실제 배정량, 예비분 보관 장소, 추가 송부 시각, 이송 책임자, 수령 확인서, 참관인 입회 여부가 공개돼야 한다. 이 자료들이 대조되지 않는 한 “50% 인쇄 지침”, “투표소별 편차”, “사전투표율 증가”는 모두 원인이 아니라 선관위 주장일 뿐이다.
투표권은 전체 평균으로 보장되는 권리가 아니다. 유권자는 자신에게 지정된 투표소에서 정해진 시간 안에 투표할 수 있어야 한다.
필요한 것은 주장 정리가 아니라 주장 검증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이 사의를 표명하고, 선관위가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진상규명위원회를 꾸리겠다고 밝힌 것도 이 사태의 원인 규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원인 규명이 끝나지 않은 사안에서 언론이 책임 기관의 말을 사실의 틀로 삼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일이다.
이번 보도 흐름에서 언론은 선관위 주장을 전하는 데는 빨랐지만, 그 주장 앞에 붙여야 할 물음표에는 인색했다.
책임 기관의 발표를 보도하는 일과 그 발표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일은 전혀 다르다.
언론의 역할은 발표를 정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발표가 사실인지 확인하고, 빠진 기록을 요구하고, 모순되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 언론의 기본 기능이다.
선관위 주장은 보도 대상이다. 그러나 사실의 전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선관위 주장을 잘 정리한 기사가 아니라, 선관위 주장을 검증하는 기사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원인 규명은 선관위 발표문이 아니라 인쇄·배분·보관·이송·참관 기록을 공개하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