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지진 [AFP=연합뉴스]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동쪽 라과이라주(州) 방향으로 갈수록 지진 피해는 더 심각해졌다. 갈라진 도로 때문에 사람들의 이동은 어려웠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간신히 건진 얼마 안 되는 물건들을 챙겨 주(州)를 떠나려는 피난 행렬이 잇따랐다. 라과이라주로 가는 도로는 이미 통제된 상태였다.
라과이라주에 사는 아네트 파레데스 씨는 천으로 덮인 15세 손자의 시신 곁에 앉아 있었다. 그는 26일(현지시간) 현지 일간 엘나시오날에 "바르가스의 비극은 이번 지진의 4분의 1도 안된다. 이번이 훨씬 더 끔찍하다"며 "이 정도로 수많은 건물이 통째로 무너져 내린 적은 없었다. 사망자가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없다"고 했다.
베네수엘라 지진 [AFP=연합뉴스]
파레데스 씨가 언급한 '바르가스의 비극'은 1999년 바르가스주에서 발생한 대홍수를 가리킨다. 바르가스주는 라과이라주의 옛 이름이다. 니콜라스 마두로 정부 시절인 2019년 식민지 및 기득권 청산의 의미로 바르가스를 '라과이라'(바람의 계곡)로 개명했다. 베네수엘라 제1대 민간인 대통령인 바르가스가 스페인 제국주의와 기득권 체제를 상징한다는 이유에서였다.
1999년 바르가스주에선 일 년간 내릴 비의 양이 사흘간 쏟아지면서 5만명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사태 등이 발생하면서 해안가에 밀집했던 주거지와 인프라 상당수가 흙더미에 깔렸다. '바르가스의 비극'은 베네수엘라는 물론, 남미 전체로 볼 때도 20세기 최악의 자연재해로 기록된 대형 홍수다.
망치들고 구조작업 [AP=연합뉴스]
각종 외신 보도에 따르면 27년 만에 비슷한 규모의 대형 재난이 덮친 라과이라주는 지옥도를 방불케 한다. 베네수엘라 당국에 따르면 규모 7.0이 넘는 두 차례의 강진이 발생한 24일 이후 여진만 214차례나 지속됐다.
이 같은 위험 속에서도 라과이라 주민들과 가족들, 그리고 카라카스에서부터 달려온 자원봉사자들은 실종자가 매몰돼 있는 잔해를 옮기기 위해 맨손과 손에 잡히는 도구는 무엇이든 동원하고 있다. 현장의 분위기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절망적"이라고 엘 나시오날은 전했다.
장비 없이 맨손으로 구조에 나선 마리아 호세 안리치에 씨는 "개미들처럼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이 잔해들을 들어 올려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여기 라과이라 건물 인프라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저 몇 사람의 손으로는 이 모든 것을 들어 올릴 수 없다"고 덧붙였다.
베네수엘라 [AFP=연합뉴스]
디오스다도 카베요 내무부 장관은 이날 라과이라주에서 무너진 건물만 100채가 넘고, 피해를 본 주민도 7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했다. 피해가 이처럼 크지만, 구조 장비는 턱없이 부족하고, 군경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한 주민은 "군대도, 경찰도, 그 누구의 도움도 없다. 여기엔 아무도 오지 않는다. 가족이나 아이들이 무사한지 묻는 사람조차 없다"며 울분을 토했다.
"생명을 구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며 구조를 돕는 이들도 있지만, 이 틈을 노린 약탈행위도 보고되고 있다. 멕시코 일간 라호르나다 등에 따르면 상점과 무너진 가옥에서 약탈이 벌어지고 있다는 보고가 있으며, 이러한 약탈은 식료품점뿐 아니라 가전제품 매장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지부진한 구조작업과 치안 불안 속에서 델시 로드리게스 임시대통령은 군을 라과이라주에 투입하겠다고 이날 밝혔다. 이에 따라 군대를 포함한 치안요원 1만1천500명이 이날부터 순차적으로 라과이라주에 배치될 예정이다. 엘살바도르, 칠레, 스페인, 독일, 스위스, 멕시코의 구조요원과 의료진도 현지에 도착해 활동에 들어갈 준비에 본격 착수했다.
베네수엘라에 도착한 멕시코 구조대원 [AFP=연합뉴스]
로드리게스 임시대통령은 이날 사망자가 589명, 부상자가 2천980명으로 늘어났다고 밝혔으나 군과 해외구조팀의 도움으로 건물 잔해를 본격적으로 치우기 시작하면 사망자 수는 급격히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외부에서 라과이라주로의 진입은 현재 불가능한 상황이다. 수도와 라과이라주 해안가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는 폐쇄됐다. 구조 활동과 물자 수송 차량만 드나들 수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주요 관광지로서 한적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라과이라주는 완전히 황폐해졌다. 주거 단지, 휴가용 아파트, 호텔들은 먼지와 콘크리트 더미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