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에 등장하는 교룡기(交龍期). 왕을 상징하는 의장 깃발일뿐 국기는 아니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조선은 500년 가까이 존속한 왕조였다. 왕이 있었고 관료가 있었으며 군대와 세금도 있었다. 성균관에서는 유학을 가르쳤고 조정에서는 명분과 예법을 놓고 수없이 논쟁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조선이 근대 국제사회와 마주하면서 황당한 문제가 하나 나타났다. 조선을 대표하는 국기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조선에 깃발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왕을 상징하는 어기(御旗)가 있었고 군대에는 군기와 장군기가 있었다. 각종 국가 의례에서도 수많은 깃발을 사용했다. 그러나 외국인이 보고 “저 깃발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뜻한다”고 알아볼 수 있는 근대적 의미의 국기는 없었다. 왕의 깃발은 있었지만 나라의 깃발은 없었던 셈이다.
왜 그랬을까? 조선이 살아온 국제질서가 근대 유럽의 주권국가 체제와 달랐기 때문이다. 조선 외교의 중심에는 중국이 있었다. 명과 청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에서는 국기보다 국서와 인장, 사신과 의례가 중요했다. 따라서 국기가 없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조선을 미개국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문제는 19세기였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조선은 너무 늦게 움직였다.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패배한 것이 1842년이다. 페리의 미국 함대가 일본에 나타난 것은 1853년이었다. 동아시아의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시간은 충분했다. 세계는 증기선과 철도, 전신과 근대식 군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조선시대 왕 의장기인 홍문대기(왼쪽)와 왕세자 의장기인 기린기.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일본은 이 충격을 받고 서양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서양의 군함은 어떻게 만드는가? 국제법은 무엇인가? 관세는 어떻게 정하는가? 근대적인 군대와 학교는 어떻게 만드는가? 메이지 정부는 폐번치현, 징병제, 근대교육, 철도와 우편 등을 빠르게 도입했고 1870년에는 일장기의 사용과 규격도 제도화했다.
그때 조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조선의 지배층은 여전히 성리학적 명분과 의례, 척사와 개화, 정치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싸움에 많은 힘을 쏟고 있었다. 물론 조선 내부에도 세계의 변화를 읽으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개화파도 등장했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 전체의 신속한 개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세계를 이해하고 대응하는 국가 역량 자체가 부족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문이 열리면서 문제가 현실이 되었다. 이제 조선도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사절을 보내야 했다. 외국 선박이 들어오고 조선 사절이 외국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러자 아주 기초적인 질문이 등장했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표시할 국기는 무엇인가?
없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전후하여 국기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같은 해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과정에서 태극과 네 괘를 배치한 국기를 사용했다. 이듬해인 1883년 고종은 태극기 계통의 깃발을 조선의 국기로 공식화했다. 500년 왕조가 마지막 30년도 남겨놓지 않은 시기에 이르러서야 근대적인 국기를 갖춘 것이다.
영국국립문서보관서에서 발굴한 최초의 태극기 원형. 1882년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제작한 태극기 원형을 그대로 그린 것이다. [사진=연합뉴스]
나는 이 사실이 조선 후기의 처지를 꽤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국기 하나 없었다는 것을 가지고 조선의 모든 것을 평가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는 국기가 필요해진 새로운 세계가 이미 동아시아에 도착했는데도 조선이 그 세계에 적응하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는 데 있다.
왕의 깃발은 있는데 나라의 깃발은 없었다는 사실도 생각해 볼 만하다. 전통 왕조에서 국가의 중심은 오늘날과 같은 국민국가가 아니라 왕조와 군주였다. 조선은 그런 체제를 오랫동안 정교하게 운영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국가와 국가가 조약을 맺고 국경과 관세를 정하고 군함과 상선이 국기를 달고 돌아다니는 전혀 다른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조선은 뒤늦게 따라가기 시작했다. 신식 군대를 만들고 외국에 사절을 보냈다. 우편과 전신을 도입하고 근대적인 제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태극기도 그 과정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이미 일본과 서구 열강은 훨씬 앞서가고 있었다.
시간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1842년 아편전쟁의 충격부터 계산하면 수십 년이었다. 그동안 청나라에서는 양무운동이 시작됐고 일본에서는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국가가 들어섰다. 그런데 조선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국가 체질을 뜯어고치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태극기의 탄생을 민족적 자부심의 역사로만 볼 필요는 없다. 그 뒷면에는 불편한 조선의 모습도 숨어 있다.
왜 우리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국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는가? 왜 세계가 이미 산업과 군사력, 국제법과 외교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데 조선은 그 변화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는가? 왜 외부의 압력이 코앞에 닥친 뒤에야 서둘러 근대국가의 외형을 갖추기 시작했는가?
이 질문들이 더 중요하다. 국기도 없던 조선은 가난해서만 누추했던 나라가 아니다. 변해버린 세계를 너무 늦게 읽었기 때문에 누추했다. 나라 안에서는 500년 왕조의 권위와 전통을 자랑했지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새롭게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태극기는 바로 그 시대에 만들어졌다. 오늘날에는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자랑스러운 국기지만 그 탄생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다른 모습도 보인다. 세계가 조선의 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황급히 자기 나라의 깃발부터 마련해야 했던 조선 후기의 초라한 현실이다.
500년 왕조 조선에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나라를 대표하는 국기가 없었을까? 국기 하나의 역사가 조선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때로는 작은 물건 하나가 한 시대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 지점에서 조선 후기의 실패를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 松山(송산) 정광제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 ‘문학의 세계와 사상’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