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원정. [사진=궁능유적본부]
경복궁을 대표하는 근정전과 경회루를 지나 후원 너머로 발길을 옮기면 조선의 마지막 불꽃이 타올랐던 은밀한 공간이 나타난다. 고종의 독립 의지가 깃든 건청궁, 근대화의 꿈이 서린 서재 집옥재, 그리고 그들 사이에 피어난 연꽃 같은 정자 향원정이 그곳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이 세 공간은 경복궁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전각으로 조선 말기 열강의 각축전 속에서 나라를 보존하려 했던 고종의 긴박했던 시간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궁궐 속의 궁궐 ‘건청궁’
건천궁. [사진=궁능유적본부]
건천궁의 사랑채 장안당. [사진=궁능유적본부]
건천궁의 안채 곤녕합. [사진=궁능유적본부]
경복궁 중건이 일단락된 1873년,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親政)을 선포한다. 고종 독립의 상징이 된 공간이 궁궐의 가장 북쪽 끝에 자리한 건청궁이다.
사랑채인 장안당, 안채인 곤녕합으로 구성된 건청궁은 단청도 없이 소박한 외형이지만 고종은 이곳에서 원임·시임 대신들을 만나 국정을 논했고,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며 조선의 위상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1895년 곤녕합에서 명성황후가 일제의 칼날에 시해되는 '을미사변'의 비극이 벌어지면서 건청궁은 조선 왕조의 가장 아픈 기억을 간직한 공간이 되었다.
근대의 어둠을 밝힌 첫 불빛
건청궁은 고종이 조선이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던 실험실이기도 했다. 1887년, 조선 왕실의 발주로 미국의 에디슨전기회사(Edison Electric Light Company)가 발전기를 이용해 이곳에서 한국 최초의 전깃불을 밝혔다.
건청궁 앞에 설치된 최초의 전깃불. 한국전기박물관에 모형이 전시돼 있다. [사진=임요희 기자]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탄소 필라멘트 전구를 발명한 지 8년 만의 일로 중국의 자금성이나 일제 궁궐보다 약 2년이나 앞선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고종은 어떻게 전깃불의 존재를 알았을까. 비밀은 1883년 고종이 미국에 파견한 외교사절단 보빙사(報聘使)에 있다. 보빙사는 미국에서 농장 시설과 농기계 등을 견학한 후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을 시찰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눈으로 확인한 증기기관 및 전기 시설에 대해 보고를 올렸고 어명을 받들어 에디슨전등회사에 발전설비와 전등기기를 발주했다.
전등소는 지금으로 치면 화력발전소로 당시에는 석탄을 때서 발생한 증기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했다고 한다. 에디슨은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가 전등과 발전설비를 발주하자 매우 신기해하며 즉시 전등소 구축에 들어갔다.
에디슨은 특별히 공들여 일류로 지었는데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에도 전등소를 수출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전깃불은 장안당 북행각에 이어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 그리고 대청에도 설치되었다. 실내 전깃불 외에도 건청궁 앞뜰 그리고 담 밖에 가로등이 들어섰으며 연못 안의 향원정에도 전깃불이 들어왔다. 전등이 켜지던 날 이를 구경하기 위해 궐내 사람들이 전부 향원정 앞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멀어질수록 향기는 맑아지고 ‘향원정'
건청궁 남쪽, 향원지 연못 인공섬에는 향원정(香遠亭)이 있다. ‘향기는 멀수록 맑다'는 뜻의 이 이 정자는 왕실의 지극히 사적인 휴식 공간으로 북쪽의 취향교(醉香橋)로 연결된다.
‘향기에 취하는 다리'라는 뜻의 이 다리는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다가 1953년 복원 과정에서 엉뚱하게 남쪽에 다리가 놓이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고증을 통해 2021년, 고종과 명성황후가 건청궁을 나서 향원정으로 향하던 동선 그대로 지금의 장소(북쪽)에 새로 짓게 되었다.
4만 권의 장서를 보관하던 ‘집옥재'
건청궁 서북쪽에는 청나라풍의 왕실 서재 집옥재(集玉齋) 권역이 자리한다. ‘옥처럼 귀한 책을 모은다'는 뜻의 이곳은 고종의 개인 서재이자 외국 사신 접견소였다.
집옥재. [사진=궁능유적본부]
서쪽의 팔우정, 동쪽의 협길당과 연결되는 집옥재에는 당대 최고 수준의 도서 4만여 권이 보관되어 있었다. 고종은 이곳에서 서구의 선진 문물을 공부하며 자주독립과 근대화의 길을 모색했다.
경복궁 깊숙한 곳에 자리한 건천궁·향원정·집옥재는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려 했던 아들의 결단과 외세의 거센 파도 앞에서 나라를 지키려 했던 왕의 고뇌, 그리고 시대의 끝자락에서 아내를 잃은 한 남자의 비극적 운명이 층층이 쌓여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향기는 멀수록 맑아지지만 역사는 알수록 그 의미가 깊어진다. 건청궁 일대는 조선 말기 국운이 풍전등화에 처했던 때 온몸으로 역사의 파고를 넘었던 고종의 외로움을 잠시 헤아려볼 수 있는 곳이다.
한편 ‘2026년 봄 궁중문화축전’이 25일부터 5월3일까지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국가유산진흥원 주관으로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경희궁, 종묘에서 펼쳐진다. 이 기간 궁궐을 배경으로 △K-Heritage마켓 △궁중놀이방 △아침 궁을 깨우다 △어린이 궁중문화축전 궁중직업실록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한복을 입고 궁궐 뜰을 거니는 관람객들. [사진=임요희 기자]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사진=궁능유적본부]

임요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