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7년 9월17일 미국 필라델피아의 인디펜던스 홀에 9개 주 대표들이 모여 미 헌법에 서명하고 있다. 하워드 크리스티의 유화 작품.
“많은 사람이 원하면 다 된다”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원해도 헌법을 넘을 수는 없다.”
미국은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친다. 미국 학교 교과서에도 민주주의(democracy)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선거, 투표, 시민 참여, 자유 같은 말도 많이 나온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미국은 학생들에게 “다수결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나라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이 찬성하면 그게 곧 정치의 기준이 된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실제 미국 시민교육의 중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미국이 학생들에게 진짜로 심어 주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원하면 다 된다”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원해도 헌법을 넘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이 말은 그냥 멋있게 꾸민 표현이 아니다. 미국 정부가 실제로 학생들을 평가하는 기준에도 그대로 나온다. 미국 교육부 산하 국립교육통계센터(NCES)는 전국 학생들의 시민교육 수준을 평가하는 시험을 운영한다. 이것이 NAEP 시민평가다.
이 시험은 학생들이 정치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투표를 좋아하는지만 묻지 않는다. 이 시험의 목적은 학생들이 “미국의 헌정 민주주의 안에서 시민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능력”을 갖추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 앞에 붙는 “헌정”이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가르치지만, 그냥 민주주의가 아니라 헌법 안에 묶인 민주주의를 가르친다. 미국에서 민주주의는 마음대로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헌법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정치다.
그래서 미국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시민교육은 “국민이 주인이다”라는 말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다음 문장이 더 중요하다. “주인도 헌법 아래 있다.”
미국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이 내용을 배운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말은 맞다. 하지만 주인이라고 해서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이 찬성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는 국민도 헌법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다수가 원한다고 해서 소수의 권리를 빼앗을 수 없고, 선거에서 이겼다고 해서 법 위에 설 수 없으며,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마음대로 나라를 움직일 수 없다고 배운다.
그래서 미국 학교 시민 과목에서는 투표보다 헌법을 먼저 배운다. 권리장전도 배우고, 권력분립도 배운다. 연방주의도 배우고, 견제와 균형도 배운다. 법의 지배도 배운다. 미국 학생들은 “누가 이겼는가”보다 “이긴 사람도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를 먼저 배운다.
이것이 미국 시민교육의 가장 중요한 뼈대다. 선거는 중요하다. 하지만 선거가 전부는 아니라고 가르친다. 미국은 학생들에게 “선거에서 이기면 다 된다”가 아니라 “선거에서 이겨도 헌법은 못 넘는다”고 가르친다.
이 점에서 미국은 아테네 민주주의를 조심스럽게 가르친다.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시작으로 소개된다. 학생들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직접 토론하고 직접 표결했다는 사실을 배운다.
미국이 학생들에게 진짜로 심어 주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원하면 다 된다”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원해도 헌법을 넘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시민이 정치에 직접 참여한 첫 사례로 아테네는 아주 중요하게 나온다. 민회, 배심, 토론, 추첨제 같은 제도도 함께 배운다. 미국 학생들은 민주주의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물으면 아테네를 떠올리게 배운다.
하지만 미국 학교는 아테네를 그대로 따라야 할 완벽한 정치 모델로 가르치지 않는다. 여기서 미국 교육의 태도가 갈린다.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시작이지만, 동시에 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도 보여주는 사례로 다뤄진다.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흥분하면 어떻게 되는지, 말 잘하는 선동가가 군중을 끌고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다수가 화가 났을 때 얼마나 쉽게 위험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를 아테네 사례로 배운다.
소크라테스 재판이 대표적이다. 미국 학생들은 아테네를 통해 시민 참여의 가치를 배우지만, 동시에 다수의 흥분이 언제든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경고도 함께 배운다.
미국은 학생들에게 “시민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시민의 뜻도 제도 안에서 걸러져야 한다”는 말까지 함께 가르친다. 미국이 아테네를 존중하면서도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여는 중요하지만, 참여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시민의 뜻은 필요하지만, 그 뜻도 제도와 법 안에서 정리되어야 한다고 미국은 본다.
이 생각은 미국 건국자들의 글에도 그대로 나온다. 미국 헌법을 설계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인 제임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 논고’ 10번에서 “순수 민주정”을 경계했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 민주정은 시민이 한곳에 직접 모여 정치 결정을 내리는 체제다. 쉽게 말해 아테네 같은 방식이다.
매디슨은 이런 체제에서는 다수의 흥분을 막기 어렵고, 파벌이 커지면 나라가 쉽게 흔들린다고 보았다. 그래서 미국은 시민이 직접 모든 결정을 내리는 방식보다 대표를 뽑아 대신 판단하게 하는 공화국이 더 안전하다고 보았다.
매디슨은 공화국이 민주정보다 나은 이유를 분명히 설명했다. 첫째, 대표를 뽑아 시민의 뜻을 한 번 걸러낼 수 있다. 둘째, 나라가 넓고 사람이 많아질수록 여러 생각이 섞이기 때문에 한쪽이 쉽게 폭주하기 어렵다. 이 생각은 미국 시민교육의 핵심으로 남아 있다. 미국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배우지만, 실제로 배우는 제도는 대표제 공화국이다.
그래서 미국 학생들이 배우는 정치는 아테네식 직접민주정이 아니라, 선거가 있는 공화국이다. 국민은 대표를 뽑지만 대표도 헌법 아래 있다. 대통령을 뽑아도 의회가 견제한다. 의회가 법을 만들어도 대법원이 헌법에 맞는지 따진다. 연방정부가 힘을 가져도 주 정부가 따로 권한을 가진다. 다수가 찬성해도 개인의 기본권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미국 학생들은 바로 이런 질서를 배운다.
반대로 로마 공화정은 미국 시민교육에서 훨씬 더 깊게 들어와 있다. 이유는 미국 건국자들이 자기 나라 제도를 설계할 때 실제로 참고한 모델이 로마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상원이라는 말부터 로마에서 왔다. 공직자의 임기, 대표제, 권력 나누기, 공직의 책임, 시민의 의무, 공공선 같은 개념도 로마 공화정과 이어져 있다. 미국은 학생들에게 로마를 단순한 옛 제국으로만 가르치지 않는다. 로마는 “나라를 어떻게 오래 버티게 만들 것인가”를 보여 주는 정치 교과서로 들어온다.
이때 자주 나오는 말이 시민적 덕성이다. 말은 어렵지만 뜻은 어렵지 않다. 자기 이익만 따지지 않고, 공동체 전체를 함께 생각하는 태도다. 미국은 학생들에게 “내 권리”만 가르치지 않는다. “내 책임”도 함께 가르친다. 이것이 미국 시민교육의 중요한 특징이다. 미국 학교는 학생을 권리만 외치는 사람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 권리를 알되, 책임도 아는 시민으로 만들려 한다.
그래서 미국 학생들은 법을 지켜야 한다고 배운다. 세금을 내야 한다고 배운다.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여할 책임도 배운다.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배운다. 공공 문제를 놓고 토론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배운다. 미국 시민교육은 “내가 무엇을 받을 수 있는가”보다 “내가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가”를 더 오래 가르친다.
미국 시민교육은 크게 네 가지를 반복한다.
첫째는 헌법 교육이다. 학생들은 독립선언서, 헌법, 권리장전, 수정헌법, ‘연방주의자 논고’를 배운다. 미국에서 자유는 뜨거운 구호가 아니라 글로 적힌 제도다. 자유는 헌법 문장 안에서 지켜진다고 배운다.
둘째는 제한정부 교육이다. 미국은 정부가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동시에 정부는 위험할 수 있다고도 가르친다. 그래서 대통령도, 의회도, 법원도 서로 붙잡아야 한다고 배운다. 권력은 믿는 것이 아니라 묶어 두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셋째는 시민의 의무 교육이다. 미국 학교는 시민을 권리만 가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시민은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내고, 배심에 참여하고, 지역사회를 위해 일할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배운다.
넷째는 공화국 유지 교육이다. 국기, 건국, 헌법 기념일, 독립선언서, 전쟁의 기억, 희생의 기억이 시민교육 안에 들어간다. 이것은 정치 상식을 배우는 수업만이 아니다. 미국이라는 공화국을 오래 유지할 시민을 기르는 교육이다.
미국은 아테네 민주주의와 로마 공화정을 둘 다 가르친다. 그러나 더 무겁게 다루는 쪽은 로마다. 아테네는 민주주의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보여주는 출발점이다. 로마는 나라를 어떻게 오래 유지하고, 권력을 어떻게 나누고, 시민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보여주는 실전 교과서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말한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실제로 훈련시키는 것은 공화국이다. 미국 학생들은 민회를 동경하도록 배우기보다 헌법을 신뢰하도록 배운다. 다수결이 중요하다고 배우지만, 다수결도 법과 제도 아래 있어야 한다고 함께 배운다. 미국 교실에서 아테네는 시작을 설명하는 이름이고, 로마는 나라를 운영하는 법을 가르치는 이름이다. 그래서 미국 시민교육의 중심은 민주주의라는 말보다 헌정 공화국이라는 말에 더 가깝다.
◆ 松山(송산)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신화가 된 조선’과 ‘다다미 위의 인문학’을 펴냈다. 현재 자유주의 문화운동의 연구와 실천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