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松山 다큐ㅣ민주노총 위선의 역사] 생존권으로 시작해 정치투쟁의 씨앗을 심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 松山 작가
  • 등록 2026-04-27 19:55:56
기사수정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사진=민주노총(흑백사진을 컬러로 변환)]1987년은 민주노총의 출발점으로 기억된다. 그 해는 노동 현장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정당한 분노였다고, 억눌린 노동자가 처음 사람답게 말하기 시작한 해였다고 포장된다. 앞부분만 보면 맞는 말이다. 1987년 여름 한국 산업 현장은 참혹했다. 

 

울산 현대엔진,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기아자동차, 구로공단, 인천 남동공단, 창원 기계공단 곳곳에서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넘게 일했고, 산업재해는 흔했고, 임금은 낮았고, 노조는 사실상 어용조직이었다.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전국에서 3천 건이 넘는 노동쟁의가 터졌고, 노동부 통계 기준 신규 노조는 1년 새 1000개 이상 늘었다. 숫자만 놓고 보면 분명 한국 노동사에서 큰 분기점이었다.

 

문제는 이때부터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출발선에서는 분명 임금, 노동시간, 작업환경, 인간 대우를 요구하는 현장 투쟁이었다. 여기까지는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실제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내건 요구도 상여금 인상, 작업장 안전, 노조 민주화, 장시간 노동 완화가 핵심이었다. 구로공단 여성 노동자들이 외친 것도 기숙사 통제, 저임금, 장시간 노동 개선이었다. 

 

이 시기 노동자들의 분노는 현실적이었고, 구체적이었다. 바로 이 대목까지는 한국 노동운동이 사회적으로 동의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나 이 정당한 불만 위로 곧장 운동권이 올라탔다. 1987년 하반기부터 NL, PD 계열 운동권 세력은 공장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출신 운동권 학생들이 위장취업 형식으로 공장에 들어갔고, 노동 현장은 곧 생존권 투쟁과 체제투쟁이 뒤섞인 공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노동자는 임금과 안전을 원했는데, 운동권은 그 위에 반미, 반자본, 반체제 언어를 덧씌웠다. 공장 식당과 야학에서 읽히기 시작한 것은 산업안전 교재만이 아니었다. 마르크스, 레닌, 종속이론, 민중민주주의 혁명론 문건이 함께 돌았다. 노동자의 분노는 곧 운동권의 정치 자산으로 흡수됐다.

 

바로 여기서 민주노총의 원죄가 시작된다. 노동운동은 노동자를 위한 조직이어야 했다. 임금, 안전, 복지, 노동시간, 산재, 고용안정이 중심이어야 했다. 그러나 1987년 이후 한국의 강성 노동운동은 이 길을 오래 가지 않았다. 노동 현장은 곧 정치 실험장이 됐다. 

 

노동자는 조합원이기 전에 혁명 주체로 재교육되기 시작했고, 노조는 임금협상 조직이 아니라 체제 비판 조직으로 성격이 바뀌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노동해방”을 외쳤지만 실제로는 노동자의 삶보다 운동권 조직 확대가 앞서는 일이 잦아졌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분명 필요했다. 그러나 그 정당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는 노동자의 절박함 위에 운동권이 올라탔기 때문이다. 생존권 투쟁은 정당했지만, 그것을 혁명 전초기지로 바꾼 쪽은 따로 있었다. 

 

이때 심어진 씨앗이 뒤에 전노협이 되고, 전노대가 되고, 민주노총이 된다. 노동자를 위한 노조가 아니라 노동자를 재료로 쓰는 정치조직의 씨앗이 1987년에 이미 뿌려진 셈이다. 

 

민주노총은 1995년에 창립됐지만, 그 이념적 골격은 이미 1987년에 완성돼 있었다. 노동자의 피로 출발했지만, 가장 먼저 그 피를 정치 연료로 바꿔 쓴 조직. 민주노총의 시작은 바로 거기였다.



 


◆ 松山(송산)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신화가 된 조선’과 ‘다다미 위의 인문학’을 펴냈다. 현재 자유주의 문화운동의 연구와 실천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松山은 필명이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0
감동이에요
0
정기구독배너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