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이 옳았다” “계엄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 “윤석열 대통령을 돌려줘라” “운석열이 그립다” 등의 벽보가 잠실벌을 도배하고 있다. Ⓒ한미일보
이에 이르러 나는 더 이상 싸우는 것만도 아니요, 괴로워하고 있는 것만도 아니다. 어떤 숭고한 질문의 분위기 속에서 그분께 묻지 않은 답을 듣는 것이다.
이날 그 이정엽이라는 판사는 그분에게 이적죄라는 것을 뒤집어 씌워 30년 감옥형을 또 선고한 것인데, 박선원 같이 고발을 주도한 이들과 판사는 한 묶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어느 신문 기사, 유튜브를 보아도 접할 수 있을 법한, 악에 물든 판사나 음모꾼 정치인을 비판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나는 여기서 귀한 지면을 빌려 이 세속 정치의 갈등 속을, 대나무를 시원스레 쭉 찢어놓는 것 같이, 날카로운 칼로 뒤엉킨 삼을 베어놓는 것 같이, 구름 걷어치우고 안개를 깨뜨리는 것 같이, 환하게 밝혀주는 그 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하는 것이다.
6월12일 변호사를 통해서 청년들에게 선사한 옥중 서신에서 그분은 성경 두 구절을 인용하셨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하박국 2장 14절과 이사야 40장 31절이었다.
하박국(Habakkuk)은 구약성경의 열두 소예언서 가운데 하나인 하박국서의 저자이자 예언자, 그가 여호와에게 탄원한다. 어찌하여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고 정의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우는 아이에게 젖을, 먹을 것을 주지 않는 엄마·아빠처럼, 자신들의 힘을 신처럼 섬기는 갈대아(바빌론) 사람들로 하여 유대를 짓밟게 하시리라 한다. 하박국은 답답하여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시 말씀하신다. 당신의 묵시는 정한 때가 있으니, 악인들의 종말이 속히 이를 것이고 비록 늦을지라도 거짓 없이 지체 없이 반드시 그 종말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악인의 마음은 교만하면서도 정직하지 못함에 스스로 시달릴 것이로되 의인은 자신의 믿음에 의지하여 의연히 견디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묵시’는 여호와의 관점으로 보여진 세계다. 당신은 말씀하시기를, 갈대아의 승리는 영원치 않을 것이요, 악인은 결국 심판받을 것이요, 의인은 믿음으로 살 수 있을 것이요, 정의는 결국은 실현될 것이요, 진리의 영광이 이 불의한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이다.
뭇사람들은 현재에 갇힌 눈으로 의기양양해 하고 비탄에 잠기지만 역사의 흐름 전체를 꿰뚫어 보는 관점에 서면 그 모든 것을 뒤집어 새롭게 볼 수 있게 된다.
하박국이 이에 깨닫고 기뻐하며 광대무변한 심판의 진리를 찬양한다. 영원한 것처럼 보이는 산이 무너질 것이요 무궁한 것처럼 보이는 산이 엎드러질 것이다. 어떠한 참담한 고통 아래서라도 휘황한 날을 기다려 견딜 수 있으리라.
지금 나는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임에도 옥중에 갇힌 이의 말씀의 주석자에 지나지 못한다.
하박국이 왜 악인이 번성하는가를 묻는 예언자였다면, 이사야(Isaiah)는 어둠이 아무리 깊어도 하나님의 구원이 결국 당도하리라고 외친 예언자였다고 한다. 이사야서는 모두 66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1~39장이 주로 심판을 이야기한다면 40~66장은 위로와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노래한다고 한다.
옥중에 계신 이는 청년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사야서 40장 31절을 말씀하셨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도대체 이 말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사야서 40장은 바빌론에 끌려와 노예의 삶을 이어온 위로와 구원을 노래한다. 이제 노예적인 유랑과 노역이 끝나고 마침내 골짜기마다 메워지고,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되는, 진리의 세상이 도래하리라.
그러고 보니, 독일 그룹 보니 엠(Boney M)의 ‘바빌론 강가에서(Rivers of Babylon)’는 바빌론에 끌려간 유대인들의 깊은 향수를 노래한 것이었다. 이 노래는 성경의 시편 137편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었다. “우리는 바벨론 강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네(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a, we wept, when we remembered Zion),” 그 첫머리 가사를 나는 어떻게 그 뜻도 모르고 좋아했더란 말인가.
이 이사야서 40장을 열어 첫 문장부터 읽어나감에, 나도 모르게 몸에 전율이 인다. 깊은 감동으로 가슴이 저며오는 나 자신을 깨닫는다.
그이는 지금 우리 눈앞에 바싹 다가온 진리의 현현, 악인들이 겁에 질려 아우성치고, 숨어들어 갈 곳을 찾고, 부끄러워 얼굴을 감추고 싶어하게 될 때를 말씀하신 것임을, 나도 모르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이는 자신만만,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30년형을 때리고 겉으로 환호하는 이들의 깊은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인생의 열패감을 꿰뚫어 보셨던 것이다.
성경적 ‘비유’의 언어가 아니고는 그이와 ‘우리’, 그리고 나의 안전(眼前)에 닥쳐온, 이 놀라운 승리와 회복과 해방을 온전히 가리킬 방도가 없으셨을 것이다.
올림픽공원에 모인 새 청년들이여, 긴 시간을 싸우며 견뎌 “곤비”해진 이들이여. 우리가, 정의를, 자유를, 민주주의를 믿어, 6·3의 날, 그 부정한 이들의 악행이 세상에 드러남을 기화로 “새 힘”을 얻었으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솟아오름과 같이 우리들의 뜻이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아무리 악독한 송사(訟事)가 그이를 괴롭힌다 해도, 바야흐로 옳지 못한 감옥의 문이 부서질 날이 멀지 않았음이다.
악인이 부끄러워 쥐구멍을 찾고 천지 뒤바뀜을 망연자실 넋 놓고 당할 날이 멀지 않았음이다. 부정한 자들의 초라한 정체가 마침내 국민 앞에 환히 드러남이다.

◆ 방민호 교수
문학박사, 서울대 국문과 교수. 계간문학잡지 ‘맥’ 편집주간(2022년~)이자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저서로 ‘연인 심청’(2015), ‘통증의 언어’(2019), ‘한국비평에 다시 묻는다’(2021), 서울문학기행(202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