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5·18 北개입 황장엽 명단 YS 묵살, CIA는 알았다”
1980년 5·18 당시 광주에 내려온 북한 공작대 명단을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가 제출했으나 김영삼 대통령이 묵살한 것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알고 있었다는 전직 한국계 CIA 요원의 증언이 나왔다. 40년간 한국계 미국 정보요원으로서 굵직한 대공(對共)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누구보다 가까이 접근하며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직접 조사했던 마이클 이(93·Michael P. Yi) 조지워싱턴대 정치학 박사는 지난 17일 <한미일보>와 만나 가진 인터뷰에서 “그동안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라며 이같이 폭로했다.
한국을 방문한 마이클 이(93·Michael P. Yi) 미국 조지워싱턴대 정치학 박사가 지난달 17일 <한미일보>와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박사가 작성에 관여한 1980년 5월22일자 미 중앙정보국(CIA) 기밀해제 보고서(가운데 아래)에는 계엄사령관의 협상 객체인 시민그룹에 ‘김대중 추종자들(Associates of Kim Dae Jung)’이 섞여 있고 전라도의 ‘내란(insurrection)’이 계엄사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기술돼 있다. 또한 군이 정전 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반란(rebellion)’을 잠재우기 위해선 무력을 사용해야 할 것 같다고 CIA가 보고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인 북한 로동신문 1980년 5월22일자에는 광주 시위대-계엄군의 대치 장면과 무기고 습격 및 피탈 장비 현황이 구체적으로 보도돼 있다. 당시 보도통제로 한국 언론들은 이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위-오른쪽 아래) 왼쪽 사진은 5·18 기록관 소장 시위대의 모습. 마이클 이 前 CIA 요원 증언
“주한美대사관서 탈북자 심문 때 ‘일치된 증언’ 확보”
“황장엽이 바친 명단, 김영삼이 흙 속에 묻어 버렸다”
김경재 “김영삼 묵살 얘기 들어봤지만 확인은 못 해”
박정희 서거 틈타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이 진두지휘
잠복 간첩들에 1월 지령… 2·3인조 공작대 순차 침투
군인도 일부 차출… 대부분이 고도훈련 받은 민간인
“북한 5월27일 남침 기도… 전남도청 수복되자 포기”
부마사태 때 내려온 간첩들 잔류했다 광주 즉각 합류
광주시민 폭도 매도 안 되지만 反민족세력 가려 내야
1980년 5·18 당시 광주에 내려온 북한 공작대 명단을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가 제출했으나 김영삼 대통령이 묵살한 것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알고 있었다는 전직 한국계 CIA 요원의 증언이 나왔다.
40년간 한국계 미국 정보요원으로 굵직한 대공(對共)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누구보다 가까이 접근하며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직접 조사했던 마이클 이(93·Michael P. Yi) 미 조지워싱턴대 정치학 박사는 지난 17일 <한미일보>와 만나 가진 인터뷰에서 “그동안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라며 이같이 폭로했다.
(※ 이 박사는 ‘Michael Yi’를 사용하므로 마이클 이로 번역한다. ‘Lee’를 ‘리’로 번역해 온 한국의 관행에 따라 ‘마이클 리’로 기존에 소개됐던 인사와 동일 인물이다.)
이 박사는 “1985년도부터 1995년까지 10년 동안 서울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 정무관과 북한 담당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으로 일할 때 많은 탈북자를 심문할 때 일치된 사건이 OO명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라고 북한 공작대 규모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비보도)’를 요청했다.
그러면서 “최근에 밝혀진 사실이 있다”며 “황장엽이 내려와 김영삼에게 바친 OO명단을 제공했는데 김영삼이 국민에게 발표하지 않고 흙 속에 묻어버린 걸 우리 CIA가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황장엽 비서에 얽힌 내용을 최근 알게 된 경위와 출처에 대해서는 “밝힐 수 없다”고 답했고, 정보 소식통으로부터 얻은 것으로 이해하면 되는지 질문하자 “그렇다”고 했다. 26일 현재 미 국무부 또는 CIA에서 새롭게 기밀 해제된 문건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주간 7호 마감일 기준. 온라인 보도 시점인 5월5일에도 같음. 편집자 주)
이 대목에서 이 박사는 1999년 김대중 정부 시절 대북특사로 평양을 방문했던 김경재 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가 OO명의 가묘(假墓·가짜 묘)를 목격했다고 했다.
김 전 총재는 지난 1999년 김대중 특사로 북한에 갔을 때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서 ‘광주에서 전사한 인민군 애국열사들의 가묘’를 봤다고 연합뉴스 편집국장을 지낸 서옥식 대한언론인회 당시 부회장 겸 편집위원에게 증언했고, 이 내용은 2023년 5월 ‘KNews’를 통해 처음 보도됐다.
기자는 김 전 총재에게 마이클 이 박사가 밝힌 규모에 대해 크로스 체킹을 요청했으나 규모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김 전 총재는 “내가 본 (남파 북한군) 가묘는 9~11기 정도”라고 했다.
김경재 전 총재는 “황장엽 명단을 김영삼이 묵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봤지만 나는 사실 확인은 안 해봤다”면서도 이야기를 들은 시점에 관해서는 황장엽 전 비서가 망명했던 “그 무렵”이라고 오래 전 얻은 주장이었음을 시사했다.
1980년 5월22일자 미 중앙정보국(CIA) 보고서(위)에 계엄사령관의 협상 객체인 시민그룹에 ‘김대중 추종자들(Associates of Kim Dae Jung)’이 섞여 있다고 기술돼 있다. 전라도의 ‘내란(insurrection)’이 계엄사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으며(왼쪽 아래), 군이 정전 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반란(rebellion)’을 잠재우기 위해선 무력을 사용해야 할 것 같다고도 CIA는 보고(오른쪽 아래)했다. CIA 보고서 캡처
앞서 마이클 이 박사는 지난 2023년 10월 기자와의 <스카이데일리> 인터뷰에서 1980년 5·18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를 기화로 북한 노동당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이 이듬해 1월 지령을 내렸고 2·3인조로 나뉜 민간 공작대가 육·해상으로 광주에 침투한 뒤 대한민국 국가 전복을 목표로 고정간첩과 합세한 북한의 ‘대남공작’이었다는 취지로 증언한 바 있다.
40년간 CIA 등 미 정보당국에서 한국 담당 요원으로 근무한 이 박사는 김현희 KAL기 폭파 사건과 김신조 1.21 사태, 미얀마 아웅산 테러 등 북한이 획책한 굵직한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들의 발단 경위와 배후를 파헤치는 데 깊이 관여했으며 5·18 역시 직접 조사한 뒤 워싱턴에 최초 보고한 미 정보당국의 핵심 ‘북한통’이었다.
“北 대남작전 구체화 첩보 입수… 미국은 이미 소요 예상했다”
마이클 이 박사는 “김중린이 한국에 있는 잠복 간첩들에게 지령을 내린 것은 1980년 정월(1월)이었다”고 구체적으로 시점을 못 박았다. 북한의 지령 시점은 처음 공개됐다. 당시 김중린은 조선노동당 대남공작 총책이었고 김일성 주석과 지근거리에서 공작 계획을 수립했다고 한다.
잠복 간첩의 성격을 되묻자 “이미 침투해서 와 있는 간첩들이며 북한은 고정간첩과 잠복 간첩을 합쳐 ‘혁명역량’으로 지칭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최초 지령이 하달된 뒤 몇 개월 동안 계속 2인조·3인조로 침투한 뒤 (남한에) 잠복해 있었던 간첩들”이라고 부연했다.
실제 5·18을 앞두고 북한의 침투 활동이 극성을 부렸다. 1980년 3월25일 포항 앞바다로 침투한 북한 무장간첩선 1척이 해군의 공격을 받고 침몰해 무장간첩 8명이 숨졌다. 이틀 전 3월23일에는 한강 하류 침투, 3월27일에는 강원도 침투 등 무장공비 출현이 빈발했다.
미 정보당국은 1979년 여름부터 북한의 특이동향을 일찌감치 포착했다. 이전부터 북한의 동태를 주시해 온 미국은 이 시기 북한이 남침에 대비한 특전대 훈련에 돌입한 사실을 파악했다. 이때만 해도 북한의 고질적인 남침 계획 정도로 파악한 당국은 김중린의 동태에 대한 첩보가 쌓이면서 예사롭지 않다고 보고 정밀 경계했다고 한다.
마이클 이 박사는 “북한이 대남작전을 구체화한다는 사실을 다양한 소식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며 “17공수여단과 특전대가 훈련해 온 데다 김중린이 지령을 내린 사실을 입수해 워싱턴에 곧장 보고했다”고 확인했다. 그의 보고로 미국 정부는 1980년에 남한에서 북한이 계획하고 지휘하는 소요가 있을 것을 이미 예상했다고 한다. “이 정보를 한국 정부도 공유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그는 언급했다.
일본 통일일보가 북한은 한국의 정치적 불안정을 틈타 금년봄에 대량의 무장간첩을 남파, 지방도시의 방송국을 점령하는등 본격적인 대남게릴라활동을 벌일 계획으로 있으며, 지난 23일 한강에서의 무장공비 수중침투사건과 25일 포항 앞바다에서 발각된 무장간첩선 사건은 이 간첩작전의 일환이라고 보도했다. [1980년 3월28일 동아일보 보도]
한국 정부 문건에 따르면 1980년 5월10일 김영선 중앙정보부 2차장은 5월 중순 북한이 남침할 가능성이 짙다는 이른바 ‘북괴남침설’을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서리에게 보고했다. 이틀 뒤 우리 정부는 임시국무회의를 긴급 소집했고 중앙정보부 담당국장이 출석, 북괴남침설 분석 결과를 보고한 뒤 군과 경찰에는 비상계엄체제 돌입령이 시달됐다. 정부는 북한의 징후를 계엄령 발령의 근거로 삼았다.
마이클 이 박사는 광주시민 사이에 섞여 시민과 계엄군을 교란하고 싸우게 만든 세력이 규합한 경위를 구체적으로 보충 설명했다. ‘혁명역량’에 관한 부연 설명 과정에서다. 그는 “(남파 간첩 외에도) 부마사태 때 북한이 배후 조종해 내려왔던 간첩들이 (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잔류하고 있다가 광주에 합류했다”며 “1980년 4월에 벌어진 사북사태에도 북한이 개입했고 잔류 인원이 한 달 뒤 5·18에 가세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마이클 이 박사는 “미국 국무부에서 기밀 해제된 외교전문엔 북한 특수군이 왔다는 얘기가 없다”며 “내가 보고하면서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다고 하지 않았고, 대남공작 특공대로 서술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국무부에서 기밀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5·18은 ‘김대중 추종자들(Kim Daejung followers)’과 ‘북한 민간 공작대원들(North Korean Agents)’이 개입한 것으로 돼 있다. 그는 “‘Military(군대)’가 아니다. ‘Agent’는 간첩이라는 뜻”이라고 보충했다.
이어 “대남공작단을 구성하면서 군인(북한 인민군)이 차출되기도 했지만 조직 자체는 민간 조직으로 꾸려졌고 엄선된 이들은 특수부대원들보다 작전수행 능력이 뛰어나며 고도의 훈련을 견뎌 낸 이들”이라고 강조했다.
마이클 이 박사는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 외교문서를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어이가 없다”고 반응했다. 그는 “북한이 5·18 시점에 남침하지 않고 대기했다는 문장만 보고 북한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단정 짓는 것은 정보분석의 기본이 안 된 처사”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가장 정확한 것은 나다. 내가 이 문서의 최초 작성자이자 보고한 당사자”라며 “북한은 특수군 남침 계획을 먼저 수립한 상태에서 민간 공작대를 남파해 고정간첩들과 합세하도록 계획하고 행동에 옮겼고 이 사실이 기록된 CIA 보고서를 토대로 국무부가 외교전문을 만들어 워싱턴에 보고했다”고 강조했다.
미 국무부가 기밀 해제한 문건에 따르면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이창룡 생포 등)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불순세력’과 공산주의 선동가들이 있다(‘impure elements’ and communist instigators lay behind the whole affair)”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또한 5·18은 ‘김대중 추종자들(Kim Daejung followers)’과 ‘북한 민간 공작대원들(North Korean Agents)’이 개입한 것으로 돼 있다. 이창룡과 비슷한 시기에 스파이 활동을 하다 체포된 남파간첩 손성모는 북한군 소속이 아닌 민간 공작원으로 남파됐다. 손성모는 1988년 4월 첫 공개 재판에서 “김일성 주석님의 조국 통일 노선을 실현하기 위해 나선 사람”이라고 자신의 남파 경위를 직접 밝힌 바 있다. 김일성은 박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대남적화를 위한 다수의 교시와 지령을 내렸다. 이후 비전향 장기수로 수감생활 하던 손성모는 김대중이 2000년 9월 북한으로 돌려보냈고 북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
“좌익사범 170명 수감 광주교도소 습격은 北 민간공작대 작품”
마이클 이 박사는 공작조가 주도한 무기고와 교도소 습격에 관해 “4시간 이내에 전라도에 있는 17개 시·군의 예비군 무기고 44곳을 탈취했다는 것은 결코 (시민군 주장처럼) 우발적인 일이었다고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라며 “전 세계 어느 군대도 이같이 하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훈련받은 혁명역량이 동원된 것이고, 사전답사를 통해 위치정보를 다 확보한 지원 세력의 합작품”이라고 못 박았다.
이 대목에서 “폭도들을 싣고 가는 트럭 운전수가 차를 세우고 광주시민들에게 도청 소재지 위치가 어디냐고 물었다”며 “고도의 훈련을 받은 북한 공작조도 낯선 환경에서 실수한 사례들이 입수됐다”고 했다.
마이클 이 박사는 “예비군 무기고 44곳을 부수고 5408정의 무기류를 획득했으며 트럭 3대분의 폭약과 뇌관·도화선을 탈취했다”며 “170여 명의 좌익사범을 포함해 2700여 명의 죄수가 수용된 광주교도소를 야간에 다섯 차례 습격한 것은 시민군이 아니라 북한 민간공작대가 주도한 작품”이라고 역설했다.
이어 “이런 사건을 절대 민주화 투쟁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전제한 뒤 “광주사태를 언급할 때 광주시민을 모두 싸잡아 폭도들이었다고 단정해선 안 되지만 김대중 추종 세력과 유공자로 행세하는 인간들을 무고한 시민들로부터 분리해서 같은 하늘 밑에서 숨을 쉴 수 없는 민족 반역세력을 관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광주시민군이 광주시민을 총으로 쐈다고 봐서도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마이클 이 박사는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의 수가 정확하게 나와 있다”며 “그 당시에 한국 정부가 조사한 대로 총상 시신 116구 가운데 36구는 M16, 80구는 카빈총에 맞아 죽은 시신이었다”고 했다.
총을 거꾸로 멘 폭도들. [김대령 박사 발굴 사진(왼쪽)과 5·18 기념 자료집]당시 군 현대화 사업으로 진압군(계엄군)에게 M16이 지급됐다. 폭도들이 탈취한 예비군 무기고에는 카빈소총이 있었다.
총구를 아래로 향하게 거꾸로 멘 것도 북한의 개입이 아니고선 설명할 길이 없다고 이 박사는 말했다. 그는 “남한에는 심지어 꿩을 잡는 포수도 총구가 하늘로, 개머리판(총구 반대 방향의 넓은 견착대)이 땅으로 가게 멘다”며 “개머리판을 거꾸로 멘 것은 북한 공작조가 북에서 하던 습관대로 착각해 실수한 것”이라고 했다.
마이클 이 박사는 북한군은 전혀 개입이 없었는지 묻자 “북한 특수군이 5월27일 남침할 계획이 수립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은 1980년 여름 이전에 남조선 해방을 위한 대사변을 획책했고 서울과 마산·광주에서 동시다발적인 민중 봉기를 일으키고 남조선 지하에 구축해 놓은 혁명역량이 주도하되 표면적으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민주화 투쟁으로 표방하는 게 1차 전략이었다”며 “이 불길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 인민해방시민군이 북조선에 무력 지원을 요청하는 형식을 취하고 그때 북한에서 17공수여단과 특전부대를 남파해 6·25 전쟁 때 실패한 조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겠다는 정보를 내가 해외 근무 중에 처음 입수해 워싱턴에 보고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북한은 5월27일 남침을 위해 무력을 휴전선 인근에 배치하고 대기했지만 남한 봉기가 확산되지 않은 데다 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수복함에 따라 북한이 특수군 투입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북한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끌어들인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이클 이 박사는 “대한민국이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에 국가안보가 굉장히 위태로울 때에 북한 입장에서는 그때를 굉장히 큰 기회로 여기고 노렸지만 전두환 사령관에 의해 수습이 잘 됐기 때문에 그를 끌어들이고 미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아무 관련이 없는 전두환에게 광주에 대한 책임을 모두 뒤집어씌우는 것만 봐도 북한은 광주시민에게 총을 쏘고 계엄군에게 충분히 뒤집어 씌울 수 있는 집단임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우리 군은 5·18 직전 해안방어 상태를 점검할 목적으로 적으로 가장한 특전사 1개 대대를 호남 해안에 분대 단위로 분산해 모의침투시켰으며 모두 상륙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라남북도 해안선이 모두 뚫릴 정도로 해안경계 상태가 허술했다는 방증이다. 사진은 5·18 당시 간첩선 출몰이 잦았고 공비가 침투했다는 첩보를 군당국이 입수한 영광군 염산면 두우리 백바위를 취재진이 2년 전 답사할 찍은 모습.
허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