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틸레네에 첫 번째와 두 번째 칙령을 전달하기 위해 파견된 삼단노선 함대.
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은 시민을 설득해야 한다. 자신의 정책이 왜 필요한지 설명하고, 반대 의견에 답하며, 표를 얻어 권력을 위임받아야 한다. 따라서 대중에게 호소하는 행위 자체를 포퓰리즘이나 선동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시민의 불만을 듣는 정치, 기득권을 비판하는 정치, 가난한 사람을 지원하는 정책도 그 자체로 포퓰리즘은 아니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민주정치와 포퓰리즘은 어디에서 갈라지는가? 시민을 설득하는 정치와 군중을 선동하는 정치는 무엇이 다른가?
대중적 호소인가, 군중의 선동인가
포퓰리즘이라는 말은 오늘날 지나치게 넓게 사용된다. 세금을 낮추자는 주장도 포퓰리즘이라 하고, 복지를 확대하자는 주장도 포퓰리즘이라 한다. 인기 있는 정책을 내놓았다는 이유만으로 정치인을 포퓰리스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인기가 있다는 사실과 포퓰리즘은 같은 뜻이 아니다. 민주주의 정치인은 원래 유권자의 지지를 얻으려 한다. 모든 대중적 정책을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면 민주정치 전체가 포퓰리즘이 되고 만다.
현대 정치학에서 널리 인용되는 카스 무데의 정의는 이 개념을 조금 더 엄격하게 구분한다. 무데는 포퓰리즘을 사회가 ‘순수한 국민’과 ‘부패한 엘리트’라는 서로 적대적인 두 집단으로 나뉘어 있다고 보고, 정치가 국민의 일반의지를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념으로 설명하였다.
포퓰리즘의 핵심은 인기 있는 정책이나 복지 지출이 아니다. 국민을 하나의 순수한 집단으로 만들고, 반대편을 부패한 적으로 규정하는 사고방식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포퓰리즘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국민을 내부적으로 거의 하나인 집단으로 보는 태도이다. 실제 국민은 직업과 지역, 종교와 세대, 재산과 가치관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기보다 ‘진짜 국민’이라는 하나의 목소리를 만들어 낸다.
둘째는 엘리트를 국민의 경쟁자나 비판 대상이 아니라 국민을 배신한 집단으로 규정하는 태도이다. 셋째는 자신만이 국민의 참된 의사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태도이다.
엘리트를 비판한다고 모두 포퓰리스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권력자와 관료, 언론과 재계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은 민주주의 시민의 당연한 권리이다.
문제는 비판의 방식이다. 상대의 정책과 행위를 비판하는 대신 상대의 정치적 자격 자체를 부정하는 순간 포퓰리즘이 시작된다. “저들의 정책은 잘못되었다”가 아니라 “저들은 국민이 아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반엘리트주의를 넘어 반다원주의로
정치철학자 얀베르너 뮐러도 포퓰리즘의 중심을 반엘리트주의보다 반다원주의에서 찾는다. 포퓰리스트는 자신과 자신의 지지자만이 진짜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며, 반대하는 시민은 국민의 일부가 아니거나 부패한 세력에 속한다고 본다.
이 논리에서는 선거에서 패배해도 국민이 자신을 버렸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진짜 국민은 여전히 자신을 지지하지만 언론, 관료, 법원, 선거제도 또는 음모가 국민의 뜻을 왜곡했다고 주장하기 쉬워진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용어를 사용한다. 국민, 주권, 다수, 직접 참여, 민의 같은 말을 앞세운다. 그래서 군사독재나 왕정처럼 즉시 반민주적인 체제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기존 정치보다 더 민주적인 것처럼 자신을 꾸민다.
그러나 국민 내부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특정 지도자와 지지집단만을 진짜 국민으로 규정한다면, 국민주권은 지도자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구호로 바뀐다.
이 문제는 고대 아테네에서도 나타났다. 당시에는 오늘날의 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없었지만, 민중을 추종하며 권력을 얻는 선동가를 가리키는 데마고고스(dēmagōgos)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이 말은 본래 ‘민중을 이끄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에 이르러 군중의 욕망과 분노에 아첨하는 정치인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다.
아테네 민주주의 초기의 지도자들도 민회를 설득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와 페리클레스 역시 연설을 통해 시민의 지지를 얻었다. 그렇다면 페리클레스와 선동가는 어떻게 달랐는가?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가 민중의 지도자였지만 민중에게 끌려다니지는 않았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시민들이 지나치게 자신감을 보일 때 두려움을 일깨우고, 낙담할 때는 자신감을 회복시켰다고 썼다. 민중의 기분을 그대로 따라간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거슬러 말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이 평가에는 민주적 지도력의 중요한 기준이 들어 있다. 지도자는 시민의 뜻을 존중해야 하지만 시민의 순간적인 감정을 그대로 정책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 시민이 듣고 싶어 하는 말과 공동체에 필요한 말이 다를 때, 필요한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선동가는 바로 그 반대로 행동한다. 시민의 판단을 높이려 하지 않고 시민의 분노와 욕망을 자신의 권력 자원으로 바꾼다.
클레온과 디오도토스가 보여준 선동의 메커니즘
페리클레스가 기원전 429년에 사망한 뒤 아테네 정치에서는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들이 강해졌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클레온이었다. 그는 귀족 가문 출신의 전통적 지도자와 달리 상업 활동을 기반으로 성장했으며, 강한 표현과 공격적인 연설로 민회에서 영향력을 넓혔다.
그러나 클레온에 관한 주요 기록은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투키디데스와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에게서 나온다. 따라서 그에 대한 부정적 묘사를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기록자의 정치적 태도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클레온의 역사적 평가에는 이런 사료상의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기원전 427년의 미틸레네 논쟁은 선동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아테네의 동맹도시 미틸레네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자, 분노한 아테네 민회는 미틸레네의 성인 남성을 모두 죽이고 여성과 아이들을 노예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첫 번째 명령을 실은 배가 즉시 출발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 시민들은 처벌이 지나쳤다고 생각하여 다시 민회를 열었다.
재논의에서 클레온은 첫 결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시민들이 말을 잘하는 연설가에게 속고 있으며, 제국을 유지하려면 반란에 가혹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점은 클레온 자신이 뛰어난 대중 연설가이면서도 토론과 재검토를 위험하게 묘사했다는 사실이다. 이미 내려진 결정을 다시 살피는 것을 나약함으로 몰고, 강한 처벌을 국가의 의지와 연결하였다.
이에 맞선 디오도토스는 미틸레네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의 논리는 감상적이지 않았다. 반란 도시의 모든 남성을 죽이면 앞으로 다른 도시들은 항복할 이유를 잃고 끝까지 저항하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디오도토스. 그의 주장으로 몰살을 막기 위한 두 번째 배가 미틸레네로 파견된다.
또한 소수 지도자가 일으킨 반란에 시민 전체가 가담했다고 보는 것은 아테네의 이익에도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핵심은 분노가 아니라 실제 결과를 기준으로 판단하자는 것이었다.
표결 결과 디오도토스의 주장이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였다. 두 번째 배는 첫 번째 명령을 취소하기 위해 밤낮으로 노를 저었고, 처형 직전에 미틸레네에 도착하였다. 반란을 주도한 약 1천 명은 처형되었지만 성인 남성 전체를 죽이라는 명령은 철회되었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은 민주주의의 위험과 회복 가능성을 함께 보여 준다. 민회는 분노 속에서 집단 처형을 결정했지만, 바로 다음 날 토론을 다시 열어 그 결정을 수정하였다.
선동정치의 5가지 구조적 특징
이 사건에서 선동의 첫 번째 특징이 드러난다. 선동은 복잡한 문제를 하나의 적과 하나의 해답으로 줄인다. 미틸레네 반란에는 지도자와 일반 시민, 적극 가담자와 소극적 동조자, 아테네에 협조한 사람과 반대한 사람이 함께 존재하였다.
그러나 선동의 논리는 이 차이를 지운다. 도시 전체가 배신했으므로 도시 전체를 처벌해야 한다는 식이다. 개인의 책임을 따지는 일은 번거롭고, 집단을 하나로 묶어 적으로 만들면 분노를 모으기 쉽다.
두 번째 특징은 두려움의 이용이다. 선동가는 현재의 위험을 실제보다 크게 만들고,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면 공동체가 무너질 것처럼 말한다.
“지금 강하게 처벌하지 않으면 모든 동맹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지금 나를 지지하지 않으면 국가가 적에게 넘어간다”는 식이다. 위험이 크다고 느낄수록 시민은 절차와 증거를 사치로 여기기 쉽다. 반대 의견은 정책의 차이가 아니라 안보를 위협하는 행동으로 취급된다.
세 번째 특징은 즉각적인 결정을 강요하는 것이다. 선동은 숙고할 시간을 싫어한다. 시간을 두면 사실을 확인하고 비용을 계산하며 다른 해법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동가는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늦는다고 말한다.
반면 디오도토스가 요구한 것은 재검토였다. 한 번 결정했으니 체면 때문에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그 결정이 실제로 아테네에 도움이 되는지를 다시 판단하자는 것이었다.
네 번째 특징은 언어의 변화이다. 선동가는 잔혹함을 결단력이라 부르고, 신중함을 비겁함이라 부른다. 타협은 배신이 되고, 반대는 적과의 내통이 되며, 절차를 지키자는 요구는 개혁을 방해하는 행위가 된다. 같은 행동도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시민의 판단이 달라진다. 선동정치는 사실을 바꾸기 전에 사물을 부르는 말을 바꾼다.
투키디데스는 코르키라 내전을 서술하면서 이 현상을 날카롭게 기록하였다. 내전 속에서 사람들은 행동의 이름을 자기 편의에 맞게 바꾸었다. 무모한 공격은 동료를 위한 용기가 되었고, 신중함은 비겁함이 되었으며, 절제는 남자답지 못한 태도로 취급되었다.
정치적 갈등이 극단으로 가면 사람들은 사실보다 진영의 이름표로 행동을 판단한다. 같은 폭력도 우리 편이 하면 정의가 되고 상대편이 하면 범죄가 되는 것이다.
선동정치의 다섯 번째 특징은 자신을 국민과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지도자는 “내 주장이 국민에게 지지를 받는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내가 곧 국민의 목소리”라고 말한다. 이때 지도자를 비판하는 사람은 정책 반대자가 아니라 국민의 적이 된다. 의회와 법원, 언론과 관료제가 지도자의 뜻을 제약하면 그것도 국민의 뜻을 가로막는 기득권으로 몰린다.
언어의 타락과 집단적 열광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법이 지배하지 않고 민회의 결의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민주정에서는 선동가가 힘을 얻는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참주 곁의 아첨꾼과 민주정의 선동가를 비교하였다. 참주에게 아첨꾼이 필요하듯 법을 잃은 민주정에서는 선동가가 민중의 욕망에 아첨한다는 것이다. 선동가는 법보다 민회의 즉석 결정을 앞세우며, 민중을 집단적인 군주처럼 만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나아가 고대의 여러 참주가 본래 민중의 지도자였다고 기록하였다. 군사 지휘권과 대중적 인기를 함께 가진 선동가가 부유층을 공격하며 민중의 신뢰를 얻고, 그 힘으로 참주가 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민주정의 지도자가 민중의 보호자를 자처하다가 견제를 받지 않는 권력자로 변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그렇다고 모든 강한 지도자를 선동가라고 부를 수는 없다. 지도력이 강하다는 것과 포퓰리즘은 다른 문제이다. 위기 때 결단을 내리고, 반대가 있어도 필요한 정책을 추진하며, 시민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지도자는 오히려 선동가와 반대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선동가는 시민에게 듣기 싫은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비용은 감추고 혜택만 약속하며, 실패의 책임은 언제나 적이나 엘리트에게 돌린다.
복지정책과 포퓰리즘도 구별해야 한다. 정부가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의료와 교육에 재정을 사용하는 것은 현대 국가의 정상적인 기능이다. 반대로 세금을 낮추고 규제를 완화하는 정책도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재원과 효과, 부작용을 공개하고 의회와 법률의 절차를 거쳐 시행한다면 그 자체를 포퓰리즘이라고 부를 근거는 약하다.
정책이 포퓰리즘으로 변하는 것은 비용을 숨기고 모든 사람에게 혜택만 줄 수 있다고 주장할 때이다. 재정에는 한계가 있고, 어떤 선택에는 다른 선택을 포기하는 비용이 따른다.
그러나 선동가는 시민에게 선택의 대가를 설명하지 않는다.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돈을 만들 수 있고, 부유층이나 외국인 또는 부패한 기득권의 재산을 가져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한다. 반대하는 전문가는 국민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으로 몰린다.
선동가는 경제적 불안을 정치적 분노로 바꾸는 데 능하다. 실업과 빈곤, 주거 불안과 지역 격차가 커지면 시민은 기존 제도에 실망한다. 이때 포퓰리즘은 실제 문제를 발견한다. 그래서 포퓰리즘의 모든 문제 제기가 거짓인 것은 아니다.
기존 정당과 행정기관이 시민의 고통을 외면했기 때문에 포퓰리즘이 성장하는 경우도 많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바깥에서 갑자기 침입하는 병이라기보다 민주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불만을 먹고 자라는 정치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문제를 발견했다는 사실이 그 해법까지 옳다는 뜻은 아니다. 포퓰리즘은 복잡한 원인을 하나의 적에게 돌린다. 경제가 나쁜 것은 부패한 정치인 때문이고, 일자리가 줄어든 것은 외국인 때문이며, 개혁이 실패한 것은 관료와 법원이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국민은 언제나 선하고 지도자도 국민과 하나이므로 실패의 책임은 반드시 다른 곳에 있어야 한다.
이 구조에서는 자기 교정이 어렵다. 민주정치의 정책은 실패할 수 있으며, 정부는 잘못을 인정하고 수정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을 순수한 국민의 대표라고 주장한 지도자는 실패를 인정하기 어렵다.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하면 국민의 일반의지가 틀렸다고 말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패할수록 더 큰 적을 만들고, 더 강한 권력을 요구하며, 더 많은 기관을 국민의 적으로 규정하게 된다.
포퓰리즘은 좌파와 우파 어느 한쪽의 전유물이 아니다. 좌파 포퓰리즘은 사회를 순수한 민중과 탐욕스러운 자본가로 나눌 수 있고, 우파 포퓰리즘은 진짜 국민과 외국인·소수자·세계주의 엘리트로 나눌 수 있다.
사용하는 적의 이름은 다르지만 정치 구조는 비슷하다. 국민을 하나로 만들고, 내부의 차이를 부정하며, 자신만이 그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현대 연구에서 포퓰리즘을 ‘얇은 중심 이념’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포퓰리즘 자체에는 완전한 경제정책이나 사회철학이 없으며 사회주의, 민족주의, 보수주의 같은 다른 이념과 결합해 나타날 수 있다.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와 전혀 관계없는 것도 아니다. 포퓰리즘은 잊힌 시민의 불만을 정치권으로 끌어들이고, 굳어진 정당 체제에 경쟁을 일으키며, 기득권의 부패를 드러낼 수 있다. 정치에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이 투표와 집회에 참여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결함을 보여 주는 경고음이 될 수 있다. 관련 연구도 포퓰리즘이 정치 참여를 높일 가능성을 인정한다.
문제는 그 경고음이 권력을 잡은 뒤이다. 포퓰리즘 세력이 자신도 여러 정치세력 가운데 하나라고 인정한다면 민주주의 안에서 경쟁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만이 국민을 대표한다고 믿으면 야당은 정당한 경쟁자가 아니라 부패한 적이 된다.
법원은 독립기관이 아니라 개혁을 방해하는 세력이 되고, 언론은 비판기관이 아니라 거짓을 퍼뜨리는 집단이 되며,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시민은 속았거나 국민이 아닌 사람으로 취급된다.
이때 선동은 제도를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 국회가 법안을 막으면 국민의 뜻을 거역한다고 말하고, 법원이 위법성을 판단하면 선출되지 않은 판사가 국민 위에 군림한다고 말한다.
언론이 의혹을 제기하면 기득권의 음모라고 주장한다. 각 기관이 실제로 잘못할 수는 있다. 그러나 모든 견제기관을 하나의 적대 세력으로 묶는다면 권력자는 자신을 제약할 장치를 차례로 제거할 수 있다.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은 선동과 집단적 열광이 국가적 판단을 흐린 또 다른 사례이다. 기원전 415년 아테네는 시칠리아의 세게스타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대규모 원정을 논의하였다.
시라쿠사 해전의 모습.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인 기원전 413년 아테네는 시칠리아 원정을 감행해 시칠리아의 도시 시라쿠사에서 전투를 벌인다. 니키아스는 시칠리아의 규모와 거리, 필요한 병력과 비용을 설명하며 신중한 판단을 요구하였다. 반면 알키비아데스는 원정을 통해 아테네의 영광과 세력을 넓힐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시민들은 원정의 위험보다 승리와 확장의 기대에 끌렸다.
니키아스는 원정을 막기 위해 필요한 병력과 물자가 매우 많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의 경고는 오히려 시민들에게 원정이 철저히 준비되었다는 믿음을 주었다.
투키디데스는 젊은이들은 먼 땅을 보고 이익을 얻을 희망에 들떴고, 일반 시민들은 당장의 급료와 장래의 제국 확장을 기대했다고 기록하였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비겁하거나 아테네의 성공을 시기하는 사람으로 보일까 두려워 침묵하였다.
이 원정은 기원전 413년 아테네군의 파멸로 끝났다. 함대와 병력의 상당 부분을 잃은 시칠리아 원정은 아테네의 전쟁 수행 능력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투키디데스 원문은 이 원정의 토론과 패배 과정을 제6권과 제7권에 기록한다.
시칠리아 원정에서 주목할 것은 시민들이 아무 정보도 없이 속았다는 점만이 아니다. 위험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존재했지만, 성공에 대한 집단적 기대가 반론을 밀어냈다는 점이다.
선동이 힘을 얻는 사회에서는 거짓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이 믿고 싶어 하는 이야기만 살아남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지도자는 그 욕망을 읽어 말로 바꾸고, 군중은 그 말을 자신의 의지라고 받아들인다.
제도적 견제와 언론·법원의 역할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기사’는 당시 아테네의 선동정치를 풍자한다. 기원전 424년에 공연된 이 작품에서 민중을 상징하는 데모스는 아첨꾼들에게 휘둘리는 노인으로 등장한다. 클레온을 빗댄 가죽 장수와 그보다 더 천박한 소시지 장수가 누가 더 능숙하게 민중에게 아첨하는지를 겨룬다.
작품의 핵심은 선동가 한 사람의 악함만이 아니다. 더 심한 아첨꾼을 계속 선택하는 민중도 풍자의 대상이다. ‘기사’에는 ‘데마고기아’라는 말의 초기 용례가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작품은 민주적 지도력이 아첨 경쟁으로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 풍자는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선동가는 시민을 일방적으로 속이기만 하는가? 아니면 시민도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지도자를 선택하는가? 선동정치는 정치인의 기술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책임 없는 혜택, 고통 없는 개혁, 희생 없는 승리를 믿고 싶어 하는 시민의 욕망과 만날 때 성장한다. 선동가와 군중은 서로를 만든다.
그러므로 포퓰리즘을 막는다는 이유로 대중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시민을 무지한 군중으로 취급하면 엘리트주의가 되고, 정치 불신은 더 커진다. 민주주의의 답은 국민의 목소리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그 목소리가 토론과 사실 확인을 거쳐 정치적 판단으로 발전하게 하는 데 있다. 시민이 참여하되 즉흥적 분노가 곧바로 법이 되지 않도록 절차를 두어야 한다.
첫째, 정치인은 정책의 이익뿐 아니라 비용도 설명해야 한다. 어떤 복지에는 재원이 필요하고, 어떤 안보정책에는 위험이 따르며, 어떤 개혁에는 손해를 보는 집단이 생긴다. 책임 있는 지도자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선동가는 모든 고통을 적에게 떠넘기지만, 지도자는 시민에게 선택의 대가를 말한다.
둘째, 반대자를 국민의 적으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야당과 비판 언론, 반대 시민은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다. 정책 경쟁을 가능하게 하는 구성원이다. 포퓰리즘을 가르는 핵심 질문은 무엇을 주장하느냐만이 아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여전히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하느냐이다.
셋째, 숙고의 시간을 지켜야 한다. 의회의 심의, 공청회, 언론의 검증, 법원의 판단은 답답하고 느려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일부러 느린 절차를 만든 데에는 이유가 있다. 미틸레네 민회가 다음 날 다시 토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집단 처형을 막을 수 있었다. 민주주의에서 재검토는 나약함이 아니라 오류를 줄이는 힘이다.
넷째, 시민교육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제8권에서 어떤 정체도 그 정체에 맞는 시민의 성품과 교육 없이는 유지되기 어렵다고 보았다. 민주정의 제도만 갖추고 시민에게 사실을 판단하는 능력, 반대 의견을 듣는 습관,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태도를 가르치지 않으면 제도는 쉽게 선동가의 도구가 된다.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차이는 국민을 존중하느냐에 있지 않다. 둘 다 국민을 말한다. 차이는 국민을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서로 다른 생각과 이해관계를 가진 복수의 시민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포퓰리즘은 국민에게 하나의 참된 의지가 있으며 자신이 그것을 독점한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는 반대자를 설득해야 할 시민으로 보지만, 포퓰리즘은 제거해야 할 가짜 국민으로 본다.
선동과 지도력의 차이도 말의 힘에 있지 않다. 페리클레스도 뛰어난 연설가였고 클레온도 뛰어난 연설가였다. 차이는 시민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느냐, 시민이 알아야 할 말을 하느냐에 있다. 선동가는 군중의 감정을 따라 권력을 얻고, 지도자는 때로 군중의 감정에 맞서 공동체의 장래를 지킨다.
민주주의는 말의 정치이다. 칼과 총이 아니라 토론과 연설, 투표로 국가의 결정을 내린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말의 힘으로 성장하지만 말의 타락으로 무너질 수도 있다. 분노를 사실처럼 만들고, 적대감을 정의처럼 꾸미며, 지도자의 욕망을 국민의 뜻이라고 부를 때 선동은 민주주의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포퓰리즘의 위험은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데 있지 않다. 국민이라는 이름을 특정 지도자와 진영이 독점하는 데 있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원한다”는 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누가 국민을 정의하는가? 반대하는 시민도 국민으로 인정되는가? 그 국민의 뜻은 어떤 토론과 절차를 거쳐 확인되었는가? 이 질문이 사라지는 곳에서 포퓰리즘은 힘을 얻는다.
그렇다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얻고 국민의 지지를 받는 지도자를 독재자라고 부를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강한 통치와 독재는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 松山(송산) 정광제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