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도 없고 위험 감수도 안 하려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분노가 아니다. 파도에 부서지는 모래성이다.
분노는 공감을 얻을 때 비로소 힘이 생긴다. 혼자 화를 내는 것은 감정이지만, 여러 사람이 그 분노의 이유를 이해하고 자신의 문제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것은 사회적 힘이 된다. 그래서 세상을 움직인 분노에는 언제나 공감이 뒤따랐다.
부당한 일을 당한 한 사람의 외침이 수백 명, 수천 명의 마음을 움직일 때 분노는 여론이 되고 행동이 되며 때로는 제도까지 바꾼다.
그런데 분노도 있고 공감도 있는데 힘이 생기지 않을 때가 있다.
사람들은 화가 났다고 말한다. 주변 사람들도 맞는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와 격려가 넘친다. 그런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행동은 없고 위험을 감수하려는 사람도 없다. 며칠 지나면 모두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그 분노는 정말 분노였는가? 그 공감은 정말 공감이었는가?
분노에는 비용이 따른다. 시간을 내야 하고, 자신의 이름을 걸어야 하며, 때로는 인간관계나 이해관계의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
입으로만 “화가 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몫으로 돌아오는 작은 불편조차 피한다면 그것은 분노가 아니라 감정의 소비다. 남들이 화를 내니까 함께 흥분하고, 유행이 지나가면 다른 문제로 옮겨가는 분노는 오래갈 수 없다.
불꽃은 크지만 장작이 없는 불과 같다. 공감도 마찬가지다.
진짜 공감은 “당신 말이 맞습니다”라는 말에서 끝나지 않는다. 상대의 분노가 왜 생겼는지 이해하고, 그 문제가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고 받아들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공감한다면서 정작 책임과 부담을 나눌 때 뒤로 물러선다면 그것은 공감이라기보다 예의상 보내는 박수다. 박수는 소리를 만들지만 세상을 움직이지는 못한다.
그래서 분노와 공감이 함께 있는데도 아무런 힘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둘 중 하나를 의심해야 한다. 어쩌면 둘 다 의심해야 할지도 모른다. 분노가 가짜이거나, 공감이 거짓이거나..
진짜 분노와 진짜 공감이 만나는 곳에서는 반드시 무엇인가 움직인다. 사람이 모이고, 말이 행동으로 바뀌고, 행동이 힘을 만든다.
분노의 진위는 목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치르는 비용으로 드러나고, 공감의 진위는 박수의 크기가 아니라 함께 짊어지는 무게로 드러난다.

◆ 松山(송산) 정광제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 ‘문학의 세계와 사상’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