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에 가려진 450조 원의 진실. 보도자료와 공시 사이, 책임의 경계는 어디인가 [그래픽=한미일보]
삼성전자가 11월16일 ‘향후 5년간 450조 원 국내 투자’라는 대규모 계획을 보도자료 형태로 발표한 이후 ‘정당성’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대다수 한국 언론은 이를 기업의 공격적 투자 의지로 소개했다. 하지만 발표 형식과 시점, 절차와 내용, 그리고 있어야 할 설명들이 빠져 있는 것에 주목해 보면 따지고 질문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다.
이날 공개된 내용은 450조 원이라는 구체적 투자 금액과 항목·기간이 명시돼 있어 사실상 ‘확정 정보’로 받아들여지며 법적 공시의 범주로 해석될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한국거래소의 공시 규정 제7조와 시행세칙 제6조에는 ‘설비투자, 대규모 투자, 경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계획’의 경우 수시공시 대상으로 명시돼 있다.
450조 원이라는 규모, D램(DRAM·동적 메모리)과 HBM(고대역폭 메모리) 생산라인 확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구축, 6만 명 채용과 같은 구체적 정보는 수시공시 요건에 해당할 개연성이 크다.
공시 위반 여부는 한국거래소→금융감독원→법원을 거쳐 최종 판단되지만 한국 특유의 정치적 재량이 작동하는 환경까지 고려하면 결과를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가장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왜 공시해야 할 내용을 보도자료로 대체했는가?”
정권의 정책적 압박 또는 정치적 일정과의 조율이 있었을 경우 공시는 기업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이사회 승인 여부, 확정·잠정 여부, 미래전망 고지 의무 등의 책임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반면에 보도자료는 그런 부담이 없다. 오히려 발표 시점과 메시지 통제가 용이해 정치적 활용도도 높다. 이번 발표가 보도자료로 처리된 배경이 의심되는 이유다.
<한미일보>는 이와 관련해 다음 7가지 사항에 관한 질의를 서면에 담아 삼성에 보내고 답변을 요청했다.
△ 450조 원이라는 규모가 확정 사항인지 전망인지
△ 이사회 승인 여부
△ 투자 항목의 구체성과 집행 기준
△ 미래전망 공시(향후 실적, 계획, 예상되는 위험 등의 정보 발표)에 대한 면책 규정(safe harbor) 적용 여부
△ 정부·대통령실과의 사전 협의 또는 교감 여부
△ 6만 명 채용의 확정성
△ 발표 시점에 관한 내부 판단의 근거
그러나 삼성의 공식 답변은 단 한 줄이었다. “답변드릴 수 있는 내용이 없다.”
이 침묵은 단순한 회피라기보다 보도자료 형식이 만들어낸 구조적 역설과 깊게 연결돼 있다.
보도자료는 법적 공시가 아니므로 기업은 자유롭게 내용을 조정하거나 배포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이 시장에서 ‘확정 정보’처럼 작동하는 순간 공시와 유사한 효력을 가지게 된다. 즉, 공시의 부담은 피하고 효과는 얻는 형태다.
반대로 기자들의 후속 질문에 조금이라도 구체적 설명을 덧붙이는 순간 이번 발표는 ‘적극적 공시 행위’로 간주돼 규제 영역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이사회 승인 여부, 투자 확정성, 위험 요인 기재 의무 등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삼성으로서는 말을 아끼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를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역설적 구조는 삼성의 침묵을 만들어냈고, 그 침묵의 비용은 자연스럽게 투자자에게 전가되는 중이다.
450조라는 수치 자체도 의문이다.
삼성의 연평균 국내 투자 규모는 40~50조 원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번 발표에 언급된 수치는 5년간의 투자액을 두 배 가까이 끌어올린 수준이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회복 국면에 들어섰다 해도 초호황이 재개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게 팩트인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더구나 기업을 상대로 한 정부의 정책적 투자 압박과 시장의 기대가 교차하는 시점에 이러한 투자 계획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정치적 배경을 의심하게 한다.
보도자료엔 반도체, AI 데이터센터, 전고체 배터리, 지역 개발 등의 세부 항목이 제시돼 있지만 계획의 확정·잠정 여부, 기준 가정, 집행 조건 등에 관한 필수 정보는 빠져 있다. 하지만 시장은 이를 확정된 투자 계획으로 받아들였고, 정부는 정책 성과로 홍보했다. 피해가 생긴다면 그건 ‘개미’들의 몫이다.
한국의 사례에 이어 해외 기준을 살펴보면 문제는 더 명확해진다.
삼성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나 영국 금융감독청(FCA)의 직접적인 규제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핵심은 규제 적용 여부가 아니다. 문제는 ‘이 정도 수준의 확정형 정보라면 선진시장에서는 보도자료가 아니라 공시가 원칙’이라는 점이다.
미국 SEC는 대규모 투자 계획, 차입·설비 확충 등 회사의 미래 재무 상태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정보는 수시 보고서(Form 8-K)나 분기 보고서(Form 10-Q)를 통해 공개하도록 요구하며, 미래 전망 정보가 포함될 경우 반드시 이에 대한 면책 규정(safe harbor) 조항을 명시하도록 하고 있다.
영국 FCA 역시 주가 민감 정보는 공시 채널(RNS)을 통해 공식적으로 공시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보도자료만으로 대규모 수치를 발표하는 것은 FCA 기준에 부합한다고 할 수 없다. FCA는 특히 기업이 시장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미래 정보를 제시할 경우 위험 요인을 고지하고 불확실성에 대한 내용을 기재할 것을 의무 사항으로 요구한다.
유럽연합(EU)의 시장 남용 규정(MAR) 역시 ‘중요 정보는 지체없이 공시’할 것을 원칙으로 정하고 있으며, 발표의 형식이 아니라 정보의 성격으로 공시 의무 여부를 판단한다.
한마디로 말해 해외 주요 시장에서는 이 같은 대규모 투자 발표는 원칙적으로 공시 절차를 통해 이뤄지며, 공시가 아닐 경우 미래 전망이나 위험 요인에 대한 언급이 필수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이 기준에서 보면 삼성의 발표는 글로벌 통례와 비교해도 매우 이례적 방식이다. 책임 규정 없이 숫자만 던지고, 원칙적으로 요구되는 위험 경고 문구도, 투자 확실성에 대한 전제도 명시하지 않았다. 선진시장 관점에서 보면 이는 분쟁·오해·집단소송의 리스크를 안고 있는 발표다.
금융 선진국의 경우 절차나 규제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지만, 한국은 판단에 대한 기관의 재량권이 넓다 보니 정경유착 내지는 권력의 압력이 개입할 공간이 큰 셈이다.
정권이 대규모 투자 발표를 요청하고, 기업이 보도자료 방식으로 이에 호응하는 정치·경제적 관행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이번 발표 역시 특정 정치적 타이밍과 맞물려 있어 ‘정부나 대통령실과의 사전 소통 여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정치적 해석 이전의 문제이며, 경제와 시장의 투명성을 위해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삼성은 이 질문에 대해서도 역시 답하지 않았다.
삼성은 해외 상장사처럼 미국식 집단소송의 직접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집단소송의 ‘가능성’이 아니라, 선진시장에서는 이 정도 규모의 발표가 보도자료를 통해 이뤄졌을 때 실제로 집단소송이 제기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시장 신호와 실제 계획이 어긋날 경우 기업에 책임을 묻는 것이 상식적 구조이기 때문이다.
결국 ‘책임의 공백’은 다시 최약자인 개인투자자에게 향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이라면 이익만 취하고 책임은 피해 가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이번 발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관행을 타파하지 않고 시장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권–대기업–언론으로 이어지는 이 오래된 구조를 바로잡는 일이며, 이번 사안은 그 출발점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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