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의미는 영혼의 눈뜸, 각성, 새로운 영적인 삶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될 수 있다.
지난 4월5일은 식목일이면서 부활절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된 후 사흘 만에 부활한 사건을 기리는 날이다.
부활절은 개신교와 가톨릭 공통의 명절이며, 부활은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새 생명을 얻은 것을 기리는 날이라고 한다.
‘부활’의 의미는 영혼의 눈뜸으로 확장된다
새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이 이 깊은 뜻을 헤아리기는 어렵다. 기독교 신자라면 죽음에서 깨어난 이 사건을 실제로 있었던 일로 믿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를 사실로 믿음으로써 기독교적 신앙의 세계에 비로소 들어서는 것이라고 간주될 것이다.
‘부활’의 의미는 여기서 확장되어 영혼의 눈뜸, 각성, 새로운 영적인 삶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이해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레프 톨스토이(1828.9.9~1910.11.20) 말년의 소설 ‘부활’(1899)이 자주 언급된다.
언젠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부활’의 주인공은 드리트리 네흘류도프다. 귀족인 네흘류도프는 귀족적 특권의 하나로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한다. 그날의 재판에 불려 나온 이는 카츄사 마슬로바. 그녀는 부유한 상인을 독살한 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네흘류도프는 매춘부로 전락하여 독살 혐의까지 받고 있는 카츄샤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군인이었던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낸 네흘류도프는 여러 여자의 신세를 망쳐놓았고, 순진한 하녀로 네흘류도프의 아이를 임신한 채 버림받은 카츄샤가 그 하나였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이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강렬한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어떻게든 카츄샤를 도와야겠다고 결심한 네흘류도프는 카츄샤의 누명을 벗겨주려 하지만 끝내 실패한다. 카츄샤가 종신형이나 다름없는 시베리아 유형형을 선고받자 네흘류도프는 재산을 정리하고 그녀를 따라나선다. 당시에는 유형을 떠나는 죄수를 가족·친지가 따라갈 수 있었던 모양이다.
이에 그치지 않는다. 네흘류도프의 결의는 자신의 삶에 대한 총체적 성찰, 각성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삶 전체가 총체적 부정 위에 성립해 있음을 깨달은 그는 유형의 길 도중에 자기 소유의 땅들을 모두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기까지 한다. 노동하지 않는 자는 소유하지도 않아야 한다는 이 사상은 당시 러시아 귀족 인텔리들의 염결한 성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네흘류도프의 각성은 삶에 대한 새로운 눈뜸 그 자체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작가 이광수의 장편소설 ‘재생’(동아일보, 1924.11.9.~1925.9.28.)은 이 톨스토이 사상과의 교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재생(再生)’이라는 것은 곧 부활로 통하는 것이 아니던가?
‘재생’은 정신적 가치를 회복하는 일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삼일운동 세대다. 1919년 3·1운동의 실패는 한편으로 투쟁하던 젊은이들의 망명 사태를 낳았고 다른 한편으로 좌절·절망을 넘어 ‘배교’와 타락을 낳았다. 그리고 자주 독립의 이상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고, 출세와 돈, 욕망을 추수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재생’의 순영은 이를 대표하는 인물로 설정된 것이었다. 인천 미두시장에 뛰어든 봉구가 독립운동과 관련된 누명을 쓰고 재판에 회부되는 등 고초를 겪는 것을 알게 된 순영은 그가 무죄임을 증명하려고도 고민하나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여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 재판 광경은 이 소설이 톨스토이의 ‘부활’에 연결됨을 보여준다.
이제 순영은 타락과 번민 속에서 백윤희의 딸을 출산하는데 안타깝게도 딸은 눈이 먼 채 태어난다. 마지막으로 봉구를 찾아가기도 했던 순영은 봉구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하고 끝내 죽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구제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금강산을 찾아가 깊은 구룡연에 몸을 던지고 만다.
봉구는 순영의 편지를 받고 뒤늦게 순영을 찾아가나 이미 때는 늦었다. 순영의 죽음 앞에서 봉구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생명이 자기에게 의탁하려 했던 것을, 구해주지 않은 자신을 무정한 사람이라 자책해 마지않는다.
‘부활’과 ‘재생’은 사람이 다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한다. 그것은 물질적·육체적 욕망을 따르던 삶을 버리고 순수한 삶을, 이상적이고도 정신적인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다. 진실을 깨닫는 고통을 감수하고 안락함을 버리고 기꺼이 옳은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을 되돌리는 것이다. 회심하여 옳은 것을 옳게 보려, 따라야 할 것을 따르려 애쓰는 것이다.
부활절에 즈음하여 그분이 옥중 메시지를 내셨다기에 찾아본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해서 고난의 십자가 사역을 완수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면 자유와 진리로 이 땅이 완전히 회복될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지금의 시기가 어렵고 힘들더라도 고난에 순종하면서 저 구원의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부활 주일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리라.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일서 5장4절)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면 자유와 진리로 이 땅이 완전히 회복될 것이다. 그분은 현실을 직접 지시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땅의 현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말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할 것이다.
이 봄은 와서 서울에도 벚꽃이 활짝 피었다. 하지만 진짜 봄이 오기까지는 봄이 아니다. 춥디추운 봄은 진짜 봄이 아니다.

◆ 방민호 교수
문학박사, 서울대 국문과 교수. 계간문학잡지 ‘맥’ 편집주간(2022년~)이자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저서로 ‘연인 심청’(2015), ‘통증의 언어’(2019), ‘한국비평에 다시 묻는다’(2021), 서울문학기행(202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