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확인보다 규정이 먼저였다
이재명 대통령이 10일 자신의 X 계정에 이스라엘군 관련 영상을 공유하며 “유대인 학살”과 “전시 살해”를 함께 언급한 것은 단순한 우려 표명이 아니었다.
이 대통령은 “이게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어떤 조치가 있었는지 알아봐야겠다”고 적으면서도, 동시에 그 장면을 “유대인 학살”과 “전시 살해”의 언어로 끌어올렸다.
확인은 뒤로 미루고 규정은 먼저 내린 셈이다.
그러나 뒤이어 확인된 원사건의 맥락은 훨씬 좁고 구체적이다.
Reuters 보도에 따르면 문제의 장면은 현재 전쟁에서 막 벌어진 새 영상이 아니라 2024년 9월 서안지구 카바티야에서 촬영된 것으로, 이스라엘군 병력이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시신을 지붕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는 모습이었다. 이스라엘군도 당시 이를 자국 가치에 어긋나는 심각한 사안으로 보고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비판받아야 할 부적절한 시신 처리 논란인 것은 맞지만, 이를 곧바로 “전시 살해”라고 부르고 다시 “유대인 학살”의 언어로 연결하는 순간 사실 설명은 사라지고 인상 규정만 남는다.
홀로코스트와는 다른 층위다
바로 여기서 핵심 비판이 성립한다. 홀로코스트는 국가권력이 제도와 행정, 군사력을 총동원해 특정 집단을 계획적으로 절멸시킨 집단학살이다. 반면 이번 영상은 전시 현장에서 벌어진 일개 부대 차원의 시신 훼손 논란이다. 둘 다 인간 존엄을 해친 장면이라는 추상적 공통점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구조와 규모, 계획성, 국가권력의 개입 양상은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이재명 대통령은 그 차이를 지우고 곧바로 홀로코스트의 언어를 가져왔다. 이것은 인권 감수성의 확대가 아니라 비교의 무너짐이다.
‘전시 살해’라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다.
이 말은 중립적 서술이 아니다. “전시”는 전쟁 전체를 호출하고, “살해”는 고의성과 책임을 사실상 단정한다. 둘을 결합하는 순간 독자는 자연스럽게 계획적 전쟁범죄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뒤에 드러난 맥락이 2024년 사건의 시신 훼손 논란이었다면, 이 표현은 객관적 설명이라기보다 인상을 먼저 심는 과잉 규정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왜 북한·이란이 떠오르나
북한과 이란은 여기서 직접 비교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이번 사건이 왜 그런 질문을 함께 불러오느냐가 중요하다.
유엔 인권기구는 올해 3월에도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해 지속적인 책임 규명과 국제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이란에 대해서도 자의적 살해, 고문, 성폭력, 자의적 구금, 강압적 자백 문제를 지적했다. 로이터(Reuters) 역시 올해 4월 이란 당국의 사형 집행과 고문·불공정 재판 논란을 전했다.
이런 사안들은 체제와 권력이 구조적으로 인간을 짓밟는 경우다. 그래서 이번 장면을 본 사람들이 “왜 대통령은 이런 구조적 인권유린에는 이 정도의 즉각적이고 무거운 언어를 잘 쓰지 않느냐”고 묻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질문은 필자의 문제 제기이기도 하고, 기사 댓글과 온라인 반응에서 반복되는 흐름이기도 하다.
뒤늦은 설명으론 부족하다
더구나 논란 뒤에 붙인 설명도 본질을 바꾸지 못했다. 연합뉴스 보도대로 이 대통령은 이후 추가 게시물에서 해당 영상이 2024년 9월 발생한 실제 상황이며 백악관도 당시 “매우 충격적”이라고 평가했던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처음 게시물은 이미 “전시 살해”와 “유대인 학살”이라는 가장 무거운 인상을 먼저 전달했다. 뒤늦은 설명은 그 파급력을 되돌리지 못했다.
대통령의 SNS는 개인 감상문 공간이 아니라 사실상 외교 채널이다. 그런 채널에서 사실 확인보다 도덕적 흥분이 먼저 나오고, 뒤늦은 보완 설명으로 수습하려 했다면, 그것은 신중한 인권 발언이 아니라 구차한 변명으로 읽히기 쉽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지난 1월 말 이재명 대통령은 캄보디아 스캠 범죄 관련 기사를 공유하며 캄보디아어로 “한국인을 건들면 패가망신”이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고, 이어 2월에는 캄보디아 측이 주캄보디아 한국대사를 통해 그 의미를 문의한 뒤 해당 게시물이 삭제됐다.
외교부는 이를 공식 항의나 초치가 아닌 통상적 소통이라고 설명했지만, 대통령의 SNS가 외교적 해석과 파장을 낳는 채널이라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그때도 이번에도 대통령은 개인적 분노의 언어와 국가 메시지의 경계를 가볍게 넘나들었다.
민주당 기준으로도 충돌한다
이 대목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자기모순도 드러난다.
남의 게시물과 발언에는 허위조작정보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대면서, 정작 대통령의 발신에는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면 그것은 원칙이 아니라 편의다.
사실관계가 확정되지 않은 영상에 가장 자극적인 해석과 가장 무거운 규정어를 먼저 얹고, 논란이 커지자 맥락 설명을 덧붙이는 방식은 민주당이 평소 말해 온 허위조작정보 대응 논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남이 하면 가짜뉴스이고, 자신이 하면 인권 감수성인가. 남의 게시물은 문제 삼으면서 대통령의 과잉 발신에는 다른 잣대를 들이댄다면, 그것은 원칙이 아니라 자기편 예외주의일 뿐이다.
결국 이번 논란의 본질은 단순하다.
직접 비판해야 할 것은 이재명 대통령이 검증 안 된 영상에 홀로코스트의 언어를 얹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장면은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왜 북한과 이란의 구조적 인권유린에는 이 정도의 즉각적이고 강한 도덕 언어가 잘 등장하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인권을 말하려면 비교의 무게부터 정확해야 한다. 팩트를 말하려면 자기편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이번 사건이 드러낸 것은 이재명 대통령의 경솔함만이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식 가짜뉴스 정치의 선택적 원칙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