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8월15일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언하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
이재명 대통령은 19일 4·19 66주년 기념식에서 이승만이 영구 집권의 욕망에 사로잡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짓밟고 부정선거를 획책했으며 “4·19혁명 불과 1년 뒤 군부 세력의 쿠데타가 벌어졌고 4·19 민주 이념의 토양 위에서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자 세계를 선도하는 문화 강국으로 눈부신 도약과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주사파 근거지인 경기동부연합과의 연계 의혹을 받는 이재명의 역사 인식이며 무지한 대중을 상대로 한 종북좌파의 선전 선동용 역사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유세 도중 병환으로 미국 워싱턴 D.C. 육군병원에 입원했으나 사망한 상태에서 단독 후보로 당선이 확정된 이승만이 자신의 영구 집권을 위해 부정선거를 지휘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현재 대한민국 번영의 토대는 4·19의 결과 집권한 무능하고 부패한 장면 총리의 민주당 정권이 아니라 민주당이 초래한 시위 공화국의 국가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1년 뒤 등장한 박정희의 5·16혁명이다.
5·16은 기술적으로 쿠데타이나 결과는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을 능가하는 성공한 혁명이다. 이재명과 민주당은 지난 20여 년의 부정선거 의혹의 중심에 있다. 지금은 4·19의 원인인 66년 전 3·15 부정선거를 얘기할 때가 아니라 2020년 총선에서 벌어진 4·15 부정선거와 그 후의 부정선거 의혹에 문제를 제기하고 수사와 재판을 해야 할 때이다.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이 당선된 대통령선거와는 관계가 없다. 조병옥 병사로 이미 당선이 확정된 이승만이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없으며 야당인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가 당선되어도 정권이 바뀌는 게 아니다.
미국의 러닝메이트 시스템과 달리 따로 실시된 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에 밀리던 자유당 이기붕이 부정선거를 지휘한다. 3·15 부정선거는 이기붕 개인의 일회성 부정행위인 것과 달리 현재의 부정선거 의혹은 민주당과 종북좌파, 그리고 북한과 중국의 개입이 의심되는 사안이며 지난 20여 년 동안 지속된다는 점에서 3·15 부정선거를 훨씬 능가하는 악질적 반국가적 사안이다.
1953년 벤프릿트 장군 접견 오찬 행사에 참석한 프란체스카 여사.
4·19 66주년을 맞아 부정선거 의혹을 규명하겠다고 국민의힘이 대대적으로 캠페인을 해야 하나 장동혁과 국민의힘은 많은 국민의 부정선거 의혹 규명 투쟁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승만이 부정선거를 인지했다는 기록이나 증언은 없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지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이승만은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4·19항쟁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으며 불의를 보고 가만히 있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나 다름없다고 얘기한다.
자신과 관련이 없는 부정선거 때문에 이승만이 하야한 것은 평가해야 할 부분이지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종북좌파 반국가세력이 이승만을 끊임없이 비난하는 이유는 1945년 해방 이후 북한 공산 집단의 집요한 공작과 6·25 남침으로 인한 전쟁의 과정에서 북한 공산당과 남로당, 그리고 그들에게 부화뇌동하고 세뇌된 종북 좌파들을 제어하고 한편으로는 이해관계가 다른 미국 정부와의 목숨을 건 힘겨운 외교전을 벌이며 ‘건국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든 이승만의 역할 때문이다.
종북좌파에게 이승만은 눈엣가시나 마찬가지다. 외교의 귀재이며 투사인 이승만의 건국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6·25 한국전쟁의 역사, 그리고 해방 전후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와 미국의 국내 정치 상황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성립과 성공은 저절로 된 게 아니며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산주의자들에 맞선 처절한 투쟁을 통한 자유민주주의 체제 확립과 산업화, 근대화 노력 덕분이다. 이승만이 국민의힘과 같이 중도 타령으로 적당히 타협했으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발전한 대한민국은 없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마르크스,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 유령이 세계를 휩쓸고 한반도에 상륙해서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거쳐 1945년 해방 이후에도 대부분 사람이 공산주의에 들떠있을 때 이승만은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물리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선각자 이승만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이미 공산화되어 우리는 지금 김정은 치하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산주의 선호가 당시의 국민 눈높이였기 때문이다.
2차 대전 전쟁 영웅인 맥아더도 이승만을 존경했다.
이승만은 1923년 세계가 공산주의 열풍에 휩싸일 때 미국에서 ‘공산당의 당부당’이란 논문을 쓰고 공산주의 사상의 위험성을 설파한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 어디에도 이승만의 선견지명을 능가하는 학자나 정치인이 당시에 없었다. 그것이 자존심 강한 엘리트이며 2차 대전 전쟁 영웅인 맥아더가 이승만을 존경한 이유이다.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은 것 하나만으로도 이승만의 업적은 엄청난 것이다.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베트남에는 공산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중국과 베트남엔 왜 이승만 같은 인물이 없느냐는 한탄이 미국에서 나온다.
이승만이 세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바탕으로 박정희는 잘살아보자는 집념으로 뭉친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집권 19년 동안 대한민국을 세계 최빈국에서 근대화와 산업화 국가로 만드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해방 후 일본이 남긴 공업시설을 바탕으로 남한보다 월등한 국력을 가진 북한을 압도하게 된다. 경제 발전 없는 민주화는 가능하지 않으며 전례도 없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만든 것이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이 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1950년 6월25일 소련과 중공의 지원으로 북한군이 남침을 개시하고 국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다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참전하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9·28서울수복이 이루어진다. 미국은 38선 이북으로 북한군을 몰아낸 후 북진을 하지 않고 소련과 중공의 참전을 우려하며 확전 대신 현상 유지를 원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한국군 단독으로 38선을 넘어 북진하고 미국도 어쩔 수 없이 북진에 동참한다. 국군과 유엔군은 10월19일 평양을 탈환하고 10월 말 중국 국경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한다. 그러나 곧바로 인해전술을 앞세운 수십만 명의 중국군 참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의 후퇴가 시작된다. 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을 우려한 트루먼은 이승만과 맥아더의 만주 폭격 계획을 거부한다.
북한의 남침 직후 유엔군 파병 결의를 위해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거부권을 가진 소련이 참석하지 않은 대외적인 이유는 마오쩌둥의 공산군에게 패퇴 후 대만으로 쫓겨간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대신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 정부가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련은 대만의 안보리 참석을 이유로 계속 안보리에 불참해 왔다.
그러나 비밀 해제된 스탈린 서신에 의하면 소련이 유엔군의 한국전 참전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이유는 모택동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중공의 한국전 참전을 유도하여 한반도에서 미국과의 전쟁을 통해 미국과 중공의 힘을 동시에 빼고 모택동을 계속 소련의 영향력 아래 두고 미국이 유럽에 추가 전력을 투입할 수 없도록 하는 일거양득을 노린 것이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이승만과 맥아더, 그리고 다른 미군 장성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휴전을 강행해 비난을 받았다.
트루먼은 소련과의 유럽 전선에 집중하기 위해 한국전을 제한전으로 결정하고 맥아더의 압록강 철교와 만주 폭격, 중공 해안 봉쇄, 그리고 마오쩌둥과의 국공 내전에서 패배하고 대만으로 쫓겨난 장개석의 60만 대만군의 한국전 참전과 중국 본토 게릴라전을 포함한 중공과의 전면전 계획을 거부하고 맥아더 해임이라는 초강수를 둔다. 맥아더 해임 후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편지를 보낸다.
“한국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귀하의 계획 이외에는 없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귀하의 이름은 세계 역사상 이 시기의 탁월한 지도자 및 정치가로 더욱 빛날 것입니다.” (반광식 역 더글러스 맥아더 ‘맥아더 회고록 2’)
이승만과 맥아더는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이 중공과의 전면전을 통해 중국 공산당을 무너뜨리고 중국에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세울 절호의 기회로 보고 그렇지 않으면 추후엔 소련과 중공의 국력이 커져 종국에는 미국과 자유주의국가들이 공산주의 확장을 막기 힘들 것이라고 본다.
소련이 1949년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으나 개발 초기 단계이며 충분한 실전용 핵무기를 생산하지 못했으며 미국의 압도적인 공군력으로 제공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극동으로의 유일한 보급로인 시베리아 철도를 공습으로 파괴하면 소련의 한국전 참전이 불가하며 중국은 국공내전 이후 공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소련의 군수 지원 없이는 한국전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련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중국 본토 보급기지와 보급로에 대한 공습과 미국의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중국 해안을 봉쇄하면 중공의 해외로부터의 보급마저 차단되어 마오쩌둥은 오래 버틸 수 없고 장제스의 60만 병력을 한국 및 중국 본토에 상륙시키면 미군의 추가 육군 파병 없이 해군과 공군력만으로 마오쩌둥 공산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 맥아더의 전략이다.
맥아더는 한국전을 통해 북한과 중국 공산당을 괴멸하지 않고 미국이 물러나게 되면 다음 차례는 유럽이 될 것이며 소련과 중국의 세계 공산화를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정확히 이승만의 전략과 일치한다.
그러나 국제정세에 무지하고 2차 대전 이후 반전 분위기에 편승한 트루먼은 이승만과 맥아더의 제안을 거부한다.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세계와 중국, 러시아, 북한의 신냉전 구도의 국제정세를 볼 때 70년 앞을 내다본 이승만과 맥아더의 선견지명이 놀랍다.
압록강까지 진출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 이후 남쪽으로 후퇴하고 38선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은 교착 상태에 접어든다. 오랜 전쟁으로 인한 미국 내 반전 분위기를 타고 미국은 휴전 협상을 모색하나 이승만은 북진 통일론은 주장하며 미국과 중국, 북한의 휴전협정 협상을 무산시키기 위해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하고 휴전협정 서명을 거부하며 휴전을 하면 북한과 중공은 힘을 길러 다시 남침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승만의 완강한 휴전 반대에 직면한 미국은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을 수립하고 이승만 제거를 포함한 대응 방안을 고심하나 마땅치 않자 이승만 회유를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약속한다.
“미국 정부는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한국 정부가 이를 인정하는 즉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위한 협상을 시작할 것임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약속했다. 반공포로 석방 직후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일련의 회의를 통해 이승만 제거, 미군 철수 등을 포함한 미국의 대응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이전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원하나 한국의 공산화를 방치할 수는 없다는 정책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홍용표 ‘북진통일 위협과 미국의 이승만 제거 작전’ 신동아 2006.8.14.)
1953년 7월27일 한국의 불참 속에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군 사령관과 북한과 중공군 사이에 한국전 휴전협정이 체결된다. 북한의 재침을 우려한 이승만의 거듭된 요청으로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며 다음 해 7월28일 이승만은 미국 국빈 방문 중 미국 의회에서 상하 양원 합동 연설을 한다.
마거리트 히긴스의 책 ‘War in Korea’
이승만은 북한이 휴전협정을 무시하고 휴전선 인근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군비를 확장하고 있으니 미국은 휴전협정을 폐기하고 한국과 대만의 장제스 정부를 도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중국 본토의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소련과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침략 위협에 계속 시달리게 될 것이며 핵무기 개발을 완성한 소련은 결국 미국 본토를 침략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승만의 미 의회 연설은 미국의 2차 대전과 한국전 참전으로 인한 피로감으로 생긴 미국의 반전 분위기에 묻혀 무시되었으나 역사는 이승만의 예지가 옳았음을 보여준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 종군기자로 한국전 기사와 단행본 ‘War in Korea’를 써 최초의 여성 퓰리쳐상 수상자가 된 마거리트 히긴스(Margerite Higgins)는 이현표 역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 War in Korea’에서 트루먼과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백악관과 국무부가 이승만과 맥아더, 그리고 다른 미군 장성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휴전을 강행했다고 비판한다.
“이승만은 흔히 반동주의자(reactionary)로 일컬어졌다. 조지 맥퀸은 ‘Korea Today’라는 저서에서 한반도가 일제의 침략에서 벗어난 직후인 1945-46년 기간 중 많은 미국인이 이승만의 반동주의적인 방법에 대해 반대했고 소련인들에게 조금 더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한국인들을 선호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그 후 일련의 사건들을 고려해 보면 이승만의 반소련 태도를 이유로 그를 비난하기는 힘들다.
나는 한국전쟁 초기에 6개월 동안 한국에 체류한 이후 7번이나 한국을 방문했다. 게다가 홍콩, 인도차이나, 태국, 미얀마, 인도, 파키스탄 등 아시아 국가들을 방문했다. 이렇게 여러 차례 여행할 때마다 그 나라 국민은 내게 한반도에서 중공의 개입을 거론하며 거의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미국은 중공을 저지하지 못했습니까? 동양인들의 기억 속에는 세계 최강의 국방력과 경제력을 지닌 미국이 아시아인들에 의해서 쫓겨났다는 사실이 입력되어 있었다.”
맥아더는 해임 후 의회 연설뿐 아니라 전국 순회 연설을 통해 트루먼과 미 국무부 관리들의 유럽 중시로 인한 한국전의 소극적 대처는 결국 소련과 중공 공산주의자들이 힘을 길러 미국에 도전할 시간을 줄 뿐이라고 주장한다. 다음은 돈 하원의원이 맥아더 해임 후 하원 감사장을 수여하는 결의안에 대한 제안 설명 내용이다.
“만약 한국전쟁 초기에 맥아더 장군의 건의를 받아들였더라면 세계가 오늘날과 같은 위기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자기가 계획했던 대로 한국전쟁에서 전쟁을 수행하도록 허용했더라면 적들은 이미 괴멸되고 세계의 세력 균형은 자유 진영에 훨씬 유리한 방향으로 기울어졌을 것입니다.
북한 괴뢰군의 공격과 그 후 중공의 참전은 미국이 얄타와 포츠담에서 저지른 과오를 시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당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으며 핵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을 유감스럽게 그리고 슬픈 마음으로 지적했던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중공과 싸우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 중공은 유라시아의 광활한 대륙을 배경으로 원자 무기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심각한 문제는 워싱턴에 있는 정책 입안자들이 아시아에 있는 맥아더 장군에게 진격 신호를 내릴 수 있는 선견지명이 있었다면 이미 1951년에 깨끗하게 해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반광식 역 더글러스 맥아더 ‘맥아더 회고록 2’)
돈 하원의원이 말한 미국이 얄타와 포츠담에서 저지른 실수란 친소련 공산주의자로까지 비난받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2차 대전 중 스탈린의 소련에 무제한에 가까운 군수 물자 제공과 경제적 지원을 한 것도 모자라 종전 후 히틀러의 독일이 점령했던 동유럽과 일본군 철수 후의 북한에 소련군의 진주를 허용함으로써 소련 공산주의의 국제적 확산을 돕고 소련이 미국에 대항하는 냉전 체제를 완성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다.
루스벨트는 2차 대전 중 스탈린의 공산주의 정권에 대가 없는 막대한 군수 물자 지원을 하나 반대로 영국에 대한 지원에는 철저히 반대급부를 요구한다. 루스벨트가 공산주의자로 비난받는 이유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지난 1943년 11월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회담 중인 각국의 정상들. 왼쪽부터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오른쪽) 영국 총리.
돈 하원의원 결의안과 히긴스 저서에 나온 대로 루스벨트뿐 아니라 당시 미국 정계와 관계, 미국 전체에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이 넘쳐났으며 이들을 상대로 철저한 반공주의자 이승만과 맥아더는 힘겨운 싸움을 벌인다.
1917년 소련 공산주의 혁명 성공 후 20여 년이 흐른 1929년 미국의 경제 대공황으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회의가 만연하고 1932년 대선에서 승리한 루스벨트는 대공황을 빌미로 뉴딜 정책과 사회보장법, 노동법 등을 도입하고 수십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소 수용 등 강압적이며 비민주적인 정책을 시행하자 대법원이 루스벨트와 민주당의 사회주의적 정책에 대해 계속 위헌으로 판결한다.
대법원의 제동에 루스벨트는 대법원 판사를 두 배로 늘리고 자신에게 우호적인 판사를 임명하려고 시도하나 삼권분립을 무너뜨린다는 우려로 민주당 의원들조차 반대함으로써 실패한다. 루스벨트는 심지어 워싱턴 대통령 재임 이후 굳어진 관례를 깨고 삼선, 사선 대통령에 도전하고 사선 대통령 당선 이후 한 달 만에 병사한다. 루스벨트 사후 미국 의회는 대통령 삼선 금지를 규정한 수정 헌법 22조를 통과시킨다.
루스벨트와 민주당 등 미국의 좌파가 대공황을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실패로 규정하고 대공황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을 가진다. 스탈린의 언론통제를 통한 조작과 선전 선동으로 미국과 서방 세계가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실상을 몰랐기 때문이다.
1924년 레닌의 사망 후 트로츠키 등 정적을 제거하는 권력 투쟁을 거쳐 집권한 스탈린은 집단 농장 도입과 공업화를 통해 소련의 근대화에 성공한다. 그러나 경제 개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집단 농장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외국에 수출하고 수출 대금으로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동안 수백만 명의 농민이 기아로 사망하고 무자비한 숙청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는다.
미국의 경제 대공황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실패가 아닌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들의 과도한 긴축정책이 원인이다. 미국의 경제 대공황을 초래한 좁은 시야의 경제이론에 갇힌 경제전문가로 구성된 연준을 질타한 사람이 밀턴 프리드먼이다.
짧은 경제 침체로 끝날 상황을 대공황으로 만든 게 연준이다. 대공황은 시장 실패가 아닌 연준의 과도한 통화 긴축이며 통화량 목표를 설정하고 고금리로 인플레이션을 통제할 수 있다는 어설픈 이론에 집착한 연준의 장기간 통화 긴축이 대공황의 원인이다.
1929년 대공황 이후 100년이 지난 현재의 파월 의장이 이끄는 연준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거듭되는 기준금리 인하 요구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사태 이후 터무니없는 고금리를 고집한다. 기업 활동과 경제를 옥죄는 가장 큰 요인이 정부의 갖은 규제이며 가장 강력한 규제가 고금리이다. 규제 완화와 철폐는 기업과 경제를 살리는 첫걸음이다. 주식과 부동산 등 실물 자산 가치 상승과 과도한 은행 대출에 대한 염려로 인한 연준의 장기간의 긴축정책이 주식 등 자산 가치 폭락과 경기 하락, 그리고 은행과 기업의 도산을 부추겨 경제 대공황이 시작된다.
대공황 이후 20년간 지속된 미국의 사회주의 추종 분위기에 제동을 건 사람이 조지프 매카시 공화당 상원 의원이다. 1950년 2월 매카시는 미국 국무부에 205명의 소련의 첩자가 암약 중이라고 발표하고 의회의 반미국 활동위원회를 중심으로 수년 동안 미국 정부와 경제계, 예술계, 언론계, 그리고 할리우드 감독과 작가, 배우 등 전방위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매카시즘 광풍이 분다.
루스벨트 고문으로 얄타 회담에 참석하는 등 루스벨트 외교 정책을 좌지우지한 앨저 히스가 소련 비밀 공산당원이며 첩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등 미국 내 소련 간첩과 공산주의자 암약이 발각되자 미국 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경각심이 커진다.
매카시즘 광풍이 휘몰아치던 1950년 6월 한국전이 발발하고 공산주의자로 의심받으며 궁지에 몰린 민주당과 루스벨트 병사로 대통령에 취임한 트루먼은 미군의 한국전 파병을 결정한다. 트루먼은 매카시즘 광풍에 떠밀려 파병 결정을 하나 파병 이후 소련과 중공의 눈치를 보며 이승만과 맥아더가 주장한 중공을 견제하며 북한 공산군을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내고 한국의 통일을 완수하기 위한 작전 계획을 계속 반대한다.
육군 사관학교 수석 졸업, 최연소 사단장, 최연소 육군참모총장, 태평양 전쟁 영웅 등 칭호를 받으며 전쟁 영웅으로 국민적 인기를 누리던 맥아더와 달리 고졸 학력에 존재감 없는 상원의원에서 민주당 계파 싸움 결과 어부지리로 부통령에 지명되고 루스벨트 사후 얼떨결에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은퇴 후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 낙향하고 1963년 자신을 찾은 김종필에게 자신이 이승만과 맥아더를 도와 한국의 통일이 되도록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고 얘기한다.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Clark) 대장의 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서명 당사자인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Clark) 대장은 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에서 미국 정부의 휴전을 비판한다.
“미국과 자유세계의 가장 중요한 결단은 중공군이 1950년 11월 전투에 뛰어들었을 때 취해졌어야만 했다. 세계전쟁으로의 확산 위험을 무릅쓰고 중공군에게 즉각 철수하지 않으면 핵심 시설을 공격하겠다고 경고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 단호한 결의만 있었다면 중공군을 응징하고 승리할 수 있었는데 정부가 그런 결정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실망했다.
휴전협정이 마무리되고 협정에 조인하면서 솔직히 마음이 무거웠다. 당분간 살인 행위가 중지된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한반도에서 공산 침략자들을 완전히 패퇴시킨다는 결정을 한 경우보다 더 값비싼 피의 희생을 훗날에 우리 국민이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Van Fleet) 미8군 사령관은 1951년 4월 부임 후 두 차례의 북한군과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막아내고 수십만의 사상자와 함께 퇴각하는 적을 궤멸시키기 위해 북진을 요청했으나 트루먼의 반대로 무산된다.
시사 주간지 TIME은 밴 플리트를 1951년 5월14일 자 표지 인물로 다룬다. 밴 플리트는 퇴임 후 1953년 5월 11일과 18일 주간 화보지 라이프(LIFE)에 기고한 ‘한국에 관한 진실(The Truth about Korea: From a Man Now Free to Speak)’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재임 시 못한 말을 쏟아낸다.
“1951년 봄 내가 제8군 사령관으로서 한국에 부임한 후 6주일은 미 육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기였으며 한국전쟁 중에 최고로 우리 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던 시기였다. 그때 우리 정부의 고위 정책결정자들이 개입해서 우리에게 더 전진하지 말라고 명령함으로써 전투는 정체 상태가 되었으며 길고 지루한 휴전 협상이 시작됐다.
1951년 5월 이후 우리 정부의 정책을 추적해 보면 우리가 한반도에서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서글픈 감정을 감출 수 없다. 왜 우리는 중공군보다도 압도적으로 우세했는데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할 휴전을 택했는가. 완전히 적을 섬멸할 수 있는데 왜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휴전으로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극성스레 고집하는가.
우리는 침략자들에게 군사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것이 우리 손자들을 전투와 그로 인한 패배로부터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승리는 대가가 따른다. 전쟁은 항상 희생이 따르는 것이며 질질 끄는 것보다는 빨리 끝낼수록 더 낫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밀려 후퇴하면 결국 모든 것을 잃는 패배자가 된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이현표 역 Margerite Higgins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 War in Korea’)
밴 플리트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다. “한국인들은 일제의 침탈로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지독히 가난한 삶을 누리다가 이승만 정부에서 민주주의를 처음 경험했다. 그러나 미국을 증오하고 부자와 토지 소유자들을 살해하여 전리품을 함께 나눠 갖자고 종용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에게 공산주의 위협의 본질을 이해시키고 용기와 인내심을 고취했다. 이를 통해서 그는 충분한 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한국 국민과 사회적 규율이 부족했던 한국을 공산 침략에 대항할 수 있는 세계 최강의 나라로 만들었다.”
이승만 정권이 북한의 6·25 남침을 막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의 지원도 있었으나 중국이나 베트남의 경우에서 보듯이 미국의 지원은 필요조건이며 충분조건이 아니다. 중국이나 베트남에선 부패하고 무능한 장개석과 고 딘 디엠 정권에 대다수 국민이 등을 돌렸으나 대한민국 국민은 이승만 정부를 믿고 따랐다. 중국과 베트남에서 패배한 후 미국 대통령과 고위 관리들이 이구동성으로 중국과 베트남엔 왜 이승만 같은 인물이 없냐고 얘기한 이유이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노력과 12년 집권은 2차 대전 종전과 동시에 찾아온 극심한 미소 냉전 대립의 시기에 공산주의들의 적화 야욕에 맞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대한민국을 지켜온 공로로 기억되어야 한다. 이승만에 대한 친일이니 독재자라는 평가는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에게 세뇌된 종북 좌파들이 할 수 있는 평가다.
부산정치파동과 계엄령을 통한 이승만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에 대한 김일영의 평가다. “북진 통일론을 일본을 중심에 두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재분단을 겨냥한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약소국 지도자 이승만의 견제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직선제 개헌론은 단순히 집권 연장책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미국과 이승만 사이에서 야당 세력은 어정쩡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미국의 비호하에 이승만에게서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의사에 반해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을 지지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였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권력 쟁취를 위한 내각제 개헌이었으며 이러한 국내 정치를 전쟁 정책과 어떻게 연결해 풀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고민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국내 정치와 전쟁 정책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안목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이승만은 정치를 전쟁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있었던 유일한 정치가였다고 할 수 있다.” (박지향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2’)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기초 위에 박정희 정권이 등장해서 전 세계가 놀라는 기적 같은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산업화가 이루어진다.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으로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고 중국 공산주의가 정치·경제·문화·사회 모든 면에서 몰락하고 등장한 덩샤오핑이 벤치마킹한 사람이 박정희이다. 덩샤오핑은 중국의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룬 공로로 기억되며 현재의 중국 번영의 일등 공신이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적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 황두형
前 연합뉴스 워싱턴 특파원
前 연합뉴스 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