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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松山] 끝나지 않은 남침… 총에서 사상으로, 사상에서 정장으로
  • 松山 작가
  • 등록 2026-05-02 12:3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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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전 70년, 북한의 ‘비대칭 남침’은 현재진행형

1·21사태 때 김신조 체포 모습. 흑백사진을 컬러로 바꿈.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많은 사람은 전쟁이 끝났다고 믿었다. 총성이 멎었고, 전선은 멈췄고, 폐허 위에 복구가 시작됐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종결이 아니라 전쟁 방식의 변경이었다. 탱크는 멈췄어도 사람은 멈추지 않았다. 북한은 정규군 대신 공작원을 보냈고, 전면전 대신 침투를 택했다. 남침은 중단된 것이 아니라 형태가 바뀌었다.

 

6·25는 1953년에 멈췄지만 남침은 멈추지 않았다

 

휴전선은 국경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는 선이었다. 북한은 이 선을 군사분계선으로 본 것이 아니라 다음 침투를 준비하는 출발선으로 봤다. 이때부터 남침 간첩사가 시작됐다.

 

처음엔 총을 들고 직접 내려왔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바다를 타고 들어왔다. 민간인으로 위장했지만 목적은 정찰이 아니었다. 군사시설 파괴, 후방 교란, 요인 암살, 민심 선동, 치안 붕괴가 목적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북한은 휴전선과 동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소규모 무장공비를 반복해서 투입했다. 2~3명, 많게는 10명 안팎의 무장조가 야간에 군사분계선을 넘고 산악을 타고 후방으로 스며들었다. 군부대 배치와 도로 사정, 민심 동향을 파악한 뒤 복귀하는 방식이었지만, 점차 정찰을 넘어 파괴공작과 주민 접촉으로 확대됐다.

 

1960년대 중반부터 북한은 더 노골적이 됐다. 박정희 정부가 한일국교정상화와 경제개발계획을 밀어붙이며 국가기반을 빠르게 정비하자, 북한은 남한 내부 붕괴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판단했다. 베트남전에 한국군이 파병되면서 국군 전력이 분산된 점도 기회로 보였다. 

 

1967년을 전후해 북한은 비무장지대 도발, 어선 납치, 철도 파괴 기도, 무장간첩 침투를 동시다발적으로 늘렸다. 그리고 1968년, 이 누적된 도발은 한꺼번에 폭발했다.

 

1968년 수도 참수작전 ‘1·21사태’


1968년 1월21일 밤, 북한은 마침내 서울의 심장부를 겨눴다. 이른바 1·21 사태다.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부대 무장공비 31명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목표로 청와대를 향해 침투했다. 

 

이들은 1월17일 밤 휴전선을 넘어 임진강 얼음판을 건너고, 파주 삼봉산과 앵무봉을 지나 서울 북악산 자락까지 내려왔다. 낮에는 산에 숨고 밤에는 이동했다. 1월21일 밤 10시경, 이들은 청와대 외곽 500m 지점인 자하문 고개 인근 세검정 일대까지 접근했다. 서울 한복판이었다. 수도의 심장까지 무장공비가 걸어 들어온 것이다.

 

이들은 자하문 초소에서 경찰 검문에 걸렸다. 자신들을 방첩대원이라 속이며 통과를 시도했지만 검문이 이어지자 곧 총격전이 벌어졌다.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현장에서 전사했고, 공비들은 자동소총과 수류탄을 난사했다. 시내버스에 수류탄이 날아들었고 민간인이 쓰러졌다. 서울 도심은 한밤중 전쟁터가 됐다. 

 

이 사건의 본질은 단순한 간첩 침투가 아니었다. 북한 특수부대가 대한민국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 중심부까지 도달했다는 사실, 그것이 핵심이었다. 생포된 김신조는 조사 과정에서 이들의 목적이 박정희 대통령 제거였다고 진술했다. 북한은 대통령 제거와 정부 마비, 혼란 유발을 통해 체제 전복의 기회를 노렸다.

 

소탕전은 2월 초까지 이어졌다. 김신조가 생포됐고, 28명이 사살됐다. 이 사건 이후 향토예비군이 창설됐고, 휴전선 철책선과 후방 대간첩 체계가 대폭 정비됐다. 주민등록증 제도와 검문 체계가 본격화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러나 1·21은 끝이 아니었다. 불과 이틀 뒤인 1월23일, 북한은 동해 공해상에서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 서울 심장부를 찌른 직후 미군 자산까지 건드리며 한미 양국을 동시에 압박한 것이다. 1968년 북한의 도발은 국지 사건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흔드는 복합 공세였다.

 

1968년 울진·삼척의 점령 예행연습

 

그리고 같은 해 가을, 북한은 더 큰 판을 벌였다. 1·21사태가 수도 참수작전이었다면, 울진·삼척 침투는 후방 게릴라전이었다. 1968년 10월30일부터 11월2일까지 북한은 세 차례에 걸쳐 총 120명의 무장공비를 경북 울진·삼척 일대 해안으로 침투시켰다. 

 

1968년 울진·삼척 침투 사건. 당시 평창군 산간마을에서 10세의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절규와 함께 북한 게릴라군에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15명 단위로 조를 편성해 군복, 신사복, 등산복으로 위장시킨 뒤 동해안을 통해 들여보냈다. 이들은 단순 침투조가 아니었다. 정찰과 복귀가 목적이 아니었다. 울진·삼척 산악지대에 장기 체류하며 주민을 선동하고, 유사시 후방 게릴라 거점을 만들려는 공세형 침투였다.

 

11월3일 새벽, 울진 북면 고수동 주민 신고로 실상이 드러났다. 무장공비들은 마을 주민을 강제로 집결시킨 뒤 북한 체제를 찬양하고 노동당, 여성동맹 가입을 강요했다. 반항하는 주민은 칼로 찌르고 돌로 쳐 죽였다. 신고하면 몰살하겠다고 협박했다. 

 

이것은 단순 침투가 아니라 점령 예행연습이었다. 북한은 숨어 들어와서 보고 가는 침투에 만족하지 않았다. 마을을 장악하고 주민을 선동하고 후방에 유격 거점을 만들려 했다. 남침은 정찰에서 교란으로, 교란에서 점령 실험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8년 북한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배웠다. 총을 들고 서울까지 들어오는 일은 가능했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청와대 500m 앞까지 내려와도 실패했고, 울진·삼척 산악에 120명을 풀어도 결국 소탕됐다. 

 

북한은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총을 들고 내려오는 방식은 충격은 크지만 지속력이 약했다. 남한 내부를 오래 흔들려면 총보다 사람, 침투보다 포섭, 무장보다 조직이 더 효율적이었다.

 

이때부터 남침은 성격이 바뀌었다. 군복은 사라지고 양복이 들어왔다. 자동소총은 사라지고 인쇄물이 들어왔다. 무장공비 대신 지하당이 들어왔고, 침투조 대신 혁명조직이 자라기 시작했다. 북한은 더 이상 산에서 오래 버티려 하지 않았다. 대신 사람 속에 오래 숨으려 했다.

 

1968년 지하당의 역습, 통일혁명당 사건

 

그 출발점이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이었다. 통일혁명당 사건은 단순한 간첩 검거가 아니었다. 북한이 남한 내부에 실제 지하당을 만들려 했다는 점에서 남침 공작의 성격을 바꾼 사건이었다. 중심인물 김종태는 북한 대남공작선과 접촉하며 지령과 공작금을 받았다. 

 

통일혁명당은 학생, 지식인, 종교계, 노동계, 문화계로 연결선을 만들고 평시에는 합법 외피를 유지하며 움직였다. 유사시에는 폭동과 내란, 정권 마비의 기반이 되는 도심형 지하조직이었다.

 

1970년대로 넘어가면서 북한은 침투 경로도 바꿨다. 직접 남파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휴전선은 강화됐고 해안 감시는 촘촘해졌다. 그래서 북한은 일본과 제3국을 활용한 우회 공작을 본격화했다. 그 대표적 사건이 1974년 문세광 사건이다. 

 

광복절 경축식이 열리던 국립극장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고, 육영수 여사가 피격돼 사망했다. 문세광은 산에서 내려온 공비가 아니었다. 합법적 얼굴로 행사장 안까지 들어온 암살자였다. 

 

1·21이 총을 든 군인이 서울로 걸어 들어온 사건이었다면, 문세광은 양복을 입고 국가 행사장 안으로 들어온 사건이었다. 북한의 대남공작은 멀리서 숨어 들어오는 방식에서 가까이 섞여 들어오는 방식으로 이동했다.

 

1970년대 도시형 지하혁명조직 ‘남민전 사건’ 

 

1970년대 후반의 남민전 사건은 이 흐름을 더 분명히 보여준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이른바 남민전은 1976년 결성돼 1979년 적발된 비합법 지하조직이다. 겉으로는 반유신 저항조직처럼 보였지만, 내부 문건과 조직 형태는 도시형 지하혁명조직의 전형이었다. 

 

산속이 아니라 대학가, 인쇄소, 공장, 교회 주변, 출판망이 중심이었다. 총 대신 인쇄기를 썼고, 군복 대신 학생복을 입었고, 무전기 대신 연락망을 썼다. 북한이 1970년대에 가장 효과적으로 들여보낸 것은 총이 아니라 사상이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권의 급진화, 조직화 

 

1980년대로 넘어가면 이 흐름은 더 넓고 깊어진다. 광주 이후 대학가는 급진화됐고 노동현장은 조직화됐고 출판과 서클 문화는 빠르게 이념화됐다. 물론 1980년대 민주화운동 전체를 북한 공작으로 묶는 것은 성급하다. 

 

상당수는 국내 정치 현실과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자생적 저항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사실도 있다. 북한은 이 공간을 비워두지 않았다. 

 

학생운동권, 노동운동권, 학습서클, 지하출판망 안으로 북한식 문법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주체사상, 민족해방론, 반미, 연방제, 반제 같은 언어가 운동권 내부의 핵심 문법으로 자라기 시작했다. 북한이 가장 값싸게 성공한 지점은 직접 지령이 아니라 내부에서 스스로 북한식 언어를 재생산하는 층을 만든 데 있었다.

 

1990년 이후 고정간첩화,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등

 

냉전이 끝난 1990년대, 많은 사람은 이제 간첩도 과거의 유물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 판단이야말로 북한이 바라던 오판이었다. 북한은 가난해졌지만 공작을 버리지 않았다. 정규전 능력은 약해졌지만 비대칭 공작은 더 정교해졌다. 총을 들고 산에서 내려오던 시대는 끝났지만, 그 대신 정장을 입고 도시 안에 눌러앉는 시대가 시작됐다.

 

1992년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은 그 출발점이었다. 북한은 냉전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남한 내부에 지하당을 심으려 했다. 무장공비가 아니라 고정간첩과 내부 협조망을 통해서였다. 1995년 김동식 간첩 사건은 북한 공작의 핵심이, 침투보다 유지로 바뀌었음을 보여줬다. 한 번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들어온 자를 오래 숨기고, 오래 유지하고, 필요할 때만 움직이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필요할 때 여전히 총을 꺼냈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그 증거다. 북한 잠수함이 강릉 앞바다에 좌초했고, 공작원 26명이 상륙해 49일간 산악 도주전을 벌였다. 1998년 여수 반잠수정 사건은 북한 공작이 얼마나 기술적으로 바뀌었는지를 보여줬다. 잠수함, 반잠수정, 위장선박, 우회항로가 등장했다. 가난한 체제일수록 비대칭 공작은 더 중요해진다. 정규전은 돈이 들지만 간첩은 싸기 때문이다.

 

2006년 일심회 간첩단 사건은 이 흐름의 완성형이었다. 이들은 산속 공비가 아니었다. 대학가와 시민사회, 정치권 주변과 연결된 인물들이었다. 북한의 대남공작은 여기서 완전히 모습을 바꿨다. 군복은 사라졌고 양복이 들어왔다. 산은 사라졌고 사무실이 들어왔다. 무전기는 사라졌고 이메일과 해외 접선이 들어왔다. 이제 간첩은 더 이상 밤에 산을 넘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고 움직였고, 이메일로 보고했고, 회의실에서 사람을 만났다.

 

북한은 한 번도 전쟁을 끝낸 적이 없다. 다만 총에서 사상으로, 사상에서 정장으로 갈아입었을 뿐이다.





◆ 松山(송산)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신화가 된 조선’과 ‘다다미 위의 인문학’을 펴냈다. 현재 자유주의 문화운동의 연구와 실천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松山은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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