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오늘의 세계, 특히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1960년대를 돌아본다.
글쓴이 : Alee
작성일 : 25-11-09 10:37
조회수 : 604

나의 중고등학교와 대학시절과 정확히 일치하는 60년대 십년을 돌아보며 여기다가 올려본다.

60년대 초반까지도 적어도 중년에 이른 남자들은 대부분 외출시 중절모를 썼었고 특히 한 국가의 대통령이라면 더더욱 그랬었다.
그러다가 솔선수범으로 모자를 벗어던지고 맨 머리로 나타난 케네디 대통령은 온 세계 모든 남자들에게 중절모를 벗어 던지게 했다.
그러자 텁수룩한 장발로 나타난 사나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비틀즈라는 이름의 팝송가수팀이었다.
당시 십대 이십대는 물론이고 중년 여자들까지도 오줌을 지리게 만들어서 뭇 남성들에게 시샘을 받았었던 비틀즈는 단숨에 온 세계에 장발을 유행시켰고 동 아시아의 여러나라에서 젊은이들도 다들 머리를 기르기 시작하자 이것은 한국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정부는 70년대에 들어서서 부터 경찰들을 동원하여 길거리에서 장발단속을 시작했고 남자들이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갔다가 마구잡이로 단속을 하는 예비군 훈련교관들의 개판 가위질로 쥐뜯어먹은 모습이 되어서 돌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해지자 마침내 한 주부가 용기를 내어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직접 공개서한을 보내 항의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장발단속은 유신독재가 막을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었다.
어쨌든 머리를 길게 기르는 장발 스타일이 유행하게 된데는 비틀즈의 영향이 전부는 아니었을지라도 그들의 영향이 컸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지 않나 생각된다.

60년대는 한마디로 격동의 십년이었으며 장기간 미국 각지에서 발생하던 흑인에 대한 차별에 대해 산발적으로 항의시위를 하는 형식으로 지속되어오던 민권운동이 마침내 버스 안에서 한 흑인 여성이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 점화제가 되어 온 미국으로 번져가면서 결실을 거두어 인종차별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오던 미국에서 모든 사람에 대해 인종, 종교, 국적, 성별 여하에 관계 없이 일체의 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이 통과된 시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차별철폐는 1960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데와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흑인 민권 운동가이던 말틴 루터 킹 주니어(MLK Jr.) 목사와 미국에 검은 회교도 운동을 시작한 맬컴X 등이 이끌었다.
이것에 대한 백인 보수단체의 저항이 없을 수 없어서 앞서 언급된 민권운동 지도자들은 케네디 대통령으로 시작해서 한사람씩 의문의 총격에 의한 암살을 당하게 되고 그 배후는 지금도 베일에 싸여있다.

그 외에 흑인 운동선수들의 활약 역시 민권운동에 큰 힘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권투선수 알리로 시작해서 죠 프레이지어, 죠지 포먼등 세 사람이 링위에서 곰의 괴력과 사자의 용맹과 나비의 날렵함과 벌의 날카로움을 겸하여 펼치는 그야말로 예술같은 경기광경은 많은 백인들에게 참기 어려운 열등감을 안겨 주었고 그 광경에 필자 역시 같은 유색인종으로서 은근히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 외에 농구, 미식축구, 육상 등 다른 스포츠에서도 흑인들이 백인들을 제치고 단연 두각을 나타내자 이에 좌절을 느낀 백인들이, 흑인들이 아직 따라오지 못한 빙상경기종목을 따로 떼내어 동계 올림픽을 새로 창설하는 일이 생기기까지 했다. 이들 흑인 스포츠맨들은 서로 서 있는 위치는 달랐더라도 모두들 하나같이 억 눌린자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누구 못지 않게 잘 이해하고 억눌린 자들을 해방시켜주는 일에 크게 기여를 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들의 희생과 노력이 없었더라면 지금 미국의 한 중소도시의 백인 거주지역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괜챦은 집의 컴 앞에 앉아서 한가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필자 역시 다른 상황에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되어 새삼 이들에게 감사드린다.

1960년은 또한 자유당 정부의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려던 경찰의 발포에 굴하지 않고 200여명의 사상자를 내가며 투쟁해서 부정으로 당선된 정부를 뒤엎고 민주당에게 정권을 안겨준 4.19 혁명이 일어났던 해였으며 그 이듬해인 1961년은 나약하고 무능한 민주당 정부의 약점을 파고 드는 북한의 한반도 적화통일 야욕을 저지하겠다는 목적으로 일어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던 해이기도 했었다.
당시 육군 소장이었던 박정희가 주동이 되어서 일어난 5.16 군사혁명은 당시 세계 최빈국이자 최 후진국이었던 대한민국으로 하여금 오늘날 세계 12대 경제강국의 대열에 들어서게 만드는 대 도약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여기서 한가지 덧붙여 설명하고 지나가야 할 중요한 사항이 있다.
가난과 무지가 호흡공간인 좌익들은 한국이 산업화되고 경제가 발달하면 자기들은 질식해서 사라질 것이 뻔 했기에 김대중이나 김영삼 같은 좌익 인사들은 한국의 산업화를 막기위해 온 갖 수단을 발휘하여 반대투쟁을 벌렸는데 여기에는 김대중과 지역적인 연고가 있는 전라도가 동원되었었다.
특히 전라도는 육이오로 인한 피해를 가장 심하게 본 곳이었기에 김대중은 이것을 잘 이용했었던 것 같다.
육이오 당시 파죽지세로 몰고 내려오는 인민군을 좁은 전선으로 몰아 넣고 압도적인 화력으로 이것을 섬멸하여 격퇴한다는 미국의 작전에 가장 알 맞는 전투지역은 낙동강 일대였고 그래서 호남지역은 완전히 적에게 내 주어야 했었다.
서울과 경기도, 경상도, 충청도 사람들은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부산 등지에서 피난생활을 하는 동안 선진문화에 일찍 눈을 뜬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새삼 교육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어 이 사람들은 수복후 고향에 돌아 가서도 2세 교육을 통한 신분 업그레이드에 노력을 가하게 되었지만 전라도 사람들은 인민군 치하에 갇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새로운 외부 정보와 환경에 접할 기회를 놓져버럈던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세상을 살아가려면 베워야 하고 공부는 때를 놓지면 늦는다"는 것을 이미 타 지방 부모들은 육이오를 통해 깨달았기에 너도 나도 자식들을 나이들기 전에 학교에 보내기 바빴던데 비해 전라도 부모들 중에는 60년대까지도 "공부는 나이들어도 할수 있는 것이다"는 식의 이조 때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2세 교육에 크게 열을 올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라도 사람들은 50년대에도 여전히 옛날처럼 자식들을 그저 집안에 붙잡아 놓고 딸은 부엌일 아니면 텃밭일이나 시키고 동네에 일거리 있는 집이 있으면 그 집에 보내 날품팔이나 시켜 그 댓가로 밥이나 얻어오게 하다가 나이가 차면 입을 덜기위해 출가시키고, 아들은 집안 농삿일 아니면 동네 땅 주인들 집의 머슴살이나 시키면서 받아오는 새경으로 부모 봉양이나 시키는 것이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의 전부였다.
자연히 전라도는 육이오 이후 밀려오는 서구화에 뒤쳐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전라도는 60년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한글도 읽을 줄 모르는 젊은이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50년대 10년을 "전라도 사람들의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전라도 사람들의 이 잃어버린 10년 때문에 60년 대 서울 구로공단이나 마산 자유공단 같은 곳의 제대로 된 공장에 고용되는 여공들 중에는 전라도 사투리가 드물었고 그 대신 식모살이 하는 여자들이나 서울 변두리 싸구려 막걸리 집 종업원들은 전라도 사투리가 단연 우세했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많은 피해의식이 심리 저변에 잠재되어 있었던 전라도 사람들은 김대중의 지역감정 선동에 멋 모르고 휘둘렸고 그 바람에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정책에 주도적으로 참여를 못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광주사태는 원인이 무엇이었고 주도자가 누구였던 간에 전라도 사람들의 가슴에 맺혀있던 심리적인 시한폭탄의 뇌관을 건드리는 크나큰 사변이 되고 말았다. 

다른 식으로 설명을 하자면 80년대에 산업화가 어느 정도 완성되었을 때 산업화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던 전라도 사람들은 결국 선진화된 한국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는 자신들의 사회적인 위치를 발견하면서 완전히 허탈에 빠질 수 밖에 없었는데 이 것은 광주사태라는 비극적인 사변과 맞물려서 영남과 호남 간에 메우기 힘든 골이 패이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현재 전라도 사람들 생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한국이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이 싫은 것이며 그러니까 5.16 혁명 후 이루어진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헐어내리고 해체하여 1950년대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김영삼과 김대중 정권 이래 좌익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항상 나타나는 정책들이 하나같이 이런 방향의 것들이었는데 이재명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부터는 이러한 국가 파괴적인 속내를 감추지 않고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린다.

1960년대는 서울 거리에서 육이오 전란의 흔적이 겨우 겨우 지워져 가면서 여기 저기 현대적인 모습을 갖춘 고층 빌딩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던 십년이기도 했다.

60년대의 우리 나라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째질듯한 가난에 짓눌려 허덕이면서도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 대통령의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구호 아래 온 국민이 후진국을 벗어나고자 애 쓰던 시대였다.
당시 쌀 등 곡식을 아끼기 위해 모든 주류는 곡물이 아닌 합성 알콜로 만든 화학주로 대체되었었으며 그 당시 서민들이 마시던 막걸리 역시 카바이트로 빚은 것이었다.
쌀과 보리 등 곡식의 대부분은 미국에서 수입한 것이었기에 농약과 방부제로 퍼렇게 찌든 것을 몇번이나 물로 씻어낸 후에야 밥을 지을 수 있었다.
고기가 식탁에 오르는 일은 중산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정도 한달에 한 번 정도면 괜챦은 편이었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일 아니면 명절날에나 제대로 된 고기반찬을 식탁에서 볼 수 있었고 평상시에는 동물성이라면 찌게에 넣는 통멸치 몇마리가 다였을 만큼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식탁은 문자그대로 푸른 초원이었기에 그것을 일컬어 "Green Field"라고 부르기도 했었다.(ㅎㅎㅎ)

기억하기로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1966년 서울 시내 버스값은 3원이었다. (믿어지세요?)
당시 나는 용산구의 효창공원과 붙어있는 마포에 살았었는데 그 일대의 주택들 대부분은 육이오 사변 직후 1953년에 그 일대를 덮고 있던 수천 개의 무덤을 파내고 깎은 위에 지은 집들로서 거의 모두가 무허가 였고 그래서 그 집들은 70 년 대 후반에 도시계획에 걸려 거의 다 헐리고 도로로 바뀌었기에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그 곳에 살았던 50년대만 해도 마포는 서울이라고 생각들을 안했으며 아현동 고개를 넘어 적십자 병원이 있었던 서대문 네거리를 건너야 서울로 인식되었었는데 그 곳부터는 마포에 사는 사람들이 “문안”이라고 불렀다.
서울 마저도 문안과 문밖의 사투리가 달랐을 만큼 그 당시 한국은 그야말로 아직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학교는 3-4 킬로 정도 거리는 걸어서 다니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12년동안 학교를 걸어서 다녔으며 곳 곳에 깡패들이 지키고 있다가 돈을 뜯는 일이 잦았기에 나는 항상 그놈들을 피하기 위해 돌아서 다니기도 했었다.

60년대는 월남전등 전쟁과 이것에 대해 항의하는 반전운동으로 점철된 시기이기도 했고, 미국이나 서유럽, 일본같은 선진국에서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가면서 죽어라고 일하지 않아도 세끼밥은 먹을 수 있개 되었는데 그러자 나타난 부작용으로 휴식의 가치와 게으름의 자유를 내세우며 나타난 것이 있었으니 바로 "히피문화"였다.
특히 대부분 중산층 가정 출신의 백인 아이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미국과 유럽의 히피족은 집시들 마냥 떼를 지어 유랑을 하면서 때마침 나타난 LSD나 메타 암페타민같은 값싼 합성마약과 마리화나 같은 것들에 취해 집단 난교를 즐겼었다.
또 이들은 하나같이 월남전에 반대했으며 전쟁없는 세계의 실현과 일체의 보수적인 기존 가치의 해체를 원했었다.
이러한 히피들의 문화는 젊은이들의 사회에 깊이 파고들었으며 미국의 보수정치인들에게 대항하는 민주당에게 대단히 좋은 무기가 되었고 민주당의 이러한 경향은 공산주의자들이 민주당에 파고들 수 있는 아주 좋은 은폐막을 제공해서 현재의 미국의 민주당은 과거 케네디나 MLK Jr. 등이 몸담았던 그러한 오리지날한 민주당의 정신이 아니라 한국의 빨갱이나 다름없는 걸레같이 지저분한 멘탈리티가 점하고 보아야 하겠다.

어쨌든 현재 한국에서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있는 운동권 정치인들이나 이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민노총이나 전교조나 언론계 인간들의 성문화가 이들 히피들의 성문화와 완전 짝퉁임은 이들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과거에 소위 촛불문화제니 의식화 학습이니 하는 행사에 참여할 때에 단체생활을 어떤 식으로 했는지를 알면 반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비틀즈의 리더이고 매우 보수적이었던 죤 레넌이 오늘의 잘난체하는 운동권 쓰레기들을 보면 분명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너희가 진보를 아느냐?"
 
당연히 예상되었던 일이긴 하지만, 히피문화는 사회적 실패자들인 루저들에게 파고들어가면서 부작용을 낳기 시작했는데 성공해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Celebrity에 대한 증오심이나 열등의식이 행동으로 표출되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 그 중의 하나이다.

바로 1969년에 일어났던 끔찍한 찰스 맨슨 사건이 그 대표적인 한 예이다.
그대로 여기다가 기술한다면 Rated R 급의 공포영화 장면 이상으로 너무도 끔찍한 사건이라 디테일한 내막은 말하지 않으려 한다.
죽은 샤론 테이트 양의 처참한 모습은 육이오 때 빨갱이들에게 낫과 도끼와 곡괭이 등으로 극도로 잔인하게 학살되었던 양민들의 모습을 보셨던 분들이라면 그 것을 그대로 상상하시면 될 것이다. (!)
이 사건의 주범 찰스맨슨은 체포되어 종신징역을 살다가 결국 노령으로 옥중에서 죽었는데, 하나같이 루저들인 맨슨 추종자들은 충성심을 버리지 않고 맨슨이 돌아올 날을 기다렸다고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마지막 합법적인 대통령 박근혜 여사에 대한 탄핵의 배후인물을 찰스맨슨에 비유 한다면 이 인간의 시키는데로 따라하는 한국의 빨갱이들과 수구꼴통 사탄파들이 바로 그 찰스맨슨의 추종자들이라 하겠으며 찰스맨슨 사건의 희생자 샤론 테이트 양은 박근혜 대통령에, 통일 대한민국은 그 샤론테이트 양이 임신하고 있었던 아기에 비유할 수 있겠다.

1960년대는 공산주의가 기승을 부리며 욱일승천하던 십년이기도 했다.
그 여세는 70년대까지 계속되어서 월남, 캄보디아, 라오스 세 나라가 연속으로 공산화가 되었고 그 후 이디오피아등 아프리카의 여러나라 역시 공산국가가 되었으며 1979년엔 이란 역시 친미에서 친쏘로 돌아서게 되었다.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가장 믿었던 미국 마저도 한국과의 공동 주적인 중국과 화해하고 수교를 맺는 등 어려운 국제적인 환경에서 사실상 대한민국 홀로 공산침략에 맞서야 했기에 더 더욱 철권통치를 강화해야 했고 마침내 1972년 말에 유신체제를 선포하기에 이르렀지만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겁낸 어떤 배후세력의 개입가능성이 농후한 "한국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한 한국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함으로서 한국은 이재명이 이끄는 오늘의 친중종북 체제가 들어서게 되는 운명의 첫 단추를 끼우게되었다.

1979년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남한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정부가 막을 내리고 반미친중종북주의 노선을 표방하는 공산주의 체제로 가는 대사변이 일어나는 첫 단추를 끼우는 사건이었다면 2016년 12월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사건은 그 것을 완성하는 마지막 단추를 끼우는 사건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한반도는 이미 반세기 이상 전인 1960년대에 미국과 유럽에서 출현한 전 세계적인 대혼란의 여진이 아직도 지속중인 곳이며 그 피해를 가장 심하게 보고있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제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대한민국은 오래 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그 후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서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며 오늘까지 지내오다가 끝내 이재명이란 사람과 그 추종자들에의해 세워진 완벽한 반미친중정부가 들어서고 말았다.
필자의 보기에는 미국은 이미 오래 전에 한국을 동맹국의 대열에서 제외했으며 만약에 동북아에 어떤 상황이 발생할 경우 한국없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플랜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즉 한국은 이재명 정부가 있는 한 미국 등 서방 제국의 잠재적인 적대국가로 분류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너무 어두운데로 나갔다. 본의가 아니었음을 이해해 주시고 진정들 하시기를 바란다.나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어쩔 수 없음을 고백한다.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60년대에 온 세계 젊은이들 사이들에게 유행했던 노래 몇 곡을 여기다가 소개고 끝내려 한다.
오늘의 산업화된 한국을 이룩하는데 가장 많은 수고와 희생을 치렀던 7080세대와 그 이전 세대 선배님들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처럼 모두 이 노래를 들으면 눈가에 물끼가 서릴 것이라고 믿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jenWdylTtzs
https://www.youtube.com/watch?v=N4bFqW_eu2I
https://www.youtube.com/watch?v=pWYTtDqKztQ
https://www.youtube.com/watch?v=j1zBEWyBJb0
https://www.youtube.com/watch?v=_W5Sjue8rA4
https://www.youtube.com/watch?v=_2sz_YwwwQ4
https://www.youtube.com/watch?v=FMalmwupji8
https://www.youtube.com/watch?v=B_K6z3HiR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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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만원 박사 광주재판 재심의 필요성에 관하여
댓글
Alee 25-11-21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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