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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松山] 반일문학은 어떻게 베스트셀러가 되는가?
  • 松山 작가
  • 등록 2026-08-09 15:5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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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작가의 ‘황태자비 납치사건’ 표지 일부. [이타북스]

한국 대중문학에서 ‘일본’은 유난히 쓰기 편한 소재였다. 일본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 작가는 악역의 성격과 배경을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침략, 친일, 수탈, 저항이라는 역사적 기억을 독자가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기억을 호출하는 것만으로 갈등을 만들 수 있었다. 이들 반일소설들에는 몇가지 공통된 기법이 사용된다.

반일소설의 첫 번째 수법은 역사의 압축이다. 

국가 간 충돌에는 정치체제, 군사력, 경제력, 외교관계와 지도자의 판단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런 요소를 모두 다루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조선 내부의 정치적 실패나 국제정세에 대한 오판을 뒤로 보내고 외부의 가해자를 앞에 세우면 이야기는 훨씬 선명해진다. 독자는 누구에게 분노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두 번째는 서로 다른 시대를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하는 것이다. 

임진왜란의 일본과 메이지 일본, 일본 제국, 패전 이후 일본은 정치체제와 국제환경이 크게 달랐다. 대중소설에서는 이런 구별이 쉽게 사라진다. 히데요시에서 메이지 정부를 거쳐 현대 일본까지 하나의 성격이 이어지는 것처럼 처리하면 수백 년의 역사를 하나의 갈등으로 만들 수 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도 자연스럽게 현재의 일본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넘어온다.

세 번째는 피해와 응징의 결합이다. 

한국인이 처음부터 강하면 재미가 없다. 먼저 당하고 빼앗기고 무시당해야 한다. 독자의 분노가 충분히 쌓인 뒤 반격이 시작된다. 감춰진 진실이 드러나고 음모가 폭로되며 현실에서는 어려웠던 승리를 소설 속에서 얻는다. 피해→분노→반격→응징. 이것은 대중소설로서는 매우 효과적인 구조다. 실제 역사에서 얻지 못한 승리를 허구에서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민족적 우월감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일본의 고대문명이나 문화가 한반도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해 그 영향의 범위를 크게 확대하면 이야기는 ‘일본은 우리에게 배웠다’는 쪽으로 움직인다. 군사적 패배의 기억을 문화적 우월감으로 뒤집는 것이다.

이때 일본이라는 외부의 상대는 한국 내부의 갈등까지 지워준다. 좌우도 남북도 지역도 잠시 사라지고 ‘우리 민족’이라는 하나의 주인공이 만들어진다. 개인의 원한보다 민족의 원한이 크고, 개인의 승리보다 민족의 승리가 통쾌하다.

김진명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이 공식을 가장 대담하게 활용한 작품 가운데 하나다. 1993년 출간된 이 소설에서 한국은 핵무기를 통해 일본에 맞설 힘을 갖는다. 남과 북마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가까워진다. 현실의 군사적 힘과 분단이라는 제약을 소설이 한꺼번에 뛰어넘은 것이다. 독자가 얻는 것은 국제정치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라기보다 ‘강한 한국’이라는 대리만족이었다.

같은 작가의 ‘황태자비 납치사건’은 민비 시해를 현대 일본으로 가져왔다. 과거의 사건을 현대의 범죄와 연결함으로써 역사 문제가 추리소설의 동력이 된다. 독자는 범인을 추적하면서 동시에 과거에 묻혀 있던 일이 세상에 드러나는 쾌감을 맛본다.

조정래의 ‘아리랑’은 성격이 다르다. 대중 스릴러가 아니라 방대한 대하소설이고 문학적 평가 역시 별도로 해야 한다. 다만 많은 독자가 한일병합기의 모습을 역사서보다 소설을 통해 접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을 따라가며 형성된 시대의 인상은 실제 역사 지식과 뒤섞이기 쉽다. 허구가 역사적 기억을 만드는 힘을 보여주는 사례다.

최인호의 ‘잃어버린 왕국’에서는 응징 대신 문화적 자존심이 앞선다.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소재로 고대 일본문명에 대한 한반도의 영향을 크게 부각했다. 여기서는 일본을 군사적으로 이길 필요가 없다. ‘우리가 가르쳐준 나라’라는 인식만으로 독자가 원하는 보상이 이루어진다.

물론 이 작품들의 성공을 반일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의 필력과 재미, 출간 당시의 사회 분위기, 출판시장의 조건이 함께 작용했다. 서로 성격이 다른 작품들을 같은 종류의 반일소설로 묶는 것에도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현상은 살펴볼 만하다.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감정이 소설의 흥행 자원이 되고, 성공한 소설이 다시 그 감정을 확대하는 과정이다. 작가는 독자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본을 가져다 쓰고, 독자는 소설에서 만난 일본을 다시 자신의 역사 인식 속에 집어넣는다.

그 과정이 반복되면 허구와 역사 사이의 경계도 흐려진다. 소설에서 읽은 이야기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어느 순간 역사적 사실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 대중소설이 역사 인식에 미치는 영향은 바로 여기에서 생긴다.

그래서 한국의 반일감정을 연구하려면 정치인의 발언이나 역사교과서만 볼 일이 아니다. 한 시대에 어떤 소설이 수십만, 수백만 독자에게 읽혔는지도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물어볼 필요도 있다.

“우리는 일본을 역사에서 배웠을까? 아니면 소설에서 만난 일본을 역사라고 기억하게 된 것은 아닐까?”


◆ 松山(송산) 정광제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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