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은 지난 7월까지 매달 외환보유액과 함께 주요국 순위를 공개했지만, 9월 3일 발표한 8월 말 외환보유액 자료에서는 25년 넘게 제공해 온 순위표를 삭제했다. 사진은 지난 7월 한국은행이 공개한 주요국 외환보유액 비교자료. [사진=한국은행·연합뉴스 ]한국은행이 25년6개월 동안 매달 공개해 온 대한민국 외환보유액의 세계 순위를 보도자료에서 돌연 삭제했다. 사전 예고도 없었다.
논란이 일자 한은은 국가별 경제 규모와 대외 포지션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 순위는 분석적 가치가 크지 않으며, 필요한 경우 국제통화기금(IMF)이나 각국 중앙은행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그렇다면 국민은 묻지 않을 수 없다.
“25년간 한국은행에서 보던 통계를 이제 IMF에서 찾아봐야 한다면, 한국은행은 왜 있는가.”
한은의 설명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외환보유액의 절대 규모만으로 각국을 한 줄로 세우는 것은 국가의 외환건전성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경제 규모도 다르고 단기외채와 대외채권·채무 구조도 다르다. 외환보유액 순위 하나만으로 대한민국의 외환 방어력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은은 서로 다른 두 문제를 섞고 있다.
순위의 경제적 의미가 약해진 것과 통계자료로서의 가치가 사라진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각국의 외환보유액은 기초적인 대외금융 데이터다. 세계 순위는 이 원자료를 금액순으로 배열한 단순 비교자료다. 순위 하나만으로 외환건전성을 평가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해서 국제 비교자료로서의 가치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통계에는 무엇보다 시계열의 연속성이라는 가치가 있다. 2001년에는 몇 위였고, 2008년에는 어디까지 올라갔으며, 이후 어느 시기에 상승하고 하락했는지를 같은 기준으로 장기간 비교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데이터다. 25년 넘게 같은 형식으로 축적해 온 비교항목을 중단하면 한국은행이 제공해 온 국제비교 시계열의 공표 연속성도 그 순간 끊긴다.
따라서 한은이 해야 할 일은 삭제가 아니라 보완이었다.
“단순 금액 순위만으로 대외건전성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을 붙이고,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외채 비율이나 순대외금융자산 등 보완지표를 함께 제시하면 된다. 순위 변동에 금 가격과 환율 등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
통계의 의미가 달라졌다면 설명을 더해야지, 통계를 없앨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번에 사라진 자료는 몇 차례 시험적으로 게재한 참고표가 아니다. 한은은 외환위기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던 2001년 2월부터 주요국 외환보유액을 비교해 대한민국의 위치를 알려왔다.
25년 6개월 동안 유지해 온 공표방식을 바꾸면서 국민에게 사전에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런 뒤 “필요하면 IMF 자료를 보라”고 한다면 중앙은행의 존재 이유까지 묻게 된다.
국민이 IMF 데이터베이스와 중국·일본·스위스·인도 등 각국 중앙은행 자료를 직접 찾아 같은 기준으로 정리해야 하는가.
한국은행이 바로 그 일을 해왔기 때문에 국민과 시장은 매달 한은 자료만으로 대한민국 외환보유액의 국제적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국가통계를 둘러싼 비슷한 논란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한미일보는 지난 4월 국가데이터처의 ‘삶의 만족도 80.8%’ 통계 마사지 의혹을 단독 보도했다.
같은 계열의 삶의 만족도 데이터가 불과 몇 주 전에는 평균 6.4점으로 제시됐지만 이후에는 0~10점 척도 가운데 6점 이상 응답자를 묶어 ‘80.8%가 삶에 만족한다’는 비율형 지표로 제시됐다. 취재 과정에서는 이러한 처리방식을 뒷받침하는 공식 지침도 확인되지 않았다.
두 사건은 방식이 다르다. 국가데이터처 논란은 같은 원자료의 가공·표현방식을 바꾼 것이고, 이번 한은 사태는 장기간 제공해 온 비교자료를 공표 대상에서 제외한 것이다.
그러나 공통된 질문은 하나다.
“누가 어떤 기준과 절차로 국민에게 보여줄 통계의 모습을 바꾸고 있는가.”
현재까지 외환보유액 숫자 자체가 조작됐다고 볼 근거는 없다. 따라서 이번 사안을 숫자의 ‘통계 조작’으로 단정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통계기관이 장기간 유지해 온 공표기준을 충분한 설명 없이 변경했다는 데 있다.
숫자를 직접 고치지 않더라도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지에 따라 국민이 받아들이는 현실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국가통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에 유리한가 불리한가가 아니라 ‘일관성과 투명성’이다.
외환보유액 세계 순위가 대한민국 경제의 건강상태를 판정하는 절대지표는 아니다. 순위가 몇 계단 내려갔다고 외환위기가 오는 것도 아니고, 올라갔다고 경제가 건강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의미가 제한적인 데이터와 가치가 없는 데이터는 다르다.
그 데이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는 시장과 연구자, 언론과 국민이 판단할 문제다. 중앙은행이 먼저 “분석 가치가 낮다”고 판단해 25년간 제공한 비교자료를 없애버리면 정보 제공기관이 정보의 가치까지 대신 결정하게 된다.
한은이 불리한 정보를 감추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순위표를 다시 공개하면 된다. 그 옆에 한계를 설명하고 더 정확한 대외건전성 지표를 함께 제시하면 된다.
그리고 누가, 언제, 어떤 근거와 절차에 따라 25년 6개월간 유지한 공표방식을 바꾸기로 했는지도 밝히면 된다.
불편한 통계까지 공개할 수 있는 것이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다. 국민에게 보여줄 통계를 골라내는 것이 독립성은 아니다.
25년간 한국은행에서 확인해 온 자료를 이제 IMF에서 찾아보라는 말이 한은의 최종 답변이라면, 국민 역시 마지막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은행은 왜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