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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춘 칼럼] 서산에 해지듯 멸망한 조선왕조
  • 신동춘 자유통일국민연합 대표, 행정학박사
  • 등록 2025-09-27 19: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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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춘 자유통일국민연합 대표, 행정학박사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해야 했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북방의 중국 몽골의 영향이 압도적이었으나 조선 후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이르러서는 해양세력(일본 미국 영국 등)과 대륙세력(중국 러시아 등) 간 각축의 장이 되었다.


열강의 힘이 부딪치는 곳에서는 국제정세의 객관적이고 냉엄한 인식하에 외교 역량과 국력이 뒷받침되어야 생존할 수 있다. 조선왕조는 필요한 역량을 갖추지 못하여 결국 서산에 지는 해와 같이 왕조의 종말을 고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왕조의 국가 경영에 대한 치열한 반성을 토대로 현재를 사는 대한민국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조선왕조는 백성의 배를 채워주었나? 경제가 매우 피폐하여 많은 백성은 초근목피로 연명할 때가 허다했고 조선 후기에는 수많은 민란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배를 채워주기는커녕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가 심하였으니 (갓난 아기에게 군포를 부과하는 황구첨정, 공물을 대납하고 백성들에게 비싸게 되파는 방납 등) 어사또 이몽룡은 변학도의 학정을 꾸짖는 시를 썼다.


금 술잔의 아름다운 술은 일만 백성의 피요

옥쟁반의 맛난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의 농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의 소리 높았더라.


조선왕조는 나라를 지킬 만큼의 군대와 무기가 있었나?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이미 조총으로 무장을 해서 부산부터 별다른 저항이 없이 한양성에 당도할 정도였다. 농민으로 구성된 관군은 훈련과 무기 부족 및 열세로 패전을 거듭했고, 하는 수 없이 의병, 승병 등의 민초가 적군에 대해 저항하였다. 양반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양반 귀족들은 하인과 노비를 위해 무엇을 했나? 후기에 일부 귀족들은 돈을 받고 노비를 면해주었으나 노비는 전인구의 40%에 달할 만큼 철저히 봉건적인 신분사회를 유지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의 지폐에는 아직도 이황 이이 신사임당 등 조선 중기의 성리학 대가와 그의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일본 지폐와 달리 실학 개화 개혁을 주장한 인물들은 전혀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TV 드라마나 영화는 궁중의 암투, 당쟁사화, 골육상쟁을 즐겨 소재로 하고 있는데 국민이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국토는 황폐해졌고, 백성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시 조정의 무능과 전쟁의 참혹함을 반성하는 징비록을 썼는데 조선왕조는 이를 금서로 정하였고 후에 일본으로 흘러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출간되었다.


영정조 시대에는 실학과 개화사상, 천주교 등의 개혁 사조로 중흥의 기운이 보였으나, 조정의 외면과 문약 무능으로 그 어느 것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 후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지속되었고, 최익현의 위정척사 운동 등 서양을 배척하는 풍조가 지배하였다. 1811년 마지막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보낸 후, 조선은 서세동점의 국제정세에 깜깜이로 고립을 자초했으며, 청나라, 일본, 러시아의 조선왕조에 대한 지배 야욕으로 각축을 벌이는 상황이 되었다.


청나라는 기득권 주장을 하며 조선을 속방으로 유지하려 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미국과의 첫 조약)에서 조선이 청나라의 속방이라는 조항 삽입을 시도하였고, 조선의 미국 공사 파견 시에는 청국의 허락을 요구하며 무도한 외교 간섭을 하였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1885년 거문도를 점령했다. 1883년 미국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조선 땅에 들어온 이후 고종의 의료·외교 고문을 맡았고, 병원·학교·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조선 땅에 개화 문명을 들여왔다. 미국은 조선을 지배하려는 야심이 없고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가난과 무지에 찌들은 조선의 백성들을 위하여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살았다.


조정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 대응은커녕 내부 파벌(친청파,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간 암투가 벌어졌고, 각 세력은 외부 세력을 이용하여 권력을 유지하려 했으며 조선을 '4분 5열'의 혼란 상태로 만들었다.


친일 개화파 김옥균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1884)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조정을 개혁하려 했으나 삼일천하로 끝나고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 후 민비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되었다. 청의 위안스카이는 대원군을 북경으로 압송해 3년간 연금하고, 김 씨 왕족과 그녀의 몸종까지 첩실로 데려가는 등 망나니짓을 일삼으며 청의 지배력을 과시하였다. 을미사변(1895)은 일본이 민비를 시해한 사건으로, 청나라 세력을 등에 업은 민비에 대한 보복이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근대화 개혁이 시도되었으나 실패하였고,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조선은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해 청일전쟁(1894~1895)을 촉발하였다. 청국은 일본에 대패하였고 종이호랑이로 드러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고종이 미국 영사관으로 피신하려다 실패한 춘생문사건 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며 (아관파천) 신변 안전을 요청하며 러시아의 간섭을 초래하였다. 친러파의 득세를 가져왔으며 김홍집 총리대신은 고종의 포살명령으로 군중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고종은 통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운산 금광 채굴권 등 여러 이권을 열강에 헐값으로 넘겼고 벼슬자리까지 팔았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일전을 준비하며 영일동맹을 맺고 러일전쟁을 일으켰는데, 전 세계의 예상을 깨고 일본이 승리하며 조선에서의 러시아의 영향력이 퇴조하였다. 을사보호조약(1905)으로 조선은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으며 민영환, 조병세 등 우국지사들은 이에 저항하며 자결하였다. 가즈라-태프트 밀약은 미국도 조선에서의 일본 지배를 용인하여 일본은 한반도에서 지배력을 굳히기에 이르렀다.


국권 상실이 가속화되면서 이승만의 만민공동회, 국채보상운동, 신문 발행 등 민중 계몽과 저항 운동이 전개되었고, 최익현·신돌석 등의 의병(의로운 군대)이 마지막 군사적 저항을 벌였으나 역부족이었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고종과 매국노 이완용 일당은 작위와 거액의 돈을 받고 호화로운 삶을 이어갔는데, 이는 조정이 외세에 매수되어 나라를 팔아넘긴 무능과 부패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왜 왕조가 망하게 되었는지 성찰은 하지 않고 끊임없는 피해자 코스프레로는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없다. 아직도 한반도의 북쪽에는 신기하게도 왕조국가가 존재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조선왕조 멸망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국제정세와 보편적인 세계사의 흐름에서 벗어난 전근대적인 폐쇄적 민족주의로는 국가의 생존이 어렵다. 현시대의 혼탁한 정치 현상은 조선왕조 국왕, 양반 관리들의 저열한 정치 DNA를 답습한 결과가 아닐까? 모름지기 지도자와 국민은 함께 나라가 직면한 격랑의 파고를 헤치며 부국강병(富國强兵)으로 나라를 지키고 번영을 이룩하는 엄중한 사명을 감당하여야 한다. 


신동춘 자유통일국민연합 대표, 행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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