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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책임을 남한에 떠넘기다 [松山 칼럼ㅣ종북 좌파 80년사 ④]
  • 松山 시인
  • 등록 2026-01-10 18: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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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 직후 한반도는 미·소가 공동으로 점령한 공간
  • 유엔, 무기한 공백보다 남한 총선거로 국가 구성 결정

1948년 8월15일 서울 종로구 중앙청에서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하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 [사진=퍼블릭도메인] 

“가해자 남한 vs 피해자 북한” 같은 구도는 역사 설명이 아니라 정치 선전이다. 

 

분단은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강대국 점령과 그 아래서 이루어진 정치적 선택들의 누적된 결과다. 그런데 종북 좌파 담론은 해방 직후부터 지금까지 분단을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죄인 찾기 게임으로 바꿔 왔다. 

 

그 게임은 “분단의 책임은 남한, 혹은 미국에 있다”는 결론으로 끝난다. 참 편리한 방식이다. 왜냐하면 북쪽의 선택과 소련의 점령 통치를 통째로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분단을 만든 힘 가운데 하나였던 북의 결정을 현실에서 삭제하고, 남한만을 재판정에 세운다.

 

‘미군정’만 강조, ‘소련군정’은 축소

 

해방 직후 한반도는 미·소가 군사적으로 점령한 공간이었다. 이 점을 빼고 분단을 말하면, 공평한 분석은 불가능하다. 북쪽은 소련의 군정·행정 체계 아래 재편되었고, 이 체계는 통상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지속되었다. 

 

그 성격은 “한국이 스스로 결정하는 정치”라기보다 “점령 권력이 설계하고 관리하는 정치”에 가까웠다. 행정 인사, 치안, 정치 조직, 선전 체계가 점령군의 통제 아래 놓였고, 다원적 정치 경쟁은 구조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종북 좌파는 분단을 말할 때 이 기본 전제를 흐린다. ‘미군정’은 확대하고, ‘소련군정’은 축소한다. 균형을 잃은 역사서술에서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는 한국 문제를 국제적 틀에서 정리하려는 시도였다. 여기서 논의된 신탁통치 구상은 미·소·영·중 4개국이 참여하는 관리 체제를 상정했다. 이 결정은 한국 사회에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고, 찬탁·반탁 논쟁이 정치의 중심을 차지했다. 

 

1946년부터 1951년까지 사용된 미국 뉴욕 플러싱의 총회 회의장. 1947년 11월14일에 채택된유엔 총회 결의 제112호는 한반도 독립 및 통일과 관련해 인구 비례에 따라 남북한 전역에서 자유로운 총선거를 실시, 독립적인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했다. [사진=퍼블릭도메인] 

그러나 중요한 것은 찬탁이냐 반탁이냐 그 자체가 아니다. 분단을 결정한 것은 구호가 아니라 그 이후 어떤 제도와 절차가 실제로 작동했는가다. 종북 좌파는 이 질문을 회피했다. 

 

대신 “남한이 반탁을 이용해 분단을 만들었다”는 단선적 도식을 남겼다. 그러나 반탁이든 찬탁이든, 그것만으로 저절로 분단되지는 않는다. 분단은 권력의 선택과 제도의 고착으로 완성된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는 한국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설치는 최소한의 국제적 절차를 통해 한반도에 정부를 수립하려는 시도였다. 

 

유엔 총회 결의 112호(Ⅱ)는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고, 그 대표로 정부 수립에 나아가자는 취지를 분명히 했다. 이 지점에서 핵심은 ‘선거’라는 절차다. 선거는 통일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정당성의 출발점을 제공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선거는 한반도 전체에서 치러지지 못했다. 유엔의 관찰과 접근 자체가 북쪽에서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유엔 기구가 북부 지역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한반도 전체 선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이 조건에서 남한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선거를 무기한 연기해 공백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가능한 범위에서 국가를 구성할 것인가. 결국 1948년 5월10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같은 해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단일 정부 실패 책임을 남한에 떠넘기는 위선

 

이 흐름은 “남한이 분단을 원해서”라기보다, 이미 분단이 점령과 북의 폐쇄로 굳어지고 있던 조건 속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절차를 선택한 결과다.

 

반대로 북쪽 역시 선택을 했다. 1948년 8월25일, 북은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실시했다고 주장하며 체제를 제도화했고, 9월9일 국가 수립을 선포했다. 

 

이는 남쪽의 정부 수립에 대한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북 자체의 국가화 선택이었다. 즉, 분단의 제도적 고착은 남쪽만의 행위가 아니라, 북쪽의 별도 국가 수립과 함께 완성되었다. 이 대칭을 인정하지 않으면, 분단의 역사는 설명이 아니라 선동이 된다.

 

종북 좌파 담론은 이 대칭을 의도적으로 무너뜨린다. 남쪽의 정부 수립은 “분단의 원죄”로 규정하면서, 북쪽의 국가 수립은 “불가피한 방어” 혹은 “역사적 필연”으로 선전한다. 

 

그러나 사실은 둘 다 국가 수립이다. 둘 다 한반도 단일 정부라는 목표를 사실상 해체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책임은 남한에만 귀속된다. 이것이 위선이다.

 

더 비겁한 지점은, 이 담론이 언제나 도덕의 옷을 입는다는 점이다. ‘평화’ ‘민족’ ‘통일’ 같은 말로 시작하지만, 실제로는 사실 확인과 책임 분석을 회피한다. 

 

분단의 책임을 묻는다면, 적어도 몇 가지 질문은 피할 수 없다. 북쪽이 소련 군정 아래에서 일당체제를 고정하고 반대파를 제거한 과정은 왜 분단의 원인 목록에서 빠지는가. 

 

유엔 절차가 한반도 전체에서 작동하지 못하도록 만든 현실은 왜 남한의 책임으로만 환원되는가. 1948년의 별도 선거와 별도 국가 수립이 분단을 제도화한 사실은 왜 “정당한 대응”이라는 말로 세탁되는가.

 

이 질문들 앞에서 종북 좌파는 늘 침묵한다. 혹은 “지금 그 말 할 때냐”는 감정의 방패를 꺼내 든다. 그러나 감정은 설명이 아니다. 분단은 한 번 생기면 그 뒤로 모든 세대가 비용을 치른다. 안보 비용, 외교 비용, 내부 갈등의 비용은 세대를 넘어 누적된다. 그렇기 때문에 분단 책임을 말할 때는 최소한의 정직이 필요하다.

 

책임을 남한에만 떠넘기는 종북 좌파의 담론은 정직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는 언제나 옳다”는 자기 면죄부이며, 북한 체제의 형성과 소련 점령 권력의 개입을 지워버리는 역사 왜곡이다. 

 

비겁한 종북 좌파는 분단을 극복하겠다고 말해 왔지만, 실제로는 분단을 이용해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데 더 열중했다. 그 결과는 분단은 남고, 선동은 커지고, 책임은 사라졌다.

 

시인, 역사·철학연구자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로 전 이승만학당 이사를 지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으며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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