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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山칼럼ㅣ종북 좌파 80년사] ⑲1964 통일혁명당 창당 시도
  • 松山 작가
  • 등록 2026-04-10 21:5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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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부의 불만과 외부 전략이 만났을 때

왼쪽부터 통일혁명당 주모자 김종태와 이문규, 김질락(김종태 조카). 

1964년의 서울을 떠올려보자. 4·19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지 불과 몇 해가 지났고, 1961년 5월16일 군사정변으로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상태였다. 제도는 유지되고 있었지만, 정당성과 방향을 둘러싼 논쟁은 거칠었다. 

 

1964년 6월, 한일회담을 둘러싼 반대 시위는 정점을 찍는다. 6월3일, 서울 시내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대학생과 시민 수만 명이 거리로 쏟아졌다. 이 장면은 단순한 외교 문제를 넘어, 체제 전반에 대한 불신이 표면으로 올라온 사건이었다.

 

북한서 정치·군사 교육받은 김종태가 주도

 

이 시기를 북한은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4·19 이후 남한 사회를 분석하면서 “정권은 무너졌지만 혁명은 완성되지 않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유는 조직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흥적인 봉기로는 체제를 바꿀 수 없으며, 이를 이끌 ‘당’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통일혁명당 조직도

이 결론은 이후 대남 공작의 방향을 바꾼다. 선전이나 간첩 활동을 넘어서, 남한 내부에 직접적인 지하당을 심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이 전략의 핵심 인물이 김종태다. 그는 북한에서 정치·군사 교육을 받은 뒤 남한으로 내려왔다. 단순한 사상 주입이 아니라, 조직 구축 기술을 익힌 인물이었다. 연락망 구축, 암호 사용, 자금 운용, 위장 조직 운영 등 지하당의 기본을 체계적으로 훈련받았다. 그의 임무는 명확했다. 남한 내부에서 혁명 조직을 만드는 것이었다.

 

1964년 3월, 김종태는 김질락, 이문규 등과 함께 창당 준비 조직을 만든다. 이 조직은 공식 명칭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내부적으로는 당 건설을 목표로 움직였다. 이 시점에서 이미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합법 정당이 아니라 지하당, 공개 정치가 아니라 은밀한 조직이었다.

 

이들이 택한 방식은 노골적인 정치 활동이 아니었다. 대학가와 지식인 사회를 중심으로 외곽을 넓혀 갔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주변에는 다양한 독서회와 토론 모임이 있었고, 젊은 지식인들이 모여 시대를 논하고 있었다. 통혁당 조직은 이 공간에 스며들었다. 정치 조직이 아니라 사상 모임처럼 위장했다.

 

술자리와 토론 결합된 포섭 작전

 

잡지 ‘청맥’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문학과 사상을 다루는 잡지였지만, 실제로는 인맥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글을 쓰고 읽는 관계가 곧 조직 연결로 이어졌다. 여기에 학사주점과 같은 공간이 더해졌다. 술자리와 토론이 결합된 공간은 자연스럽게 사람을 묶는 기능을 했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조직을 키우는 방식이었다.

 

청맥(靑脈)은 합법을 가장한 대중 잡지로 신영복·김질락 등이 중심이 되어 청년과 지식인층을 대상으로 반정부 사상을 전파하고 통혁당의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이 시기 등장하는 인물군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영복, 임중빈, 이재학, 김진환 등 다양한 배경의 인물들이 연결된다. 교수, 출판인, 학생, 지식인 등 구성도 다양했다. 이 점이 중요하다. 특정 계층이 아니라, 여러 층위를 연결하는 구조였다는 뜻이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는 이 조직에 좋은 조건을 제공했다. 거리에는 반정부 구호가 넘쳤고, 체제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었다. 통혁당 조직은 이 흐름을 단순한 정책 반대가 아니라 체제 부정으로 끌어가려 했다. 반대의 언어를 혁명의 언어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1965년 11월, 조직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김종태를 중심으로 통일혁명당이 구성된다. 당의 목표는 ‘조국 통일’이었지만, 그 방식은 북한식 혁명 노선이었다. 선거와 제도 개혁이 아니라, 체제 전환을 목표로 했다. 이 시점에서 조직은 명확한 정치 목표와 구조를 갖게 된다.

 

조직 내부는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다. 핵심 지도부는 북한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고, 중간 간부는 지역 조직을 관리했으며, 외곽 조직은 학술·문화 활동을 담당했다. 서로의 전체 구조를 알지 못하도록 설계되었다. 일부 구성원은 자신이 정치 조직에 속해 있다는 사실조차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1967년 6·8 총선 이후 상황은 다시 격화된다. 부정선거 논란이 확산되면서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진다. 통혁당 조직은 이 흐름에 적극 개입한다. 학생 시위, 노동 문제, 정치 불신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체제 전반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공개 정치의 혼란이 지하 조직의 기회로 전환되는 구조였다.

 

北서 혁명열사로 추앙된 김종태

 

결국 1968년 8월, 중앙정보부는 통일혁명당 사건을 발표한다. 대규모 검거가 이루어지고 100명이 넘는 인물이 체포된다. 주요 인물들은 재판에 넘겨지고, 조직의 실체가 드러난다. 김종태는 사형을 선고받고 1969년 7월10일 형이 집행된다.

 

1968년 11월 통혁당 재판 당시 사건 관련자들. 피고인석 앞줄 맨 오른쪽이 김종태, 그 옆이 김질락이다. 

이 사건 이후 북한의 대응은 매우 상징적이다. 김종태는 ‘혁명열사’로 추앙되었고, 평양의 주요 공장에 그의 이름이 붙는다. 남한에서 활동한 지하당 책임자를 국가적 영웅으로 기린다는 점은, 이 조직이 어디와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사건에는 또 다른 층위가 있다. 수사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의 불법 구금과 고문이 있었고, 일부 사건은 과장되거나 왜곡된 부분이 있다는 점이 이후 밝혀졌다. 예컨대 관련자 가운데 일부는 장기간 영장 없이 구금되었고, 물리적 폭력을 당한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조직의 존재와 수사의 방식은 무관한 문제다. 통혁당이라는 지하 조직이 실제로 존재했고, 북한과 연결된 구조를 갖고 있었다는 점과, 국가 권력이 법을 넘어선 행위를 했다는 점은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 둘 중 하나만 남기면 사실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1964년 통일혁명당 창당 시도는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다. 대한민국 내부의 불만과 외부 전략이 결합할 때 어떤 형태가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공개 정치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비공개 조직을 통해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방식. 이 구조는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오늘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갈린다. 누군가는 이를 전면 조작으로 본다. 반대로 누군가는 모든 것을 단순한 반국가 범죄로만 규정한다. 그러나 기록을 따라가면 더 복잡한 그림이 나온다. 조직은 존재했고, 동시에 수사에는 문제가 있었다. 인물과 날짜, 사건을 하나씩 짚어야 비로소 전체가 보인다.

 

1964년은 갈림길이었다. 제도 안에서 싸우는 길이 아니라, 제도 밖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길로 들어간 시기였다.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라는 이름과 1964년 3월, 1965년 11월, 1968년 8월, 1969년 7월10일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놓고 보면, 이 선택이 어디로 이어졌는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역사는 구호로 남지 않는다. 이름과 날짜로 남는다.





◆ 松山(송산)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신화가 된 조선’과 ‘다다미 위의 인문학’을 펴냈다. 현재 자유주의 문화운동의 연구와 실천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松山은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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