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의 희곡 ‘서민 귀족(Le Bourgeois Gentilhomme)’을 각색한 연극 ‘귀족수업’. 오르테가는 대중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귀족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사진=생이 아름다운 극단]
1929년,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아직 유럽 전역에 남아 있던 시기였다. 많은 사람들은 인류가 이제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했으니 더 나은 시대가 올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전혀 다른 전망을 내놓았다.
그는 ‘대중의 반역’에서 유럽이 더 큰 혼란과 폭력의 시대로 들어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급속히 성장하는 현상을 보며, 지금까지의 역사와는 다른 규모의 파국이 다가오고 있다고 진단한 것이다.
문명을 공기처럼 흡입하는 대중
결과적으로 그의 경고는 상당 부분 현실이 되었다. 독일은 파시즘에 휩쓸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전쟁 이후에는 여러 나라에서 공산주의 체제가 수많은 사람들의 자유와 생명을 빼앗았다.
흥미로운 점은 오르테가가 지적한 사회적 병리 현상이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특정 계급이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노동자도, 교수도 대중이 될 수 있다. 대중은 소득이나 직업으로 구분되는 집단이 아니라 하나의 사고방식이다.
오르테가가 본 대중의 첫 번째 특징은 문명을 자연처럼 여긴다는 점이다.
우리는 전기를 사용하고 인터넷을 이용하며 마트에서 물건을 산다. 자동차를 타고 비행기를 이용하며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제도와 규칙, 기술과 노력의 축적 위에서 유지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문명은 자연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책임과 희생, 제도와 규칙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러나 대중은 그것을 마치 공기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문명이 유지되는 조건이 무너지기 시작해도 그 위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불만 가득한 응석받이가 된 대중
두 번째 특징은 원리에 대한 무관심이다.
대중은 결과를 소비하지만 원리를 탐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반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르테가는 현대 사회의 전문가들조차 점점 대중화되고 있다고 보았다.
학문은 세분화되었고 전문가들은 자신의 좁은 영역 안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정작 세계를 움직이는 큰 흐름과 근본 원리에 대해서는 관심을 잃어버렸다.
한 분야의 지식은 풍부하지만 삶의 지혜는 빈약한 사람이 늘어나는 현상이다. 그는 이런 인간을 진정한 지식인으로 보지 않았다.
세 번째 특징은 불만이다.
대중은 자신이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따라서 그것이 사라지면 강한 분노를 느낀다.
문제는 그 분노가 성찰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 그런 문제가 발생했는지 분석하기보다 누군가가 해결해주기를 요구한다. 책임보다 요구가 먼저 나오고, 탐구보다 불만이 앞선다. 오르테가는 이런 모습을 응석받이에 비유했다.
네 번째 특징은 자기만족이다.
대중은 자신보다 높은 기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생각과 감정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진정한 존중이 불가능하다. 더 뛰어난 인물도, 더 높은 원칙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르테가는 현대인의 끝없는 말싸움 역시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보편적 이성이라는 공통 기준을 존중하지 않고 각자 자기 주장만 반복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는 점점 더 소란스러워지고, 정작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약해진다. 오르테가가 가장 우려한 것은 그 이후였다.
품위 있는 자립, ‘귀족’이 부활해야
상위의 기준과 목적을 상실한 인간은 결국 허무에 빠진다. 인간은 먹고 사는 존재만이 아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존재다. 그런데 의무도, 책임도, 이상도 사라지면 삶은 공허해진다.
공허해진 사람들은 새로운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당시의 파시즘과 공산주의였다. 오르테가는 그것을 단순한 정치 운동으로 보지 않았다. 의미를 잃어버린 대중이 새로운 종교처럼 매달린 집단적 열광으로 보았다.
오늘날에도 모습은 달라졌지만 현상은 반복된다. 한쪽에서는 돈이 삶의 거의 유일한 기준이 되고 있다. 인간의 가치도, 성공의 기준도, 행복의 척도도 돈으로 환산된다.
다른 한쪽에서는 정치적 종족주의가 강화되고 있다. 자신이 속한 진영의 주장이라면 무조건 옳고, 상대 진영은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이 역시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쉬운 의미 공급 장치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오르테가는 귀족의 부활을 이야기했다. 물론 혈통 귀족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한 귀족은 스스로의 능력과 성취로 권위를 획득한 사람이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우수한 정치 체제로 평가했다. 문제는 민주주의가 유지되려면 현명한 시민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 등장해도 그것을 알아볼 안목이 없다면 사회는 그를 선택하지 못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국민 스스로의 판단력이다.
다수의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사실과 다수가 언제나 옳다는 믿음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다수가 자동으로 권위를 갖는 체제가 아니다. 다수가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스스로의 수준을 높이려 노력하는 체제다.
금융을 이해하면 제도가 보인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경제 교육 열풍은 주목할 만하다. 돈에 대한 관심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돈의 원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돈을 공부하다 보면 금융을 이해하게 되고, 금융을 이해하다 보면 제도와 법을 보게 되며, 결국 국가와 세계의 작동 원리까지 관심이 확장된다.
이 과정은 단순한 재테크를 넘어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오르테가가 말한 지식인의 부활은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려는 사람들, 자기 생각을 끊임없이 검증하는 사람들, 더 높은 기준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대중의 시대를 넘어서는 가장 현실적인 길일 것이다.

◆ 松山(송산)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