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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반도 통치가 남긴 흔적을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글쓴이 : Alee
작성일 : 25-10-24 02:46
조회수 : 995

일본의 한반도 통치가 남긴 흔적을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서론: 동아시아의 서구화의 여명 – 해는 동쪽에서 떠 올랐다.

1853년 일본의 동해안의 에도만 (지금의 동경이 위치해 있는 곳) 에 출현한 미국의 흑선의 대포에 놀란 일본은 미국의 요구에 응하여 서양제국에게 문을 연 후 혼란기를 거치다가 1866년에 300년간 내려온 도구가와 막부 체제는 막을 내리고 왕정 복고가 이루어 진 후 개혁에 착수하는데, 당시의 천황이었던 고메이가 1866년 말에 죽고 1867년 제위에 등극한 명치천황이 이후의 개혁을 주도하여 개혁을 완성하는데 이 것이 바로 명치유신이다.
짧은 시일내에 서양제국과 같은 수준으로 산업화와 국부증진 및 군사력 강화 등의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해 일본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전제주의적 정책을 폈는데 이 모델은 후에 박정희 전대통령에 의해 조국 근대화를 추진하는 기본 방법으로 채택되었다.

이후 일본은 일청전쟁과 일로전쟁에 승리하면서 동아시아의 맹주로서의 자리를 굳히는데, 이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줄곧 정치, 경제, 군사 분야 뿐이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서양 열강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 유일한 비 백인 국가가 된다.
그리고 일청전쟁에 일본이 승리함으로서 조선은 명나라 이래 500년가까운 세월을 국내 정치 문제까지도 사사건건 일일이 중국의 간섭을 받아야 했던 속국의 지위에서 처음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누리게 되고 당시 조선 왕이던 고종은 황제로 승격되어 전하에서 폐하로 불리게 된다.

일청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가 동아시아에서 갖는 의미가 과거 중국과 주변국과의 관계가 중국이라는 종주국과 변방국이라는 속국의 상하관계개념에서 탈피하여 중국도 다른 변방소국도 모두 형식적으로나마 동등한 지위라는 개념을 끌어들임으로서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의 구조가 과거 중화사상에 기초한 구조에서 서양식의 구조로 바뀌었다는 것이라 한다면 일로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서양열강이 동아시아를 필리핀이나 인도식으로 식민지화하겠다는 야욕을 좌절시켰다는 의미가 있다고 볼수있다.

물론 아편전쟁 패배이후 청나라는 이리저리 많은 이권을 서양열강에게 내줘야 했고 일청전쟁 이후에도 이러한 추세는 계속되어 갔지만 일로전쟁을 계기로 만주에서의 러시아의 이권이 일본의 손에 넘어가고 조선이 일본의 보호령이 됨으로서 최소한 동북아는 서양열강이 손을 댈수가 없게 되었다.

일본의 명치유신이 동아시아, 특히 한반도에 남긴 족적

여기서 우리는 명치유신 후에 일본이 세웠던 계획이나 혹은 포부에 대해 “나쁘게“ 혹은 “좋게” 그릴수가 있다.

나쁘게 그리는 방법은 일본이 동아시아를 식민지화 해서 그것을 발판으로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야욕을 품고 우선 조선을 집어삼키고 그 다음에는 만주, 그리고 몽고와 북중국.. 이런식으로 영토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서양열강과 충돌해서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이것이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어 결국 일본은 미국의 원자탄을 맞고 항복하고서 일본의 세계지배야욕은 좌절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물론 좌익계 사람들은 일본의 세계지배야욕은 스탈린의 소련과 모택동의 중공이 좌절시켰고 그래서 새로 생긴 공산국가는 과거 일본의 식민지상태에서 고통받다가 소련과 중공에 의해 해방되어 자주권과 독립을 되찾아 행복하게 살게된 복받은 나라이고 그렇지 않은 일부는 일본 대신에 나타난 미국의 손에 넘어가 아직도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점령된 식민지 상태에서 고통받고 있다고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 일어난 史實을 조사해 보면 소련은 1905년 日露戰爭에서 일본에게 패배하고 난 이후 내내 일본과 휴전중이다가 미국의 원자탄이 일본의 히로시마에 떨어진 이틀후인 1945년 8월 8일에야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으며, 모택동의 八路軍 역시 일본군과 직접 싸운 일이 거의 없었기에 소련이나 중공이 동아시아의 해방자라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지며 오히려 한반도의 분할계획은 스탈린이 제안한 것이고 육이오 사변은 소련과 중공이 북괴 김일성을 사주하여 전쟁을 일으키도록 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좋게 보는 관점이라면 다음과 같다.
미국의 黑船의 대포에 눌려 개방을 한 일본이 명치유신을 거치면서 눈을 뜨고 세상을 돌아보니 온 세계가 서양 열강의 식민지가 되어 백인들 밑에서 노예처럼 살고 있었고, 특히 분개했던 일은 중국 등 과거 오천년의 찬란한 문화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아시아가 이들 서양열강들의 발아래 짓밟혀 수모를 당하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동아시아 만이라도 서양열강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막고 나아가 서양 선진국들과 맞먹는 과학문명의 세계로 변모시켜서 서양열강들이 함부로 넘보지 못하게 해야한다는 모종의 사명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일본 해적 倭寇들의 야만적인 행패때문에 일본에 대한 편견이 있어왔던 중국이나 조선은 물론 남지나해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힌 일본은 일면 섭섭하기도 하고 일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과거 영국이나 미국이 하던 방식을 사용하기로 했고 그 첫 대상이 조선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원래의 의도가 좋았었든 나빴었든 조선의 역사는 이리하여 결국 다음과 같이 흘러가고 말았다.

일본은 조선이란 나라가 크기도 적당하고 특히 인종과 언어, 문화면에서 일본과 많은 공통점을 가진 점에 착안하여 영국이 스콧틀랜드와 아일랜드에 써먹었던 동화정책을 사용하여 조선을 일본화 하기로 했었다.
이등박문은 조선의 반발을 사지 않기위해 조선을 강제로 합병하기 보다는 영국이 스콧틀랜드나 아일랜드에 사용했던 방식을 도입하기로 하고, 조선의 황실을 그대로 유지한체 일본의 황실과 혼맥을 맺어 일본과 이원제국의 형태로 결합시킨 후 점차로 동화시키는 쪽으로 추진하려 했지만 사태를 오해한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암살하는 바람에 강경파 군부가 득세하여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되기에 이른다.

조선을 합병한 일본은 서양열강의 식민지 동화정책의 수순을 그대로 답습하는데, 우선 첫 십년동안은 무단정책을 실시하여 일면 조선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반항을 할수 없도록 하는 한편 조선 주민의 절대 다수인 평민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기존 권력구조를 해체하여 양반 제도나 노예 제도 등을 폐지하고 자유바람을 일으켜 사회 미풍양속을 흐리게 함으로서 일본의 지배에 대해 조직적인 저항이 일어나는 것을 막았다.

또한 각 공공기관을 조선시대의 권위주의적인 색갈을 제거하고 주민들을 위한 봉사기관의 형태로 얼굴을 바꾸어 일반 서민들이 별 두려움 없이 면사무소나 지서 같은 곳을 방문하여 어려운 일에 대해 도움을 받을수 있도록 함으로서 주민들이 일본의 지배를 조선 시대보다 낫게 여기도록 이끌어 갔다.
일본의 무단정책은 상당히 효과가 있어 한일합방 십여 년째 되던 해에 일어난 전국적인 독립운동이었던 삼일운동은 결국 오래가지 못하고 주저앉게 되고 일본의 동화 정책은 문화정책의 장으로 넘어간다.

일본은 조선 곳곳에  신식 교육기관과 산업시설을 세워 조선사람들을 과거 중국의 속국이던 시절 숭상하던 한자문화를 구시대의 낡은 것으로 보고 일본이 소개하는 서양문물을 새 시대에 맞는 합리적이고 편리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해 갔다.
그런데 일본의 이러한 정책은  일본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고 그 효과는 오늘에 와서 대한민국이 세계의 예상을 깨고 일등국가의 대열에 들어서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첫째 사건은 한글의 부활이다.
중국이 그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오천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지속적이고 통일된 문화를 간직할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한자 덕분이다.
이 한자 덕에 수천년 전에 쓰인 고문서라도 대졸 정도의 학식을 갖춘 사람이 字典을 참고 삼으면 별로 힘들이지 않고 이해할 수 있다.
그 대신 그 많은 한자를 터득해서 과거시험을 치를수 있을 만큼 읽고 쓰려면 그 한자를 배우는 데만도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소요되기에 중국인들의 거의 대부분이 사실상 문맹의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그런데도 중국이 아직까지도 한자를 버리지 못하는데는 나름대로 절실한 이유가 있다.
즉, 중국이 중국인들과 조선 같은 주변 속국들에게 표음문자가 아닌 표의문자인 한자를 강제로 사용케 하고 일체의 자생적인 표음문자를 사용하거나 만들지 못하게 했던 이유는 세가지 이유에서이다.

우선 광대한 영토에 흩어져 살고 있는 엄청난 인구의 중국인들을 통일된 체제안에 가두어서 지속적으로 통제하는데 한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광대한 중국의 각지에 수천년동안 흩어져 살면서 달라진 중국의 口語를 표음문자로 쓰게 놓아두는 경우 각 지역의 언어는 사투리가 아닌 완전히 독립된 언어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지역간의 의사소통의 단절을 가져오게 되며 각 지역이 지역적인 특수성을 주장하게 되면 지역민족주의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은 중국의 영구한 분열로 이어질 것이다.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라틴어라는 같은 언어를 쓰던 남부유럽 일대의 舊 로마가 훗날 프랑스와 이태리와 스페인과 포르튜갈과 로마니아 등 다섯 나라로 갈라진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로마가 중국처럼 표의문자를 썼더라면 중국처럼 合久必分 分久必合의 사이클을 되풀이 하면서 오늘까지 단일체제를 유지해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은 표음문자의 출현을 막고 표의문자로 각 지방간의 의사소통을 하게 해야 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중국 안에 산재해 있는 소수민족들을 중국인으로 동화하기 위해서도 표의문자인 한자의 사용을 강제로 실시해야했다.
소수민족을 문화적으로 동화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고유 언어를 말살해야 하는데 표음문자를 쓰게 하면 소수민족들의 언어가 보존되어 동화정책은 물건너가게 될 뿐 아니라 주변 중국인들에게까지 그 표음문자가 보급되면서 중국인들이 그 편리한 표음문자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도리어 중국인들이 소수민족에 동화되는 일이 생기게 되므로 표음문자를 못쓰게 하고 표의문자를 강제로 사용하도록 해야만 했다.

중국이 한자를 고집해야 했던 마지막 이유를 든다면 주변 속국들을 중국의 지배하에 묶어두기 위해서도 표음문자가 아닌 표의문자인 한자의 사용을 강제해야 했던 것이다.
주변속국들이 자기들 나름대로의 표음문자를 개발해서 쓰게되면 속국의 동화정책은 불가능 해질뿐 아니라 변방 속국들 중 언어가 비슷한 나라들끼리 그 표음문자를 같이 사용하게 되어 한자문화 이외의 다른 거대한 문화권이 형성되고 이것이 중국 내에까지 넘어들어와 중국인들이 편리한 표음문자에 매력을 느껴 그 문화권에 흡수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도 표음문자의 사용은 더더욱 안되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중국은 오로지 한자만을 사용토록 강제적인 제도를 만들어 중국 내부는 물론 주변의 속국에게도 모든 문서는 한자로만 쓰도록 강요를 해왔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조선과 월남은 다른 변방의 민족들과는 달리 문화적인 소질이 탁월하기에 이들이 자기 나름데로 표음문자를 개발하지 못하도록 엄중히 감시를 하는 바람에 이 제도의 틀에서 이십세기 까지도 벗어나지 못했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실 때 명나라가 왜 그토록 예민한 반응을 보였었는지 독자들은 이제 이해가 갈것이다.

중국의 강요때문에 한글을 만들어 놓고도 일체의 공문서는 한자로만 작성토록 강요하였고 조선시대의 학교였던 서당에서도 한글은 일체 가르치지 못하게 하였으며 과거시험으로 부터 시작해서 역관과 의원등을 뽑는 각종 전문직 자격시험 역시 모두 한자로만 치게 함으로서 문화생활에 한글이 파고 들 틈을 막았을 뿐 아니라 한글로 쉽게 표기할수 있는 몽고말이나 만주말, 터키어, 일본말등 서로 연관이 있는 북아시아 언어가 한글로 표기되는 일이 없도록 극도로 경계를 했었다.
그 때 막무가내로 온세상에 한글을 보급했더라면 지금쯤 만주와 내외몽고를 아우르는 동북아 전체는 물론 잘하면 러시아까지도 아우르는 광대한 한글 문화권을 이룩할수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어쨌거나 갑오경장으로 조선이 중국의 속국의 지위에서 형식적으로 나마 독립국의 지위를 갖게 되면서 그간에 안방 여자들의 세게에만 갇혀 있었던 한글이 해방이 되었으며 한국인들은 처음으로 제도적인 속박을 받지 않고 자기나라 말을 자기나라 글로 마음데로 쓸수있게 되었다.
한글로 쓴 신소설이 등장했고 국한 혼용이긴 하나 한글로 된 신문도 생겼으며 한글은 사회 전반에 급속히 보급 되어갔다.

물론 그 이전 조선시대에도 한글이 쓰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단지 한글이 한자를 밀어내고 “참으로 조선사람들이 그 뜻을 펴아나는” 의사표현의 수단의 지위를 차지한 것은 갑오경장 이후부터라고 보아야 한다는 뜻으로 필자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한글은 그후 최현배와 이희승 등 많은 한글 학자들에 의해 더욱 연구되고 정비되어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나오고 그후 해방이 되자 50년대 이승만 대통령 시절 전국적으로 전개된 文盲退治 運動에 의해 더욱 더 보급되어 60년대가 되었을 때는 문맹률이 거의 제로로 떨어져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조국 근대화를 짧은 시일안에 달성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어주었다.
그 이유는 일자리를 찾아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오는 젊은 남녀들을 당시 도시지역에서 급속히 늘어나고 있던 공장에서 고용하면서 이들 새로 고용된 젊은이들 모두가 읽고 쓰는데 큰 문제가 없었기에 이들을 숙련공으로 훈련시켜서 생산현장에 투입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한글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한일합방이 가져온 결과는 한국의 근대화다.
이것은 구한말 당시 숭중 진러적이고 반미 반일적이었던 구시대 기득권 새력의 인간들이 조선백성들이 외부 정보와 진보된 서구문명에 눈을 뜨는 것을 방해하기위해 자행했던 수구적이고 쇄국주의적 행태, 예를 들어 청나라의 보호아래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이하응이나 고종, 민비 등의 행적을 보면 누가 뭐라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일본의 식민지정책이 남긴 흔적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유럽제국이 자기들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인도 등 남아시아 일대에 남긴 그것과는 天壤之差로 다른데가 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말레이지아 등 인도지나 반도 제국과 필리핀, 인도네시아는 물론 아프리카 대륙의 국가들 등등 세계 어느곳도 서양제국의 식민통치가 지나간 자리의 생활수준이나 원주민들의 생활방식은 아직도 옛날이나 다름없고 열악하기 짝이 없어 모두 세계 최빈국을 못면하고 있으며 이점에 있어서는 공산주의 제국 구 쏘련의 회원국으로서 직접 통치를 받았던 지역이나 북한이나 몽고같이 쏘련의 위성국이었던 지역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일본의 통치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지역들은 지금 모두 선진국이거나 거의 그 문턱에 닿아있어 구미 제국의 큰 경쟁상대로 등장하고 있으니 그 나라들은 우리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대만, 중국, 싱가폴, 홍콩 등이다.

중국은 한나라 시대 이전에도 이미 유럽과 교류해 왔기에 그 문화는 이미 옛적부터 상당한 세계성을 띄고 있었으며 아편전쟁 이후 본격적인 현대식 제도를 도입하여 서구화의 길을 가면서도 변방속국들, 특히 월남과 조선은 옛날 그대로 놓아두고 싶어했다.
그러나 월남같은 나라는 지리적인 조건이 바다를 통해 서양과의 접촉이 가능했었기에 중국의 이러한 간섭이 쉽지 않았고 그래서 월남은 명목상으로는 중국의 속국같이 보였으나 稱帝建元을 했어도 중국이 감히 건드리지를 못했었다.
하지만 조선은 그렇지가 않아서 중국의 허락없이는 서양과의 자주적인 접촉이 사실상 불가능 했고 접촉을 한다 해도 중국을 거치면서 일단 여과된 것들로서 시대적으로도 한참 뒤떨어진 것들이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나 할아버지 세대가 쓰던 교과서로 교육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조선의 시대적인 위치는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보다 항상 한 세대 이상 뒤쳐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나마도 근대화의 동력으로 사용하자면 이 또한 중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기에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조선은 유난히 서양문물과의 접촉이 어려웠고 그래서 한일합방 당시까지도 아시아에서 가장 뒤쳐진 나라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중국의 간섭이 없었더라면 조선도 진작에 국방력을 길러 임진왜란 때 능히 일본을 격퇴할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넘치는 힘으로 우리가 일본으로 쳐들어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중국의 간섭으로 여의치 못하다가 갑오경장이후 일본의 영향 아래서 나마 근대화의 물꼬를 본격적으로 틀수 있었고, 이것은 한일합방 이후 조선의 일본화를 위해 일본에 의해 더욱 더 박차를 가해 추진되어 갔다.

좌경화된 “전라도 사관”이 대갈통에 각인된 지금의 사학자들은 일제시대에 이루어진 한반도의 근대화를 일본에 의한 단순한 약탈로 그리지만 일본이 정말로 그런 마음을 먹었더라면 서양열강들이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식민지에서 했듯이 공장이나 발전소를 조선안에 일체 짓지도 않았거나 지었어도 광물체취나 기타 원자재 약탈을 위한 기본 시설만 지었을 것이고 조선인을 종업원으로서 일체 고용하지 않았거나 고용을 했더라도 쓰레기나 치우고 짐이나 나르는 단순노동만 시켰을 것이다.
특히 조선사람들이 현대식 교육기회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위해 학교를 세우지 않았거나 세웠어도 제한을 가했을 것이며 언어도 외국어를 배울 기회를 박탈하기 위해 자기들이 조선말을 배워 조선사람들을 조선말로 일을 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을 일본화 해야 한다는 정책이 있었기에 일본과 거의 동등한 교육제도를 조선안에 적용했고 중국이나 동남아등 점령지에서도 조선인들과 현지 원주민들, 예를 들어 중국인들에 대한 처우에서 뚜렷이 차별화된 정책을 폈었다.
물론 삼일운동이나 육십만세사건, 광주학생 독림만세사건 등 조선안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진압을 했긴 했지만 적어도 남경대학살 같은 변태적이라 할만한 끔찍한 일은 조선인에 대해서는 가하지 않았었다.

여담이지만, 최근 전라도 사관에 물든 좌익분자들이 남경 대학살 사진을 퍼다가 독립운동을 하는 한국인들이나 한국인 위안부들에게 가한 고문이라고 인터넷에 게제하는 짓은 옳지 못한 짓이다.
그것들이 정말로 자신있는 자료라면 당연히 뉴욕이나 런든등의 세계적인 대도시의 길거리에다 이것을 전시하고 유엔에도 고발을 했어야 했을 것인데 그랬다가는 당장에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과 저작권 침해는 물론 허위사실에 의한 음해 혐으로 고소, 고발이 빗발칠 테니 그렇게는 못하고 자기들끼리만 보는 인터넷을 통해 이것을 퍼뜨려 오고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에 비해 중국을 훨씬 무자비한 방식으로 대하긴 했으나 중국이 사양사람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은 절대로 원하지 않았었다.
다시 말해 일본은 중국과 어떤 형태로든 친선관계를 맺고 싶어했지만 전통적으로 아시아의 종주국이라는 중국의 자존심은 여전히 일본과의 대등한 관계를 맺는 것을 허락지 않았었다.
게다가 더 일중관계를 힘들게 했던 것은 일본과 중국의 결합을 극도로 경계하는 서양열강들의 방해공작에도 있었다.
그래서 서양열강은 일본이 중국 땅 내에 직접 발을 들여놓는 것을 막기위해 일차대전 후 독일의 중국내 식민지를 일본이 인수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고 그 대신 돈을 몇푼 주어서 일차대전 전승국 클럽에서 퇴출시켰었다.

재밌는 사실은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라 할만한 손문이 일본을 통한 중국의 근대화를 원했었다는 것이다.
손문은 일본 망명시절 자신의 호 中山을 일본명 나까야마로 썼다.
그러나 중국 본토와 대만의 그 어느 누구도 손문을 친일파로 하고 매도하려 들지를 않는다.
이것은 가짜 김일성 김성주 가문 이외의 어느 누구도 항일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한국 내의 죄익계 인간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장개석은 서양열강의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사상적 도구인 기독교에 맞서 공산주의가 중국을 구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쏘련의 지도자들과 접촉을 했지만 미, 영, 불이 중국을 침략하는데 사용했던 기독교나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역시 소련이라는 또 하나의 서양열강의 중국침략의 도구임을 알고서 이를 포기했다.
장개석은 그후 모택동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 역시 중국에 대한 침략야욕을 가진 소련의 앞잡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중국의 근대화에 방해만 되는 걸림돌임을 알고서 이들을 탄압하게 된다.

한편 일본은 외교적인 수단으로는 중국 안에 발을 들여놓을수 없음을 알게되고서 군사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
중국내에 신해 혁명이 일어나 청조가 멸망하자 재빨리 만주와 몽고에 손을 뻗치는데, 이미 쏘련에의해 몽고 내의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들어가 버린 몽고를 점령하는데는 실패한다.
그러자 일본은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킨 뒤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를 데려다가 만주국 황제로 앉힌다.

여기서 한가지 볼것이 있다.
지도자의 미래관이 그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몽고족은 유목민족이며 유목민족으로서의 생활양식은 말위에서 살아야 했고 그런 이유 때문에 두 발로 땅을 딛은 상태로 창이나 칼을 휘두르는 일보다도 달리는 말 위에서 활쏘는 일이 더 중요했다.
이것은 몽고족이 징기스칸의 영도아래 세계를 정복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그러나 인구가 조밀하여 이웃과 치열한 경쟁을 벌려야 하고 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항상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를 미리 내다보고 대비를 해야하는 중국이나 고려, 일본 같은 소위 선진문명 지역의 민족과는 달리 인구가 희박하고 광활한 몽고의 초원을 누비며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민족은 앞날에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를 내다보고 이에 대한 준비를 하려는 동기가 떨어지게 된다.
그랬기에 몽고 사람들은 소련의 도움으로 중국과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면 자기들의 살아온 방식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지속될 것으로 안이하게 생각하고 소련의 편에 섰던 것이다.
그러한 계산은 단기적으로는 얼추 맞아 떨어지긴 했지만 소련이 주는 돈으로 그저 빈둥거리며 사는 동안에 몽고 지역은 소련이 핵 폐기물이나 갖다 버리는 위험물 폐기장소가 되어 버렸고 그러는 수십년 동안에 자기들이 그토록 무시했던 조선이나 일본같은 다른 나라들이 완전히 딴 모습이 되어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즉 몽고의 지도자의 미래관은 세상이 그다지 큰 변동이 없을 것이라는 고정된 세계관이었고 이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대륙국가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경향이기도 하다.
어쨌든 몽고는 쏘련 덕분에 일본의 침략은 면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소련의 한 속령의 지위로 전락했고 몽고인들은 러시아인들에게 완전히 개나 돼지처럼 취급받는 신세가 되어 쏘련 해체후에 자기들이 무시했던 일본이나 한국에 손을 벌리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는 중국 자기 나름데로의 찬란한 과거는 있었으나 밀려오는 서양문물의 우월함에 눌려 결국 공산주의 문화혁명의 시대라는 암흑기간을 겪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잠시 벗어났던 원 주제로 되돌아간다.
장개석은 일본과의 싸움보다는 공산당 토벌에 더 신경을 썼었다.
장개석은 “일본은 피부병이요 공산당은 심장병이다” 라고까지 할 정도로 공산당을 경계했다.
그 이유는 공산당은 쏘련이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앞잡일 뿐만 아니라 쏘련이 중국을 아프리카나 남아시아같은 미개한 식민지로 전락시키려는 도구라고 여겼기 때문이며 이것은 사실이기도 했었다.

또한 장개석은 서양과 일본의 동양사람 다루는 방법의 차이를 알고 있었다.
백인종인 서양인들은 아시아인들을 사람이 살지않는 곳으로 이주해갔던 백인들이 배우자를 구하지 못해 인간대신 오랑우탄같은 유인원과 관계를 맺다보니 인간과 유인원의 이종교배에 의해 나타난 잡종으로 생각해서 동양사람들을 인간으로 취급을 안했으며 1950년대에도 미국이나 유럽의 대학에서 배우는 인류학 교과서의 내용 자체가 그런 식이었다.
게다가 기독교의 일부 교파에서는 한술 더 떠서 흑인종과 황인종은 노아의 둘째와 셋째 아들인 함과 야벳이 짐승들과 관계해서 나온 여자들을 아내로 맞이해서 생긴 人獸雜種이고 자기들 백인은 노아의 맏아들 셈이 순수한 인간인 백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서 생겨난 순종 인간이기에 황인종과 흑인종은 인간이 아니며 기독교를 믿어서도 안된다는 그러한 이상한 교리를 설파하기도 했었는데 몰몬의 교리에 이러한 것이 숨어있다.

그러나 같은 황인종국가인 일본은 생각이 달랐으며, 백인보다 황인종이 결코 열등하지 않음을 증명하기위해, 이차대전 당시 미군이나 영국인 포로들을 상대로 여러가지 실험을 하기도 했었다.

그중 하나가 일본이 이차대전 중에 일본군에게 잡힌 영국인 포로들에게 채소만 먹이면서 그 행동의 변화를 기록함으로서 백인들이 주장하는 “백인은 주인인종, 황인종과 흑인종은 노예인종으로서의 심리를 유전적으로 타고난다”는 학설을 反證한 일이다.
영국인 포로들에게 단백질과 비타민 B가 부족한 동양식 식사를 계속 시키자 가난하게 자란 조선인들 처럼 스트레스에 약하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바뀌어가다가 끝내는 자기들끼리 싸우고 서로 고자질하면서도 폭력으로 짓 누르는 위압적인 권위에는 두려워하고 순종하는 행동을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이 자료는 그 후 북한같은 가장 악질적인 독재국가에서 국민을 통제하는데 아주 유용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오고 있다.

장개석은 적당한 시기에 일중간의 현 경계선에서 더 이상 일본이 중국 내로 들어오지 않겠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기술과 자본의 도움을 얻어 서양열강들의 수탈과 내전으로 피폐된 중국을 재건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장개석은 일단 공산당부터 몰아낼 생각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를 하지 않았었다.
일본도 또한 이러한 장개석의 내심을 알았었기에 만주사변이후 앞으로 되어가는 중국내의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고 장개석이 공산당 토벌을 위해 군사적인 도움을 요청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추측도 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를 일본에게 살해당한 원한이 있는 만주 군벌의 장학량이 1936년에 정변을 일으켜 장개석을 체포하는 西安事變이라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는 장개석을 협박하여 공산당과 화해를 하고 공산당과 함께 항일전쟁에 올인할 것을 강제로 약속하게 한다.

그런데 西安事變으로 인한 국공합작은 결국 일본으로 하여금 장개석과의 타협 가능성은 물건너간 일이고 이제는 무력침공 이외에는 중국을 지배할 방도가 없다는 판단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조작하여 중일전쟁을 일으켜서 중국본토를 직접 침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은 미국과의 전쟁인 태평양 전쟁으로 번져 결국 일본은 패망하고 중국에서 물러갔지만 중국은 국민당의 장개석과 공산당의 모택동 간의 내전으로 또다시 전란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중국의 국공내전은 모택동의 승리로 돌아갔다.

중국이 모택동의 손에 들어가자 국내 토지는 물론 모든 광산과 공장과 기업체가 국유화되고 이 시설들과 기업체들을 운영하던 서양사람과 일본인들이 사라졌다.
자연히 이 시설들을 운영할 기술과 지식을 가진 사람이 없게되자 모택동은 일본사람들을 불러다가 일을 맡겼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실제로 필자가 대학에 재학중이었던 60년대에 청평 수력발전소에 놀러갔다가 실제로 발전소를 가동시키고 있는 기술자들은 한국인들이 아니고 일본인들인 것을 알고 놀랐던 적이 있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물러갔다고는 하지만 실제 발전소나 공장을 가동시키는 데는 일본인들의 기술과 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인데 이러한 사정은 중국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고, 좌파들이 무엇이라고 둘러대던 북한 역시 마찬가지 사정이었을 것은 뻔한 일이다.
1976년 북경 부근 당산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수십만의 사상자가 생겼을 때 중국정부가 그 지진으로 희생된 일본인 기술자들을 위한 위령비를 세워줬다고 할 정도로 일본은 전쟁 전은 물론 전쟁 후에도 중국에 끼친 영향과 기여는 크다 할수있다.

공산주의 중국은 군사, 문화, 경제적으로 한때 세계 초강대국었다는 과거가 미래에도 다시 올것이라는 잘못된 미래관에 사로잡혀서 결국 자기나라를 공산주의 문화혁명의 시대라는 암흑기간을 겪게 했고 그후 한참 지난 후에야 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 후 중국은 유럽식민지였던 동남아의 나라들 보다는 경제적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군사과학기술의 면에서 동아시아의 다른나라들에게 가히 위협적인 수준이라 할 정도까지 되었다고는 하나 전 국민적인 수준이 아직 선진국이 되기에는 멀어 보인다.

그외에 대만을 보자.
대만은 1895년 일청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50년을 통치하면서 일본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과정은 대략 조선과 비슷했으며, 유리한 기후조건과 공산주의 탄압을 피해 장개석을  따라 대만으로 건너온 숱한 중국인 학자들과 기술자들에 의해 한국보다는 훨씬 앞서 기술입국과 경제적인 번영을 이룩하긴 했으나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 정책에 의해 결국 한국에게 따라잡히게 되지만 여전히 선진국으로서의 지위는 고수하고 있다.

대만이 한국에게 밀리게 되는 이유중의 하나 역시 한글과 한자의 차이점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앞으로의 성장의 한계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한계를 깨기 위해 중국은 어떠한 핑계를 대서라도 한글을 자기네 것으로 만들려 들 것이다.
오래 전에 어떤 일본 학자가 神代文字를 조작해서 일본이 한글의 원조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듯이 언젠가 중국사람들도 한글은 주나라 은나라 시대에 이미 존재했었던 甲骨文字의 일부라고 조작해가지고 우기려 들 것이다.
오래전에 뉴저지에 사시는 어느 선배님이 중국이 한글공정을 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하셔서 내가 내버려 두자고 한적이 있었다.
중국이 한글을 쓰는 순간부터 중국은 점차로 분열되고 많은 중국인들이 한국어를 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가면 한글이 여러 모로 지금과는 다르게 변모해 있을 것이고 표기법도 변하고 글자도 현재는 안쓰고 있는 네 글자 외애도 없었던 것들이 몇개가 더해져 있을 것이지만 그 기본 형태는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몇십년 혹은 몇백년 미래에 일어나겠지만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그 외에 싱가폴과 홍콩은 서양의 지배하에 있었다고는 하나 이차대전 후 미국 등 서양제국이 세운 공장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흡수한 기술을 바탕으로 역시 선진국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볼 수있는데, 이 역시 일본의 영향을 받은 중국인들이 이 두 도시국가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에 이것이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만약에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서 나마 근대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채 아직도 청나라 시절 같이 중국의 한 속령으로 남아 있었다면 지금 쯤 우리나라 사람들은 라오스나 미얀마 보다도 더 후진국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의 근대화 과정과 그 후 일본이 시도한 한반도의 일본화 정책이 어떤 식으로 한반도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走馬看山 식으로 훑으면서 필자는 일본이 한반도를 일본의 일부로 합병한 후 수백년 동안의 중국 지배 하에 있으면서 중국문화에 완전히 쩔어있던 조선사람들의 머리에서 짜장면 냄새를 빼내고 그 빈자리에 오뎅국물을 넣느라 애를 쓰는 동안에 그 부작용(?)으로 조선사람들이 잊고 있었던 한글이 되살아 났고 이것은 후에 대한민국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되는 큰 기둥의 하나가 되었다는 필자의 주장을 소개했다.

한글이 되 살아나자 한인들의 의식에는 일본에 동화되는 대신 민족의식이란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비유하자면 조선이란 밭에 무성하던 중국 모란꽃을 모두 걷어내고 일본의 사꾸라 꽃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었는데 그 간 땅속에 수백년 동안 눌려 있던 토종 식물 무궁화 꽃씨가 함께 발아하여 돋아나기 시작하더니 사꾸라 나무를 밀어내고 조선 땅을 무궁화 밭으로 변모시키기 시작한 셈이었다.

특히 한글의 부활로 인해 등장한 조선어학회는 일본의 한반도 일본화 정책을 매우 어렵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에 당황한 일본은 1938년에 학교와 관공서 뿐만 아니라 일체의 공개된 장소에서의 조선어를 사용한 대화를 금했으며 학교에서의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였다.
조선어 사용금지 정책은 어린 조선 아이들간의 사적인 대화에 까지도 간섭하여 단속했을 정도로 심했다고 하는데 단속 당하는 조선 사람들의 반발이 필연적이었기에 사실상 시행이 불가능한 것이었고 결국 일본당국의 물리적인 탄압을 불러오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일년 가까이 지난 1942년10월에 일본 경찰은 조선어학회에도 손을 대어 이희승, 최현배등을 포함한 33명을 체포하여 반란음모 혐의로 이들을 투옥하고 심한 고문을 가하였다고 한다.
이 때 평소 胃가 좋지 않았던 이희승은 감옥에서 주는 콩찌꺼기로 만든 밥을 삼키기 전에 꼬박 꼬박 육십 번씩 십은 덕에 감옥살이 도중 도리어 胃가 좋아졌었다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재판 도중 두명이 심한 고문으로 옥사하는등 어려운 곡절을 겪을 정도로(ㅠ...) 심하게 탄압을 받는 동안 일본이 미국의 원자탄을 맞고 항복하는 바람에 해방을 맞이한 덕에 조선어학학회 사건 관련자들은 감옥에서 풀려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런데 차라리 조선어 연구에 일본인 학자들이 참여하여 도와주는 척 하면서 환심을 샀었더라면 도리어 효과가 있었을 동화정책을 이런 식으로 그르친 일본의 행위는 참으로 현명치 못한 처사였다 할 것이다.
아마도 대동아 전쟁의 戰勢와 국제적인 사정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조선의 민족의식의 고양과 만만치 않은 저항에 놀라면서 이때부터 일본 총독부 당국은 합방 초기 말없이 고분고분 하던 조선인들을 깔보고 차분히 동화정책을 추진했던 때와는 달리 패닉에 빠지면서 이성을 잃기 시작했던 것 같다.

더구나 그 저항이란 것이 칼과 폭탄을 든 하드웨어가 아니라 형체와 소리가 없어 물리적인 힘으로 누를수 없는 “고유 문화”라는 것이었으니 이에 대한 대비책이 세워져 있지 않았던 일본 총독부 당국으로서는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재미 있는 일은 일본이 추진한 조선반도 동화정책 중 조선인들의 일본인화 정책중 일부는 그런데로 나마 성공적이었었다는 것이다.
그 성공한 동화정책은 서구문화를 동양의 고유문화를 버리지 않고 이것에 접 붙여서 만든 “서구화 된 일본”을 조선반도에 이식하는 일과 그 덕에 경제적인 여유와 능력이 주어진 조선사람들이 일제 당국이 확립해 놓은 신식 교육제도 하에서 초등교육에서 대학교육까지 받을수 있는 기회를 활용해서 소위 현대적인 소양을 갖춘 지식인이 될수 있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비록 일본 본토와 차등을 둔 면은 있으나 일본 덕택에 산업화는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의 선친도 비록 째지게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시긴 하셨어도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신식 교육제도의 틀을 잘 활용하신 덕에 보성전문학교의 수료장을 받는 혜택을 누리시고 말단 관리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시어 일제 때 벽촌이긴 해도 군수 한자리도 하실 수 있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육이오 때 서울이 인민군에게 함락되자 곧바로 빨갱이들이 우리집으로 들이 닥쳤는데 알고 보니 나의 선친이 악질 친일 부역자의 명단 중 맨 꼭대기에 올라 있더라는 것이었다. (당시 사대부중 이학년이셨던 누님의 증언)
선친은 결국 끌려가신 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셨고 졸지에 과부가 되신 모친과 함께 우리 일가족은 완전히 풍지박산이 된 집안을 재건하느라 그 후 온 식구가 모진 고생을 해야 했었다.

대만 역시 일청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덕에 중국의 손에서 떨어져 나와 일본의 직할지가 되면서 같은 길을 걸어 왔다.

일본의 대 조선 식민지 정책이 이러했던 비해 필리핀이나 인도지나, 인도네시아 같은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에서 행했던 유럽과 미국등 서양 열강의 식민지 통치정책은 철저한 원자재 약탈과 격리정책이었다.

즉 식민지의 무한한 원자재를 퍼가는데 필요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원주민들을 거의 奴隸勞動이나 다름없는 방법으로 부려먹은 반면 그들을 가르치고 개화하는 데는 철저히 외면하는 “착취와 격리”의 방법을 사용했으며 원주민들에게 열심이 공부하고 기술을 배워 선진국을 따라가야 한다는 동기를 느낄만한 일체의 빌미를 주지 않았다.

이들 유럽의 지배자들은 아시아의  원주민들이 서구문화의 진취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배우는 것을 경계하여 원주민의 고유문화를 보존한다는 핑계로 기독교 전파에 소극적이었다.(필자가 직접 들은 한 네델란드 사람의 증언)

단지 원주민들과의 완충계층으로 이용하고 하인으로나 부리기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등 유럽 열강의 지배자들은 원주민들의 극히 일부만 기독교도로 개종시킨 후 이들을 앞세워 원주민을 착취하고 통치하였으며 이것은 훗날 이들 식민지들이 독립국가가 된 뒤에도 두고 두고 기독교와 토착 종교간에 계속되어 오는 갈등의 불씨가 되어오고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치하에 있던 월남은 독립 후에 인구의 5% 라는 캐톨릭 支配層과 나머지 95%의 불교 被支配層 간의 갈등을 불러왔으며 결국 월남 패망의 주된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서구식 경쟁문화에 노출되어 본 일이 별로 없는 이들 南洋의 원주민들은 그저 서양사람들의 시키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양 생각했었고, 자기들 나름데로 전통이 있는 역사를 가진 중국이나 일본, 조선 등 동 아시아 본토인들의 선별적으로 서구화된 생활방식을 뒤떨어진 야만인들의 후진적인 것으로 멸시했었다.

지금도 필리핀이나 태국,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위 서구 문명이라는 것에 먼저 눈을 떴다고 생각하고 다분히 한국인을 깔보는 자세를 가지고 대한다.
그 예로 80년대에 필자가 만난 어느 필리핀 사람이 자기들 처럼 영문자를 쓰지 않고 고유의 한글을 쓰는 한국인들을 답답해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그러나 동남아 사람들 중 월남과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동아시아 사람들로 생각하며 한국인을 대할 때 별 편견없이 대한다.
서양 열강의 대포가 나타나기 전부터 중국, 한국, 일본과 무역을 하면서 접촉해 왔던 경험이 한국이나 일본에 대한 편견이 생기는 것을 막는 일종의 심리적인 백신으로 작용을 했던 것이다.
한국은 이들 인도지나 삼국을 앞으로 파트너로 육성할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추진하면 대단한 덕을 볼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아직 인구가 희박한 라오스는 한국인들이 건너가서 개척하고 살수있는 좋은 곳이다.
단지 서구사람들이 했던 실수를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의사항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잠시 빗나간 이야기를 다시 원위치 한다.

결론적으로 아시아에서 일본의 지배가 지나간 자리는 현재 고도로 산업화된 선진사회로 자리잡아가고 있지만 소련(러시아)을 포함한 구미열강이 지나간 자리는 아직도 옛날 생활수준을 못면하고 있다는 것은 일본과 구미열강의 식민지 지배목적이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수 있다.

즉 구미열강의 식민지 지배정책은 원주민들을 영구히 후진적인 상태로 유지하면서 저임 노동력을 이용한 원자재 착취와 군사기지로서의 활용이 전부였으나 일본의 경우는 전 주민이 황인종인 동아시아를 유럽과 맞설수 있는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시키겠다는 장기적인 목적이 깔려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들의 善意(?)가 받아들여 지지를 않았고 도리어 개혁과 개방이 자기들의 권력의 붕괴를 가져올 것을 염려한 동아시아 나라들의 기득권자들이 미국이나 소련같은 유럽의 국가들을 등에 업고 저항을 하는데에 당황한 일본은 결국 총칼을 사용한 탄압정책으로 전환을 하게 되고 이것은 일본에게 침략자라는 씻을 수 없는 역사적인 오명을 남겨주게 된 것 어닌가 한다.

해방 후 한국은 어떻게 한 세대만에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을 할 수있었을까?

그렇다면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던 지역이 그렇지 않았던 지역에 비해 산업화의 진보가 빨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돌아보자.
필자가 이것을 취급하는 이유는 한국이 어떻게 해서 한세대만에 산업화와 민주화가 달성했는가 에 대한 답이 될수 있을까 해서이다.

서구열강의 식민지지배에 먼저 노출되었던 필리핀을 예로 생각해본다.
필리핀은 1521년 마젤란에 의해 스페인령으로 선포된후 줄곧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다가 미서전쟁을 계기로 1898년 미국의 손으로 넘어 1946년 독립하기까지 미국의 지배하에 있게된다.
아무래도 유교 국가들 보다는 포용적인 기독교 국가의 밑에 있으면서 식민지 원주민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어느 정도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으면서 서구식 자유를 누리며 살아온 이들은 자신들의 그런데로의 안락한 생활때문에 일본이나 한국사람들같이 짧은 시일안에 많은 성과를 내면서 선진국을 따라가는 산업화에 대한 욕구를 느끼는데는 게을러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급격한 산업화를 이루려면 심한 채찍질 정책이 필요한데, 상명하복과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 체질화되어있는 일본이나 한국, 중국같은 유교사회가 이러한 국가의 정책을 추진하는데는 단연 유리했던 것이다.
그래서 필리핀은 동양의 다른 나라들보다 수백년이나 먼저 서구적 사회를 구축하고서도 결국은 한 세대도 못가 아시아에서 제일 생활수준이 높았던 나라에서 그 반대의 위치로 전락을 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일본이 서구식 자유를 맛보기 전에 산업화를 추진했기에 이것을 달성했듯이 한국 역시 그러한 경로를 거쳐 한 세대만에 선진국의 대열에 끼이게 되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幕府體制에서 막바로 王政體制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산업화 과정을 겪었던 일본인들 보다는 해방 후 십여년동안 미국이 가져다 준 자유 민주주의의 단 맛을 좀 본 상태였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년 十八年 동안의 통치기간 중 숱한 저항과 국내외의 비판에 시달려야 했었으며 그러한 악조건 하에서 본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반대파를 철권으로 짓누르는 독재정치를 해야 했었다.
그로인해 박정희 대통령은 끝내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되었고, 死後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고 불리면서도 한편 독재자라는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해방후 겪었던 그 어설픈 자유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한국의 사회는 좌익들의 준동에 휘둘리고 있다.
그래도 한국은 필리핀보다는 자유민주주의가 미처 뿌리를 덜 내렸었다는 유리한 정치적 토양에 산업화의 씨앗이 뿌려졌던 덕에 그런데로 박정희 대통령의 목적은 상당 수준 달성이 된 것이다.

결론

썰 푸리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다음의 세가지 要約事項으로 이만 결론을 내리자.

要約 1. 일본의 식민통치기간에 한국인들이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었던 것은 사실이고, 일제 36년 동안에 있었던 일부 인사들의 친일행위와 대동아 전쟁중에 일본에 의해 저질러졌던 한국인 위안부 동원 문제, 해방 후 남북분단과 육이오 사변에 대한 책임소재 등은 아직도 결론이 안난 상태이며 한국내의 좌우익간의 큰 논쟁꺼리이자 국론분열과 남남갈등의 큰 원인으로 남아있다.

要約 2. 그러나 일본의 의도에 관계없이 일본의 식민 통치하에서 한국인들이 얻은 세 가지 큰 열매인 중국으로부터의 자주권 회복, 한글의 부활, 한국인들의 서구문명에 대한 開眼 등은 훗날 대한민국이 단시일내에 세계 최빈국에서 부자나라의 하나로 도약하게 한 큰 동력이 되었던 것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要約 3. 일본의 동아시아 병탄은 동아시아가 구미열강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 왔으며 일본의 지배를 오래동안 받은 곳일수록 전후 산업화가 빨리 진행되어 동아시아가 세계 경제의 주요한 한 블럭이자 구미열강의 경쟁세력으로 등장하는 현재의 세계 세력구조를 이루는데 기여를 하였다.

끝 말: 미주 한인사회의 이런 저런 모임마다 나타나 큰소리를 치고있는 일부 인사들은 이 글을 읽고 상당히 흥분들을 할 것이지만 다들 차분히 생각들을 해 보면 이 글이 그다지 틀린데는 없음을 인정 안할 수 없을 것이다.

글을 올리고 나서

이글은 수년 전에 서울대 사람들이 운영하는 모 사이트에 당시 일년 가까운 세월동안 몇달 간격으로 기고되었던 여러 개의 글을 퍼다가 한꺼번에 묶어서 올린 것이다. 그런 탓에 다소 두서가 없고 문맥이 갑자기 달라지는 것이 느껴지는 분도 계실 줄로 알고 이에 대해 사과의 말씀도 드린다.

  • 혁명과 개혁... 우리 한국인들의 운명은 어느 쪽이 될 것인가?
  •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불법적이고 사기적인 탄핵이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난국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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