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고 선수들이 광주일고와 경기 도중 ‘스타벅스 가야지’라는 구호 섞인 응원가에 맞춰 덕아웃에서 춤을 추고 있다. [사진=X]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단순한 정치적 정변이 아니었다. 소비에트 국가 체제가 탄생하게 된 결정적 기원이자, 굶주림과 제국의 압제에 억눌려 있던 민중이 스스로 피를 흘려 얻어낸 숭고한 해방의 상징이었으며, 국가가 숭배하는 완벽한 성역이었다.
광장에 붉은 깃발이 나부낄 때면, 모든 인민은 조국의 토대를 닦은 붉은 군대의 희생 앞에 경건하게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혁명은 곧 종교였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 도덕률이었다.
위선의 ‘노멘클라투라’에겐 ‘아넥도트’ 치료를
그러나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 거룩한 신화는 모스크바 뒷골목 청년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가장 우스꽝스러운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도대체 무엇이 그 무거운 역사의 엄숙함을 무너뜨렸을까.
답은 권력을 독점한 특권 관료층, 이른바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의 지독한 위선에 있었다. 혁명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당 간부들은 인민의 평등을 외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특권층 전용 상점에서 서구의 사치품을 소비하며 공포와 독재를 일삼았다.
인민들은 두루마리 휴지 하나를 구하기 위해 반나절씩 배급 줄을 서야 하는데, 단상 위로 배가 나온 간부들이 올라와 “혁명의 위대한 희생을 기억하라”며 훈계를 늘어놓는 기막힌 모순이 일상이 되었다.
바로 이 압도적인 기만 앞에서 대중은 폭동 대신 ‘희화화’를 택했다. 권력이 몽둥이를 들고 엄숙주의를 강요할수록, 청년들은 그 성역을 짓밟는 뼈 있는 정치 풍자, 즉 ‘아넥도트(Anekdot)’를 만들어 유통했다.
숭고했던 10월 혁명은 간부들의 밥그릇을 지키는 알리바이로 타락했고, 그 위선을 꿰뚫어 본 대중에게 혁명의 역사는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닌 통쾌한 코미디의 소재로 소비되었다.
아무리 거룩한 희생이라도, 그것이 권력자들의 사익을 위한 ‘정치 비즈니스’로 전락할 때 대중의 조소라는 가혹한 형벌을 결코 피할 수 없음을 보여준 묵직한 인과율이다.
“스타벅스 가야지” 탓할 자격 있나
이제 이 낡은 소련의 역사적 궤적을 2026년 대한민국으로 가져와 보자.
서울 목동야구장에 울려 퍼진 구호 하나가 사회적 공분의 도마 위에 올랐다. 고교야구 대회 중 배재고 학생들이 상대 팀인 광주제일고를 향해 “스타벅스 가야지”라며 외친 사건이다.
특정 프랜차이즈의 마케팅을 빗대어 5·18민주화운동을 조롱했다며 학교는 고개를 숙였고, 어른들은 분노하며 아이들을 징계의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역사의 상흔을 유희거리로 소비한 십 대들의 가벼움은 분명 교정되어야 할 영역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을 향해 엄벌의 회초리를 들기 전에, 우리는 이 초현실적인 현상의 기원을 찾아 아주 불편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린 학생들의 눈에 그 거룩했던 광주의 5월이 어쩌다 이토록 납작한 아넥도트(조롱)로 전락해 버렸는가. 그들의 입술에 메마른 냉소를 얹어준 한국의 노멘클라투라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번 촌극을 촉발한 이른바 ‘스타벅스 텀블러 논란’의 뼈대부터 이성의 메스로 절개해 보자. 스타벅스가 광주를 비하했다는 주장. 그 ‘탱크’는 본래부터 존재하던 텀블러의 이름일 뿐이었고, 그 행사 자체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실제했는지 증명할 방법은 애초에 없다.
그러나 5·18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맹목적 집단은 단어 하나에 억지 프레임을 씌워 이를 전국적 분노로 이어가려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론 지선이 끝나고는 그 흔적도 찾기 어려워진 게 사실이다.
텀블러 이름에는 국가적 재난이라도 난 듯 핏대를 세웠지만, 정작 그 5월의 광장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
‘광주’를 땔감으로 탕진한 건 정치권
가장 엄숙해야 할 전야제와 추모의 공간을 보라. 어느 순간부터 그 자리는 ‘매불쇼’나 김어준 같은 좌파 진영의 스피커들을 찬양하고, 희생의 의미를 성찰하기보다 야당을 악마화하고 낄낄거리는 배설의 장으로 변질되었다.
불의에 항거했던 시민들의 피눈물은 어느새 이재명이라는 특정 정치인을 구국의 메시아로 칭송하고, 진영의 낡은 방패막이로 전락했다.
어른들이 역사를 이권의 도구로 삼아 진영의 전유물로 독점하는 위선을 똑똑히 지켜본 어린 학생들이다. 권력의 찌든 관료들이 장사판으로 전락시킨 제단 앞에서, 아이들이 예의 바른 추모객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뻔뻔한 억지다.
이제 지긋지긋한 남 탓은 그만둘 때가 되었다. 철없는 고등학생들의 춤사위를 탓하며 징계의 칼춤을 추기 전에, 광주의 숭고한 자산을 정치적 땔감으로 탕진하여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어버린 자신들의 일그러진 궤적부터 뼈아프게 ‘돌아보기’ 시작해야 한다.
스스로 상처받을 자격을 반납해 버린 자들의 분노는 결코 역사의 무게를 지켜내지 못한다. 추모의 본질을 과연 누가 먼저 훼손한 건가?
위선을 스스로 멈추고 깨고 나오지 않는 한, 광장을 맴도는 청년들의 차가운 아넥도트는 더욱 은밀해지고 쉬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 박주현 작가
작곡가, 음악감독, 칼럼니스트, 수필가. 페이스북에서 정치, 시사,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해 수많은 이의 공감을 얻고 있다. 에세이집 ‘폭풍의 바다를 건너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