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5년 1월 20일 워싱턴DC 캐피털원 아레나에서 미국의 파리기후협정 탈퇴를 통보하는 서한에 서명한 뒤 들어 보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유엔과 국제금융 네트워크가 만든 기후규범보다 미국 유권자와 국가주권이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AFP=연합뉴스 자료사진]지수제국 1편에서는 지수회사가 자본의 지도를 그리고 자산운용사가 그 위로 돈을 움직이는 구조를 살펴봤다.
2편에서는 그 규칙의 설계자를 추적했다. 코피 아난이 글로벌 금융기관들을 유엔의 무대로 불러들였고, 골드만삭스·모건스탠리·도이체방크·HSBC·UBS·BNP파리바·AXA 등은 환경·사회·지배구조(ESG)를 투자판단에 통합하는 규칙을 설계했다.
유엔은 명분을 제공하고 정부는 공시와 규제를 만들었다. 평가·지수회사는 기업에 점수를 매겼고, 자산운용사는 그 점수를 따라 돈을 움직였다.
트럼프가 공격하는 것은 환경보호라는 가치 자체가 아니다. 선출되지 않은 국제기구·금융기관·평가회사·의결권 자문사가 미국의 산업과 에너지, 기업경영의 방향을 정하는 구조다.
세계 공통 규칙과 국가주권
유엔 중심의 다자주의는 기후·인권·노동·성평등을 국경을 넘어선 공통 과제로 본다. ESG는 이를 기업공시와 투자분석, 지수편입과 주주투표의 기준으로 바꾼다. 한 국가가 규제를 채택하지 않아도 글로벌 은행과 연기금, 운용사가 투자조건을 바꾸면 기업은 영향을 받는다.
쟁점은 명확하다. 미국의 에너지정책은 미국 유권자가 선택한 정부가 결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유엔의 기후목표와 글로벌 금융기관의 기준이 사실상 결정해야 하는가.
유엔·금융·지수 네트워크가 만든 세계 공통 규칙과, 선출된 국가권력이 산업·에너지·투자정책을 결정해야 한다는 주권 정치의 충돌이다.
첫 번째 공격, 국제적 명분을 끊다
트럼프는 2025년 1월 취임 당일 파리기후협정 탈퇴와 국제기후금융계획 폐기를 지시했다. 같은 해 2월에는 미국이 참여하거나 자금을 지원하는 국제기구 전반을 재검토하도록 했다.
2026년 1월에는 미국의 이익에 반한다고 판단한 유엔 산하기구와 국제조직 등 66곳에서 탈퇴하거나 자금지원을 중단하도록 명령했다.
돈은 국제기구의 산소다. 미국이 분담금과 자발적 기여금을 끊으면 사업범위와 인력, 정책 확산 능력은 줄어든다. 트럼프는 유엔의 선언을 폐기할 수는 없지만, 이를 세계정책으로 확산시키는 재정적 지렛대는 약화시킬 수 있다.
두 번째 공격, ESG의 집행자를 겨누다
트럼프 행정부는 ESG 규칙을 미국 기업에 전달하는 금융시장의 중간기관도 겨냥했다.
2025년 12월 트럼프는 기관투자자에게 주주총회 투표방향을 조언하는 의결권 자문회사에 대한 감독 강화를 지시했다. 백악관은 인스티튜셔널셰어홀더서비스(ISS)와 글래스루이스(Glass Lewis)가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ESG와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의제를 기업경영에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도 대형 운용사가 기업과 접촉해 ESG 정책 변경을 요구한다면 단순한 수동적 투자자로 볼 수 있는지 문제 삼았다. 경영정책에 영향을 주려는 지분 5% 이상 투자자는 보유목적과 활동을 더 상세히 신고해야 한다.
이 조치는 블랙록(BlackRock)과 뱅가드(Vanguard)의 행동반경을 좁혔다. 두 회사가 기업경영진과 진행한 면담도 전년보다 각각 28%, 44% 감소했다.
트럼프는 ESG 펀드 하나가 아니라, 금융기관이 고객의 돈과 의결권으로 기업정책을 바꾸는 통로를 공격한 것이다.
ESG는 후퇴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세계 자산운용사들의 기후연합인 넷제로자산운용사이니셔티브(NZAM)는 미국 대형 운용사들의 이탈 이후 활동을 중단했다가 2026년 다시 출범했다.
참여사는 정점의 325곳에서 250여 곳으로 줄었고, 2050년 탄소중립 의무와 2030년 중간목표도 삭제됐다. 블랙록·뱅가드·JP모건자산운용·인베스코·골드만삭스자산운용은 복귀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후위험 분석과 에너지전환 투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금융기관들은 탄소중립 대신 회복력, 위험관리, 전환금융, 전력망과 기반시설 투자라는 언어를 쓰기 시작했다.
ESG는 위험관리로, 탈탄소는 에너지전환으로, 지속가능투자는 장기수익 투자로 이름을 바꿨다.
트럼프의 역설
트럼프는 블랙록·뱅가드·스테이트스트리트(State Street)의 ESG 영향력을 비판하지만, 이들의 금융 인프라 자체는 활용한다.
2026년 7월 미국 재무부는 신생아 한 명당 정부가 1천 달러를 넣어주는 ‘트럼프 계좌(Trump Accounts)’ 운용에 대형 운용사의 상장지수펀드(ETF)를 활용하기로 했다. 초기 자금은 스테이트스트리트의 스탠더드앤드푸어스500지수(S&P 500) 추종 ETF에 투자되고, 향후 블랙록과 뱅가드 상품도 참여할 수 있다.
트럼프는 지수제국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키를 유엔과 ESG 네트워크에서 미국 정부와 유권자 쪽으로 돌리려 한다.
유엔의 기준을 따라 기업을 움직이는 금융기관은 공격하지만, 미국의 저축·산업·에너지 정책을 집행하는 금융기관은 활용한다. 목표는 금융권력의 해체가 아니라 통제권의 이동이다.
누가 이길 것인가
트럼프는 예산을 끊고 금융규제를 바꾸며 연기금과 의결권 행사에 조건을 붙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힘은 정권과 임기에 묶여 있다.
반면 유엔·은행·연기금·운용사·평가회사·지수회사로 이어진 네트워크는 여러 국가와 기관에 분산돼 있다. 미국이 빠져도 유럽과 아시아의 규제와 자본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트럼프는 ESG의 도덕적·정치적 권위를 약화시키고, 금융기관은 이를 위험관리와 에너지·인프라 투자의 언어로 재포장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는 ESG라는 깃발을 꺾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아래 만들어진 평가·공시·지수·금융상품의 시장까지 없애기는 어렵다.
1편에서 우리는 자본이 움직이는 지도를 봤다. 2편에서는 그 지도를 그린 규칙 설계자들을 추적했다. 3편에서 드러난 것은 그 지도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지금 세계에서는 유엔의 보편적 명분과 금융자본의 실행력이 결합한 초국적 권력, 그리고 선거와 국경·국가주권을 앞세운 정치권력이 충돌하고 있다.
세계의 돈을 지배하는 사람은 돈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돈이 따라야 할 규칙을 정하는 사람이다. 트럼프의 반란은 그 규칙을 누가 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싸움이다.
※ 이 기사는 주간 한미일보 20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