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시상대에 선 손기정.
손기정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대표적인 민족영웅으로 기억된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과 시상대에서 숙인 고개, 가슴의 일장기가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과 결합하면서 그는 나라 잃은 조선인의 울분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에게 강한 민족의식이 있었다는 사실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는 사인할 때 한글로 이름을 쓰거나 ‘KOREAN’이라고 적으며 자신이 조선인임을 드러냈다.
다만 흔히 말하는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는 정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사진에서 일장기를 직접 지운 사람은 손기정이 아니라 신문사 관계자들이었다.
손기정 자신은 시상식에서 월계수로 가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귀국 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으며 환영 행사도 제대로 열지 못했다. 이후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진학했지만 육상선수로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데도 제약을 받았다.
문제는 손기정의 생애가 1936년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해방까지 9년을 더 일본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살았다.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저축은행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친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본 대학에 다니거나 식민지의 학교·은행·회사에서 일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가 된다면 당시 조선 사회의 상당수를 같은 범주에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이 확대되면서 훨씬 무거운 일이 생겼다.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을 전시동원 체제에 편입시켰다. 유명 문인과 체육인, 교육자들도 선전과 강연에 이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손기정은 일제의 요구를 받아 학생들에게 학도병 지원을 권유하는 연설을 했다. 데라시마 젠이치가 소개한 자료에 따르면 조선총독부와 일본 헌병의 압력이 있었고, 그는 여러 중등교육기관을 찾아가 연설해야 했다.
학도병 모집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학생들에게 일본군에 들어가 전쟁터로 나가라고 권하는 일이었다. 만약 유명 문인이나 교수의 자료에서 이런 기록이 발견되었다면 ‘일제의 학도병 동원에 협력했다’는 내용이 친일행적 가운데 중요하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손기정을 설명할 때는 그 행위의 배경을 함께 본다. 총독부와 헌병의 압력이 있었다는 사실, 유명인이라도 국가권력의 요구를 거부하기 어려웠다는 상황, 본인이 훗날 이를 크게 후회했다는 점까지 고려한다.
이런 평가 방식은 타당하다. 그렇다면 왜 그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는 똑같이 적용하지 않는가. 친일행위를 판단하려면 무엇을 했는가만 확인해서는 부족하다.
스스로 나섰는지 강요받았는지, 한두 차례였는지 지속적이었는지, 형식적으로 참여했는지 적극적으로 선동했는지, 그 대가로 이익을 얻었는지를 구분해야 한다. 일본의 침략전쟁을 신념으로 찬양한 사람과 압력에 밀려 행사에 참석한 사람을 같은 선에 놓을 수는 없다.
손기정의 학도병 모집 연설도 이 기준으로 평가하면 된다.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은 기록하되, 어떤 상황에서 그 일을 했는지도 함께 밝혀야 한다. 행위를 지워서도 안 되고 강압을 지워서도 안 된다.
한국 사회가 기억하는 손기정은 대부분 1936년에 머물러 있다. 베를린 시상대의 사진은 끊임없이 재생되지만, 전쟁 말기 학도병 모집 연설을 해야 했던 모습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 손기정은 대한민국 체육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947년 보스턴마라톤에서 서윤복의 우승을 이끌었고 대한체육회와 육상계의 주요 직책을 맡았다. ‘나라 없는 조선인이 일장기를 달고 세계를 제패했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강력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서 이중잣대가 생긴다. 어떤 인물에게는 일제 말기의 관변단체 참여나 시국강연 같은 기록을 꺼내 전 생애를 규정한다.
그 행위가 어떤 압력 아래 이루어졌는지를 따지기보다 행위 자체를 우선한다. 반면 손기정에게는 민족의식과 일제의 탄압, 당시의 강압적 상황, 해방 이후의 활동까지 생애 전체를 종합하여 판단한다. 손기정에게 적용하는 방법이 오히려 제대로 된 역사 평가에 가깝다. 따라서 그를 끌어내릴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을 보편화해야 한다.
식민지 시대 사람들의 삶은 ‘친일 아니면 항일’이라는 두 칸으로 깔끔하게 나뉘지 않는다. 손기정 자신이 이를 보여준다. 조선인이라는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으면서 일본 대표로 뛰었고, 일장기를 달기 싫어하면서도 달아야 했으며, 감시 속에서 일본 대학을 다녔다. 이후 식민지 금융기관에서 직장생활을 했고 전쟁 말기에는 압력을 받아 학도병 모집 연설까지 했다.
이런 모순은 개인의 성격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식민지라는 체제가 만들어낸 삶의 조건을 함께 보아야 한다. 세계적인 올림픽 영웅조차 총독부와 헌병의 요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면, 평범한 사람들이 국가권력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친일행위를 강압이라는 말로 덮자는 것은 아니다.
자발적으로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청년의 참전을 선동했으며 이를 반복하면서 권력과 지위를 얻었다면 그 책임은 그대로 물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이름을 먼저 보고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성격과 정도를 동일한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손기정의 사례를 놓고 물어야 할 질문은 ‘손기정은 친일파인가?’가 아니다. 그 질문으로는 복잡한 생애를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손기정에게 인정하는 역사적 맥락을 다른 식민지 조선인에게도 인정하고 있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관변단체에 참여했다면 실제 활동 정도를, 시국강연을 했다면 내용과 횟수를, 학도병이나 지원병을 권유했다면 자발성 여부와 압력의 정도를 밝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이익을 얻었는지도 살펴야 한다. 이런 자료를 종합한 뒤 평가하면 된다.
사람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면 역사는 정치적 판결문이 된다. 민족영웅에게 불리한 기록이 나오면 강압을 강조하고, 이미 친일파로 규정된 사람에게 비슷한 기록이 나오면 자발성을 전제하는 방식으로는 일관된 평가가 불가능하다.
손기정을 깎아내릴 이유는 없다. 1936년 베를린에서 조선인이라는 의식을 드러낸 것도 그이고, 일제 말기 학도병 모집 연설에 동원된 사람도 그이다.
앞의 사실 때문에 뒤의 사실을 지울 필요도 없고, 뒤의 사실 때문에 앞의 행동을 거짓으로 만들 이유도 없다. 손기정의 사례가 던지는 문제는 친일 청산의 기준에 있다. 그를 민족영웅으로 평가해도 좋다.
다만 그에게 들이댄 잣대를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들이대라. 자발성, 적극성, 지속성, 대가성, 강압의 정도를 동일하게 따져야 한다. 그래야 친일행위에 대한 비판도 설득력을 갖는다.

◆ 松山(송산) 정광제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 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고문이자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인문서 ‘신화가 된 조선’ ‘다다미 위의 인문학’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