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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적 비극 그린 크러스너호르커이 노벨문학상 수상
  • 연합뉴스
  • 등록 2025-10-10 00: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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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연체로 인생의 고통 표현…"7쪽 넘는 분량이 한 문장으로 쓰여"
  • 비탄 속 희망 찾는 사람들 그려…장편 '헤르쉬트 07769' 내년 국내 출간


노벨문학상을 받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노벨문학상을 받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EPA=연합뉴스. 

한글날인 9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다양한 사건이나 인물보다는 비릿한 삶의 풍경, 즉 '어쩔 수 없이' 비극적 상황에 포박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 소설가다.


그는 '사탄탱고', '저항의 멜랑콜리', '전쟁과 전쟁', '뱅크하임 남작의 귀향' 등 주요 4부작을 통해 인생이 건네는 절망과 고통, 타락과 구속, 전쟁, 반복성 등의 주제를 탐구해왔다. 삶을 구원해줄 메시아를 기다리지만, 등장인물들이 신산한 현실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그의 문학은 묵시록적인 비극에 맞닿아 있다.


 알마 제공. 

국내에 알려진 그의 대표작은 '사탄탱고'다.


헝가리 출신 세계적인 감독인 벨라 타르가 연출한 원작으로 더 많이 알려진 장편 소설이다. 롱테이크 기법으로, 극도로 신(Scene)을 아끼며 7시간 넘게 찍은 이 느린 영화처럼,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원작 소설은 끈적거리는 일상 속 절망을 기괴하게 그려낸다.


공산주의가 붕괴해가던 1980년대 헝가리. 해체된 집단농장의 마을에 남아 가난과 불신의 늪에 빠져 무기력한 삶을 보내던 이들 사이에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1년 반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이리미아시가 마을로 돌아온다는 얘기였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그가 가을장마의 시작과 함께 귀환한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은 절망적인 삶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는 달콤한 꿈에 부푸는 한편, 무언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시달린다. 종 없이 들려오는 종소리와 보이지 않는 거미들이 친 거미줄이 세계의 몰락이라는 공포를 부추긴다.


"그는 결국 냉혹한 즉결심판을 받고 어떤 계급 표식도 부여받지 못한 채, 시체를 씻는 사람들과 웃으면서 부지런히 피부를 벗겨내는 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가차 없이 인생사의 척도를 깨닫고 말리라. 돌이킬 수 없이. 사기꾼들과 벌이는 게임에 발을 들여놓은 결과는 진즉에 결정되었고 끝내 그는 마지막 무기처럼 지녀온, 안식처럼 한 번 더 돌아가고픈 희망마저 빼앗기고 말 것이다."('사탄탱고' 중)


사탄 탱고 중 한 장면 사탄 탱고 중 한 장면 


'사탄탱고'는 다양한 사건이 등장하고,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가 교차하는 소설은 아니다. 을씨년스러운 풍경 속에 마치 예수를 기다리듯, 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하루 이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꿈이 꺾이는 삶을 그렸다.


몰락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든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갈 뿐이다.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영원히 악순환하는 과정을 그린 절망의 묵시록인 셈이다.


또 다른 걸작 '저항의 멜랑콜리'도 '사탄탱고'와 궤를 같이한다.


헝가리의 어느 작은 마을. 살을 에는 추위가 이어지고 가로등은 이유 없이 켜지지 않으며 거대한 나무가 하루아침에 뿌리째 뽑혀 드러눕더니 수십 년간 멈춰 있던 교회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때마침 한 유랑 서커스단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래'를 보여준다며 도시에 들어서고, 마을에선 온갖 소문과 편집증이 난무하기 시작한다.


이 고래를 운반하는 불길한 트럭이 사실상 마을에 어떤 직접적인 해도 입히지 않고 그저 광장 한가운데 조용히 세워져 있는 것만으로 마을 전체를 광기로 몰아간다는 점이 독특한 소설이다.


한경민 한국외대 헝가리어과 교수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기이한데, 이는 현대인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며 "현대인들은 자신을 굉장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살아간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루머에 흔들리는 삶을 살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알마 제공. 

'전쟁과 전쟁'은 전쟁에 의해 파괴된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잃고 갈등하는지를 탐구하는 이야기다. 주인공 이브라힘은 전쟁의 지속성과 인간의 무의미한 싸움을 묘사하며, 마치 끝없는 전쟁의 메커니즘에 빠진 듯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의 내면은 끊임없이 혼란스럽고 무기력하며, 외부의 전쟁과 내면의 전쟁이 맞물려 갈등을 드러낸다. 소설은 인간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과 윤리적 갈등을 강하게 제기하며, 인간의 불안과 고통을 깊이 전한다.


4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뱅크하임 남작의 귀향'은 헝가리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마을에 돌아온 뱅크하임 남작의 이야기를 다뤘다. 남작은 오랜 시간 외국에서 생활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가 돌아온 이유와 그의 과거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소설은 공포와 부패, 권력의 문제를 다루며, 주인공인 남작의 복잡한 심리와 그가 마주하는 사회적 현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사회적 부패와 정치적 타락, 집단적 기억이 왜곡되는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알마 제공. 

크러스너호르커이는 헝가리를 대표하는 감독 벨라 타르와 합을 맞추기도 했다. 타르의 대표작 '사탄 탱고'와 '토리노의 말' 등 다섯 편의 각본을 썼다. '토리노의 말'도 사탄탱고처럼 흑백영화이며 10분이 넘는 한 신이 거의 한 컷으로 이뤄지는 영화다. 누군가가 마을에 찾아오면서(이 영화에선 집시) 벌어지는 이야기는 전작들과 비슷하다.


집시들이 찾아와 우물을 만지고 나서 갑자기 우물이 마른다. 식수가 떨어진 부녀는 말과 수레를 이끌고 다른 곳으로 떠나려 한다. 그러나 삭풍에 뒤섞인 절망이 그들의 허망한 희망을 꺾어놓는다.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바람은 그들의 발길을 되돌리게 하고, 부녀는 또다시 물 한 방울 없는 집에 갇혀 살아야 한다.


영화 '토리노의 말'영화 '토리노의 말'

삶에 대한 염세주의와 죽음, 그리고 인간에 대한 불신이 영화에 깊이 스며있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은 대개가 이렇다. 그가 쓴 소설과 영화 각본은 역사의 거시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생의 연약함, 세상의 광대무변함, 그런 세상 속에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은 적절한 단어, 정확한 비유, 상상과 이야기의 힘, 문장의 축적, 그리고 삶의 절망 속에서 역설적으로 피어나는 아름다운 산문으로 채워졌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미학을 선사한다. 특히 만연체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하다. 만연체 문장은 끝나지 않는 절망을 상징하는 듯, 끝없이, 끝없이 이어진다.


'뱅크하임 남작의 귀향'과 '서왕모의 강림'을 번역한 노승영 번역가는 "뱅크하임 남작의 귀향 서문만 해도 7페이지 넘는 분량이 한 문장으로 되어있다. 그것은 사건이 뒤에 나오니까 앞에는 저자가 자신의 예술관, 문학관을 오케스트라 악장에 대입해 표현하는 부분인데, 그 기나긴 문장 하나가 통일성과 하나의 주제의식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책 6권을 출간한 안지미 출판사 알마 대표는 "줄거리를 설명하면 단순해 보일 수 있는데 디테일도 많고 종말론적 세계관이 모든 작품에 깔려있다"며 "그러면서도 약간의 유머도 있어서 우울한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안 대표는 그의 장편소설 '헤르쉬트 07769' 출간을 준비 중이다. 그의 작품은 번역이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어 책은 내년 쯤 나올 예정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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