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고종 31년) 민비가 창덕궁에서 경복궁의 건청궁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때 민비는 장호원 피신 시절 알게 된 무당을 함께 데려간다. 무당의 이름은 진령군(眞靈君)이다. 고종과 민비가 직접 지어주었다. 한자 그대로 ‘진정으로 영험한 존귀한 분’이라는 의미다. 왕과 왕비가 얼마나 무당의 요설에 빠져 있었는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에 앞서 민비가 창덕궁에 있을 때 세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떠돌았다. “어젯밤 진령군이 창덕궁에서 한 말이 다음 날 아침에 어명으로 내려오더라.”
경복궁으로 환궁해도 고종과 민비의 진령군에 대한 숭배 감정은 변함이 없었다. 민비는 자신의 공식 주거 공간인 곤녕합을 진령군에게 내주었다. 옆의 복수당은 신당으로 꾸며주었다. 창덕궁 근처에 있던 진령군의 북묘(北廟)도 여전히 손님들로 붐볐다.
경복궁으로 이궁하고 나서 세간에는 새로운 비아냥이 등장했다. “인사는 신당에서 나오고, 모가지 날아가는 것은 북묘에서 나온다.”
진령군은 민비와 고종을 등에 업고 막강한 권세를 누리며 제 마음대로 국정을 농단했다. 황현(黃玹)이 쓴 ‘매천야록’에도 진령군의 국정 농단과 그로 인한 폐해가 상세히 기록돼 있을 정도다.
보다 못한 사간원 정언인 안효제가 목숨을 걸고 진령군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진령군을 “요사스러운 귀신”으로 지칭하며 “황당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면서 임금의 총애를 가로챘다”고 강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진령군의 목을 베어 효수하라”고 요구했다.
고종과 민비가 가만 있지 않았다. 상소문을 접하자마자 안효제를 유배시키라고 명령했다. 안효제는 멀고 험한 제주도로의 유배형을 받았다.
고종과 민비는 왜 이런 강공책을 썼을까. 더 이상의 탄핵 상소가 올라오는 것을 사전에 틀어막으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종두법 도입으로 유명한 지석영이 다시 분연히 나섰다. 그는 “신령의 힘을 빙자하여 임금과 중전을 현혹시키고,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물을 갈취하고, 자기에게 아첨하는 인사들에게 주요 직책을 뿌리며 국정 농간을 자행한, 요사스러운 계집인 진령군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그 살점을 씹어먹으려 합니다. 전하께서도 세상의 악화하는 민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라고 직간했다.
아무리 나라가 망해가는 조선 왕조 말기라 하지만 당시의 지식인들은 현 대한민국 사회 엘리트들보다 훨씬 더 용기 있고 정의감에 불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한국 사회에도 어딘가에서는 용자(勇者)의 목소리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보다 권력의 속내를 대변하고, 이쁨을 받고자 하는 자들이 더 눈에 띄는 세상이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소통위원회가 16일 한미일보 기사 작성자 두 명을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전용기 국민소통위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김현지 대통령실 제1부속실장 기사와 관련, “악의적 허위 보도와 인격 살인에 가까운 가짜뉴스를 유도했다”고 주장했다.
소통위원회는 “허위와 조작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고 지적하면서 “이번 조치가 특정 개인을 위한 대응이 아니라, 정확한 정보와 사실 중심의 보도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행위”라고 덧붙였다.
‘허위와 조작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말에 필자는 깜짝 놀랐다. 설마 민주당에서 이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어쨌든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그렇다. 그것이 모든 국민이 바라는 정의 사회 아니겠는가.
불행히도 우리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이런 허위와 조작이 아무런 견제 장치 없이 마구잡이로 자행돼 왔다. 사실 규명을 위한 사후 교정의 메커니즘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자 김어준 뉴스공장은 “계엄 당시 암살조가 가동됐다”는 “제보를 받았다”고 공개했다. 그러면서 한동훈 사살, 조국과 김어준 체포 호송, 북한 소행 발표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주장했다,
버전1에서 버전4까지 나왔던 ‘홍장원 메모’와 가필 혐의(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는 이와 관련해 박선원 민주당 의원을 고소했으나 수사당국은 지금껏 꿀먹은 벙어리다).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 고백과 관련된 박범계 의원의 위증교사 혐의 사건 등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검찰이나 경찰한테만 가면 이렇게 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둘러싸고 또 얼마나 많은 허위 사실들이 우리 사회를 좀먹고 병들게 했던가. 변희재 대표가 밝혀낸 태블릿PC 조작을 비롯, “세월호 사고 당일 박 대통령이 정윤회(최서원 씨의 전 남편) 씨와 한 호텔에서 만났다” “섹스 비디오 나올 것이다” “비아그라 처방했다” “최순실이 무속인에게 장관 인사를 물었다” 등 얼마나 많은지 셀 수조차 없다.
민주당 의원들은 성주 사드 기지 전자파가 “성주 참외를 썩게 하고 사람이 튀겨질 정도”라고 외쳐댔다. 그후 어떻게 됐냐고? 어느 누구하나 비판도 제재도 받지 않았다.
필자는 전용기 국민소통위원장의 기자회견문을 읽으면서 이제야말로 무엇이 허위이고 무엇이 진실인지를 국민 모두가 참여해 가려낼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정확한 정보와 사실 중심의 보도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행위가 뿌리내릴” 좋은 기회다. 그렇게 해서 사회 전체를 정화시킬 수 있다면 대한민국은 한 단계 더 성숙할 것이다.
누구를 숨겨주고 감싸기 위한 고소·고발이 아니라 진실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기 위한 캠페인! 전용기 의원이 그런 일에 앞장서면 어떨까. 만일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조선시대에는 진령군이라는 무당을 둘러싸고 지식인 안효제와 지석영의 목소리가 있었고, 대한민국에는 김현지 부속실장을 둘러싸고 전용기 의원의 목소리가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신우 前 문화일보 논설고문·‘부정선거와 내란범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