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계몽’의 선구자인 지만원 박사가 올해 1월15일 경기 의왕의 서울구치소 정문 앞에서 열린 환영식 및 기자회견에서 2년 만기 출소 후 소회를 밝히고 있다. / 허겸 기자
갖은 핍박 속에서 1980년 5·18 당시 북한의 개입 의혹을 연구해 온 것으로 평가받는 ‘5·18 북 개입 연구의 대가’ 지만원(83) 박사가 ‘절반의 성공’을 거둔 소식이 뒤늦게 전해졌다.
지 박사는 외견상 민사소송에서는 패소했지만, 5·18 당시 북한 공작원이나 간첩의 활동 가능성을 시사하는 내용을 판결문에 수록하는 결과를 이끈 점에서 5·18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는 여론층으로부터 진실에 한 걸음 다가서게 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얻고 있다.
4일 <한미일보>가 판결문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광주고법 민사1부(고법판사 이의영·조수민·정재우)는 지난 9월4일 변론을 종결하고 지난달 30일 선고한 항소심 판결문 12쪽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의 소규모 공작원 또는 고정간첩이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는 있으나”라는 문구를 기재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 박사의 변론을 맡아온 구주와 변호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지난 수십 년간 일관되게 한쪽 방향에서만 판결해 오던 법원의 입장이 변해 5·18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전환한 대단히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구 변호사는 “향후 5·18에 대한 표현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가 폭넓게 인정되기를 바란다”며 “유사한 내용으로 5·18특별법 위반으로 수사·재판받는 분들에게 모두 무혐의·무죄 판결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판결문에 ‘北 개입’ 견해 수록… 1981년 大法 확정판결 이후 첫 사례
법원이 5·18 당시 북한의 개입 가능성을 판결문에 수록한 것은 지난 1981년 대법원의 최초 확정판결 이후 처음으로 알려졌다.
대법원은 일찌감치 5·18을 김대중(DJ)에 의한 내란 사건으로 확정 판결을 내린 바 있다.
5·18 이듬해인 1981년 내려진 상고심 선고에서 대법원은 DJ가 국가 변란을 획책하려 했다는 취지로 5·18의 성격을 규정했다.
근거 중 하나로 “(김대중과 연계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일본본부는 북괴와 조총련 지령으로 구성되고 자금 지원을 받아 목적을 이루는 반국가단체”라고 이적성에 주목했다.
그러면서 “고도의 정치·군사적 행위인 비상계엄 선포는 당연무효되지 않는다”며 “계엄선포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권한은 사법부에 없다”고도 못 박았다.
1980·1981년 1·2·3심 판결문을 종합하면 사법부는 “내란음모죄는 실행 착수 전에 2인 이상이 내란의 내용에 합의하는 것이고 세부 계획까지 모의할 필요는 없고(1975년 4월8일 선고 74도3323) 구성요건도 형법 제90조에 따라 내란죄를 범할 목적으로 음모함으로써 족하다”며 DJ의 내란 음모 혐의를 사실로 확정했다.
사법부의 최종심인 대법원의 확정판결은 ‘기판력(旣判力)’을 갖는다. 대법원이 한 번 확정하면 같은 사건에 대해 다시 사법부가 심리하고 번복할 수 없는 영속적인 효력이다.
이 같은 판단을 내린 것은 한국 정부만은 아니었다.
복수의 미 국무부와 중앙정보국(CIA) 문건에 따르면 미국은 5·18의 성격에 관해 △북한 민간 공작대원들(North Korean Agents) △김대중 추종자들(Kim Daejung followers·Associates) △공산주의 선동가들(communist instigators) △불순세력(impure elements) 등이 사전 계획하고 주도한 ‘내란(insurrection)’ ‘반란(rebellion)’ 형태의 대남공작으로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다.
1980년 5·18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존 A 위컴(John Adams Wickham) 장군은 “광주사태에서 민간인이 군·경(군인과 경찰)의 총을 빼앗아 군인에 대응한 것은 ‘Another Enemy(또 다른 적)’로 간주되며 정규군이 즉각 소탕해야 한다”며 “국가에는 정규군보다 더 강한 집단이 있어선 안 된다”고 발언했다는 이정린 전 국방부 차관의 증언도 있다.
북한 개입설은 확인 여부에 따라 5·18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뀌게 한다.
우리 군복을 입고 계엄군 행세를 한 북한 무장공비와 고정간첩이 무고한 광주시민들을 총으로 쏜 뒤 계엄군의 잘못으로 덮어씌운 모략 전술이 드러나면 정부 폭력에 항거한다는 순수한 민주화운동으로서 명분을 잃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기존 5·18유공자는 대대적으로 물갈이가 불가피하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미 국무부가 기밀 해제한 ‘외교 전문(80SEOUL 006865)’에 따르면 1980년 당시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간첩 이창룡 생포 등)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불순세력’과 공산주의 선동가들이 있다(‘impure elements’ and communist instigators lay behind the whole affair)”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미국의 외교 전문도 ‘외부 침입자들(infiltrators·남파간첩들)’과 ‘공산주의 선동가들(communist instigators·고정간첩들 또는 혁명역량)’이라고 복수로 못 박아 명시하고 있다.
문민정부 대법원의 역모였나… DJ 反국가 무장 반란→민주화운동 탈바꿈
그러나 1997년 대법원은 같은 사건에 대해 다시 심리하지 않는다는 헌법상 일사부재리 원칙을 깨고, 민주화운동으로 판단을 바꿨다.
이에 따라 DJ의 반(反)국가 무장 반란으로 확정한 1981년 판결은 16년 만에 뒤집혔다. 면죄부를 얻은 DJ는 이후 승승장구하며 대통령 자리까지 꿰찼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스스로 어긴 대법원의 처사에 대해 오늘날까지 뒷말이 나오고 있다.
동시에 5·18이 폭동으로 다시 평가가 바뀔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는 제언도 나온다.
중대한 사실관계가 뒤바뀌지 않았는데도 정치적 이유에서 법리 해석을 달리함으로써 교도소를 습격하고 정부를 향해 총을 쏜 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해석이 바뀐다면 훗날 얼마든지 새로운 해석도 가능하다는 견해들이다.
5·18 평가가 뒤바뀐 것은 노태우의 6공화국 비자금이 탄로 난 것이 결정적 계기로 회자된다.
민주정의당(민정당)이 서울 송파구 가락동 연수원을 매각해 발생한 거액의 돈 중 일부였던 수백억 원을 노태우와 영부인 김옥숙 그리고 보좌관 박철언이 착복했다.
이 사실이 김윤환 민주자유당(민자당) 사무총장 귀에 들어갔고 곧이어 김영삼도 알게 됐다. 김영삼은 노태우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런 김영삼의 입을 막기 위해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정치자금 3000억 원을 줬고, 대권의 바통을 물려주게 된다.
40년간 미국 정보요원으로서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조사했던 마이클 이(92) 박사(미 조지 워싱턴대·정치학)는 5·18 시리즈 보도 당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5·18이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변질되며 점차 민주화운동의 양상을 띠게 된 배경과 관련해 “김대중의 전라도 세력이 김영삼을 공격한 것”을 우선 꼽았다.
5·18 발발 1년 전인 1979년 북한의 남한 민중봉기 계획 정보를 입수해 워싱턴에 최초로 보고한 정보요원이었던 이 박사는 “1993년 이후 김영삼이 집권하면서 노태우로부터 받은 정치자금의 스캔들을 덮고 아우성치는 호남 세력의 반발을 잠재우려고 김영삼은 1995년 12월21일 광주 5·18 국가전복 무장 폭동을 민주화 민중봉기로 둔갑시키기 위한 ‘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을 제정했다”고 증언했다.
‘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은 법적으로도 불충분했다.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기 위해선 재판관 9명 중 3분의 2, 즉 6명 이상이 동의해야 했지만 헌재는 위헌 5명·합헌 4명으로 한 명이 부족해 위헌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어 1996년 1월23일 5·18 특별법 재심을 위한 공소시효가 만료됐고, 결국 대법원은 1997년 4월 광주 5·18 무장 폭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뒤집는 판결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외부개입 없다”던 左편향 조사위, ‘광주가 광주 쐈다’ 제살깎기 결론
당시 대법원의 판결문은 숱한 오류들로 점철됐다는 법조계와 학계의 혹평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두환 발포 명령’을 역사적인 실재(實在)로 증명할 확정적 증거가 단 하나도 없다는 게 지적의 핵심 근거다.
좌편향 조사 행태를 계속해서 지적받아 온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송선태)는 2023년 12월26일 공식 활동을 종료하면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발포 명령과 암매장 등 5개 과제를 규명하는 데 실패했다고 같은 달 27일 연합뉴스가 확인·보도했다.
이로써 그동안 조사위가 핵심 직권조사 안건으로 삼았던 이들 사건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일방의 주장으로 결론 났다.
이에 따라 4년간 거액의 국민 혈세를 들이고도 핵심 과제에 대해 규명하지 못한 정부 조사위가 소속 직원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날 선 비판마저 제기되고 있다. 가짜 유공자 논란이 끊이지 않는 5·18유공자 규모 부풀리기에 버금가는 도덕적 해이가 아니냐는 지적이다.
발포 명령과 암매장은 1980년 5월 항쟁 발발 이후 44년 동안 5·18의 가장 뜨거운 이슈였다.

이 중 발포 명령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후 합동수사본부장)이 신군부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광주·호남 시민을 총으로 쏴 죽이도록 계엄군에게 명령했다는 게 주장의 본질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군 조직의 특성을 무시한 일방적인 주장으로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는 반박 의견도 꾸준히 제기되었다.
그동안 예비역 군·안보단체는 무장 폭도의 대(對)정부 선제공격에 따른 정당방위 차원의 ‘자위권 행사’를 발포 명령으로 간주해선 안 되고 삼성장군(육군 중장)인 전두환 합수부장은 사성장군(육군참모총장)이자 사격 명령 권한을 지닌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대신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꾸준히 지적해 왔다.
5·18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이희성 장군은 2016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두환 발포 명령에 관해 “군의 작전지휘 계통을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라며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5·18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즉각 국군명예회복운동본부(명본)는 문재인 정부에서 출범해 4년간 500억 원 이상 정부예산을 소진한 5·18조사위가 끝내 발포 명령설을 규명하는 데 실패한 사실을 꼽으며 “계엄군에 의한 집단 발포가 없었던 게 확인됐기에 정부가 계엄군 명예 회복에 나서라”고 강력하게 성토했다.
당시 명본은 “‘전두환 발포 명령’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 사실로 규명이 됐다”며 “전두환 대통령을 발포 명령자로 만들어 김대중의 내란 음모와 북한군 개입의 비밀을 감춰 5·18의 아성을 지키려고 했던 꼼수가 다수의 진실 증언 앞에 수포로 돌아갔다”고 강하게 공박했다.
구체적으로 명본은 성명에서 “5·18 투입 계엄군 2만317명 중 계엄군 지도부 73명, 계엄군 318명에 대해 진술조서·녹취·녹화하고 1193명에 대해 면담·전화조사를 했지만 누구도 집단 사격과 집단학살을 진술한 게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직격했다.
그러고는 “그 당시 전두환 사령관에 의한 발포(사격) 명령은 분명히 없었다는 게 다 검증이 됐는데도 조사위는 진실 규명 불능처리를 하고서도 자초지종 없이 보고서에 계엄군에 의한 집단학살을 언급해 계엄군을 학살자로 고착시키는 억지를 부려 국가 최후의 보루인 군을 몹쓸 집단으로 모독하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이로써 계엄군이 먼저 무고한 광주시민을 쏴 죽였다는 허위 사실을 무려 40여 년간 확대 재생산하며 우려먹은 데 대해 5·18민주화운동 측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친 바 있다.
특히 외부 세력의 개입 가능성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광주시민이 광주시민을 총으로 쏴 죽였다는 처참한 결론에 근접한 5·18조사위를 5·18특별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었다.
5·18에 북한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각종 정부 문건과 증언들을 외면한 결과, 순수하고 무고한 광주시민을 동족상잔의 가해자로 결론 내린 데 대한 책임을 혹독하게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동족상잔’의 우려는 광주와 호남을 고향으로 둔 5·18연구가들을 중심으로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면서 경각심을 일깨워왔지만 5·18조사위는 이를 반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공정하지 못한 결론으로 내부에서조차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문재인이 만든 5·18조사위 내부에서도 “이런 결론은 아니올시다” 반발 분출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추천으로 5·18조사위에서 활동했던 이종협 상임위원과 이동욱·차기환 비상임위원이 보고서에서 조사의 부정확성과 부실함을 탓하며 “진상이 규명된 것으로 결정해선 안 된다”는 소수의견을 낸 것이다.
조사 활동을 마친 조사위가 송선태 중심으로 성과를 자찬하는 대국민 기자회견을 갖자, 이들 조사위원 3인이 “결론에 동의할 수 없다”고 취재진에 성명을 배포한 것이다.
이에 따라 5·18이 폭동과 반란인지, 민주화운동인지 아직 사회적 함의가 없다는 명확한 인식을 국민 일반이 재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좌·우의 관점에서 공정하게 조사한 결과를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권마다 구성된 5·18 관련 조사위는 좌편향 일색이라는 지적으로부터 단 한 번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단적으로 우파 인사의 비율이 거의 없다는 날카로운 지적까지 끊임없이 제기됐다.
일례로 지만원 박사의 5·18조사위 합류도 오월단체가 그악스럽게 반대해 무산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사 방향의 열쇠를 쥔 키맨들의 상당수가 전남대 운동권 출신인 조직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도 나왔다.
광주 무장폭동 계획이 적힌 ‘자유노트’. 송선태가 기록했다는 증언이 있다.(왼쪽). 5·18유공자 명단 속 송선태에 관한 기록.
5·18 유공자가 조사위 활동에 깊이 관여한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이들이 조사보고서 작성에 참여하는 것은 공정성을 저해하는 제척 대상 행위로 법률상 금지된다. ‘제척’이란 죄를 지은 아들의 사건을 판사인 아버지가 재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조사의 공정성을 해칠 우려가 있어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법리적 원칙이다.
5·18 유공자를 조사위에서 배제해야 하는 것은 조사 과정에서 ‘유공자’로서의 지위를 잃을 만한 증거나 사안을 고의로 축소·은폐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서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유공자의 조사위 참여 금지 원칙을 어겼을 뿐 아니라 장관급 조사위원장에 유공자인 송선태 씨를 임명함으로써 일찌감치 공정성 논란을 일으켰다.
전두환 사령관의 발포명령을 규명하겠다며 정권마다 5·18조사위를 구성해 예산을 쓰면서도 5·18을 헌법 전문에 넣겠다는 움직임도 동시에 추진하는 건 모순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대해 한 5·18연구가는 “조사할 것이 남았다면서 완결된 역사적 사실을 전제로 수록해야 하는 헌법 전문 근처에는 기웃거릴 필요가 없다”며 “조사하려면 끝날 때까지 헌법 전문 이야기를 해선 안 되고, 헌법 전문에 넣겠다면 더는 조사를 해서는 안 되는 모순에 빠진 모양새”라고 뼈 때리는 말을 기자에게 건넸다.
對정부 무장 폭동 계획 ‘자유노트’ 작성자 송선태가 5·18 조사위원장
5·18 조사위의 공정성 논란은 위원장의 자격 논란도 한몫했다. 위원장을 맡아온 송선태 씨가 5·18유공자인 사실은 기자의 취재 과정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관련 보도가 나가자,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다는 비난이 쇄도했다.
전남대생 송선태는 DJ가 전북 정읍에서 게릴라전을 선동하던 같은 날 다이너마이트를 활용해 전남도청을 점령하는 대(對)정부 무장 폭동 계획인 ‘자유노트’를 직접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자유노트’는 일각에서 5·18이 ‘비폭력 민주화운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위중한 문건으로 받아들인다. 방송국과 무기고·공공기관을 죽창을 동원해 접수하고, 탈취한 무기로 도청을 점령한다는 끔찍한 내용이 적시돼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무장봉기를 사전 계획하고 획책하려 한 항쟁계획서로 보고 5·18 진실 규명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초점을 맞춘다.
1988년 12월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제15호에 따르면 증인으로 출석한 한상석은 청문회 위원인 권해옥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이 ‘자유노트’의 작성자가 누구인지 묻자 “송선태와 내가 같이 썼다”고 답했다.
한상석 증언에 따르면 ‘자유노트’는 1980년 10월25일 합동수사단에 압수됐고 한씨 등이 2심 재판을 받을 때 검찰이 증거로 제시해 법원이 채택했다. ‘자유노트’가 세상에 공개된 과정은 전남 운동권 총책으로 불린 윤한봉이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1980년에 전남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국민연합 전남지부장이었던 윤한봉은 “그 노트를 (전남대) 학생회 간부 중 한 놈이 숨어 있다가 자수하면서 갖고 들어갔는데 다행히 수사가 일단락된 다음에 그 노트가 나와 뒤집지를 못했다”고 말했다. 5·18 직후 정부는 합수단을 꾸려 조사에 나섰으며 ‘자유노트’가 발각된 그해 10월 즈음엔 사실상 수사의 마무리 단계여서 유야무야됐다는 게 윤씨의 설명이다.
‘들불야학’ 강사였고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한 윤상원은 그해 5월9일 청년운동권 회동에서 “군대 투입과 무장진압에 대비해 쇠 파이프·각목·화염병 등을 준비하고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총기를 확보하고 TNT(다이너마이트)를 제작해서 자체무장을 해야 한다”고 윤한봉과 동일한 발언을 했다. 윤씨의 증언은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2권 168쪽(광주광역시 5·18사료편찬위원회)에 기록돼 있다.
윤한봉은 “(경찰조사에서) 송선태가 자기가 그걸 작성했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막 썼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끝났다”고도 증언했다.
그러나 ‘자유노트’는 실제 현실화한 점에서 심각성을 더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당시 기자가 입수한 ‘자유노트’ 문건에 따르면 무장폭동을 계획한 이들은 ‘19일 2~6시 북동 성당 시내 진출’이라고 시각과 위치를 좌표 찍듯 못 박았다. 또 카농(가톨릭농민회)과 가톨릭노동청년회·기도회의 연결고리를 제시했고, ‘죽창·밧데리·방송국·공공 건물 접수’에 이어 ‘예비군 무기고 접수’라는 표시에는 동그라미와 별표가 있다. 무기를 획득해야 할 필요성을 특별히 강조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5·18 항쟁사 정리를 위한 인물사 연구’에 따르면 윤한봉은 2006년 윤씨의 직접적인 구술 면담에서“도청을 장악하고 끝까지 항쟁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라며 “무장을 하기 위해서는 예비군 무기고가 어디 있고 다이너마이트는 어디에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 5·18 때는 예비군 무기고 44곳이 탈취됐고 전남도청 지하에 대규모 다이너마이트 등 폭발물이 설치됐다.
막대한 정부 예산을 들여 누가 먼저 총을 쐈는지, 집단 발포 명령이 있었는지 등의 진실을 가리기 위한 정부 위원회의 장관급 위원장을 5·18 직전에 수립된 구체적인 무력 폭동 계획에 관여한 인물이 맡고 있어 진상규명위원회의 최종 조사 결과를 믿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증폭됐다.
증거 없는 ‘집단 발포’ 40여 년째 선전·선동… 시민군 對정부 공격 정당한가
이른바 ‘폭도’로 간주하기도 하는 무장 시민군의 대정부 공격이 범국민적 정당성을 얻기 위한 대전제는 크게 두 가지로 꼽힌다.
첫째 정부군(계엄군)이 먼저 상관의 사격명령에 따라 일제히 집단 사격으로 시민을 쏴 죽였거나 둘째 정부 전복이 합리적이라고 볼만한 결정적 잘못과 그에 대한 책임이 정부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계엄군의 사격 명령은 오늘날까지 증거 불충분으로 논란이 이어진다. DJ가 군중을 선동했던 45년 전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문재인이 만든 5·18조사위도 ‘증거 부족’을 이유로 전두환 사격명령을 규명하는 데 실패했다고 광주의 언론들이 보도하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언에 따라야 한다는 여론의 규모가 만만치 않다. 피고인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확신이 없을 때는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는 헌법과 형사소송법상 원칙이다. 이처럼 상식적인 원칙이 전두환 대통령에게는 무려 45년간 적용되지 않았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후 합수부장)은 법리상 무죄이지만 정서상으론 여전히 유죄로 간주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덮어놓고 ‘전두환=악마’라는 것이다. 그의 유해는 지금까지도 반발에 부딪쳐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전두환 대통령. / 연합뉴스 그래픽.
전두환 대통령의 실책을 12·12에서 원인을 찾는 이들도 있다. 12·12가 군사 반란이라는 해석 역시 논쟁이 거듭되고 있다.
당시 검찰 수사 기록에 따르면 정승화는 대통령이 시해된 1979년 10월26일 피 묻은 옷을 걸친 채 나타난 김재규와 같은 차에 탄 뒤 그가 새 옷과 구두를 갈아신는 것을 보고도 직속상관인 노재현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김계원 비서실장이 정승화·노재현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김재규가 범인임을 알린 밤 11시40분까지 무려 4시간 동안 정승화는 침묵했다. 누구도 상식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행동 패턴이다.
그는 또 차지철 경호실장만 할 수 있는 경호 인력의 시해 현장 출동명령을 전화로 중단시켰다. 상식적으로 차 실장이 죽은 사실을 인지해야 가능한 행동이었다. 대통령과 차지철이 죽고 김재규가 피범벅이 됐다면 직속상관과 내각 각료들에게 정황을 알리는 게 군인으로서 기본이었다. 이에 따라 수사 책임자였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상급자이자 육군 참모총장인 정승화를 반드시 조사할 의무가 있었다.
이에 반해 같은 시기 DJ의 행보는 달랐다. 그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로 소요 사태가 이어진 1980년 5월1일 과도내각을 결성한 사실이 1981년 대법원 판결문에 수록돼 있다.
김대중 내란 음모 1·2·3심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김대중이 이날 자택에서 문익환 등과 교내 시위를 교외 시위로 유도하고 시민이 가세하도록 선동해 폭력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면 정부가 붕괴될 것이니 학원에 영향력이 있는 청년 조직원들이 학생선동에 더욱 주력하도록 하고 결행 시기는 5월 중순경으로 정했다”고 결론 내렸다.
이에 앞서 과도내각 모의도 있었다고 당시 대법원은 판단했다. 대법관들은 “4월 초에는 사조직을 비롯한 종교계·청년학생들을 앞세워 일시에 범국민적 반정부 폭력시위를 유발하기로 합의했다”고 사실관계를 판결문에 명시했다.
예비내각 명단은 뜻하지 않게 세상에 나오게 됐다. 신동아 1999년 7월호 등에 따르면 DJ가 연행된 1980년 5월17일 이희호 여사가 예비내각명단을 갖고 있다 빼앗겼다. 이 여사는 서랍에서 꺼낸 종이를 핸드백에 넣고 밖으로 나가려다 중정 수사관에게 발각됐다. 수사관은 제출을 요구했고 결국 두 쪽짜리 종이를 압수했다. 한 장은 예비내각이었다. 당시 신문들이 이 사실을 보도했다.
“DJ가 학생들에 돈 주고 내란 선동”… 美 국무부 문건 기밀해제
정동년(2022년 작고) 전 5·18기념재단 이사장의 법정 증언 기록 / 미 국무부.
DJ의 내란 음모를 규명하는 데 미 국무부 기밀해제 문건은 새로운 정황도 시사한다.
미 국무부가 지난해 10월4일(현지시간) 추가로 기밀 해제한 5·18 당시 극비문건(80SEOUL 014538)에는 DJ가 학생들에게 돈을 주고 내란을 선동한 ‘물적 증거(material evidence)’를 우리 당국이 확보했음을 주한미국대사관이 본국에 보고한 사실이 확인된다.
즉, 고문·자백강요 등으로 오염될 수 있는 구두진술 이외에 물적 증거도 대법원이 고려해 DJ의 사형을 확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이 사건은 연루자들이 모진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사실을 자백했다고 주장하면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의미가 축소됐고, 훗날 정부를 향해 총을 쏜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성격이 뒤바뀌는 단초를 제공했다.
또한 미 대사관이 워싱턴에 보고한 외교 전문에는 DJ의 내란음모 혐의를 뒷받침하는 증거의 하나로 정동년(2022년 작고) 전 5·18기념재단 이사장이 재판정에 서기 전에 DJ와의 연계와 유죄를 자백하는 진술을 했다고 기술돼 있다.
특히 정부는 “정씨가 봉기의 주동자이자 김대중과 밀접하게 활동하며 ‘폭력을 통해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overthrow the government by violence)’”고 주장한다고 미 대사관은 보고문을 띄웠다.
그러면서 김대중에게 푹 빠진(infatuated) 사람으로 알려진 정씨는 학생들에게 내란을 일으키도록 돈을 줬으며 정씨는 이 돈이 김대중으로부터 왔다고 말했다(he was allegedly so infatuated with KIM DAE JUNG that he gave money to students for insurrection from his own pocket, saying it came from Kim)고 미 대사관은 보고했다.
또한 정씨가 김대중이 권력을 쥐게 되면 ‘국회의원 자리 하나(a National Assembly seat)’를 보상받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군검찰이 브리핑한 사실도 보고서에 기술했다.
이밖에도 기밀 해제된 외교 전문에는 “그는 나중에 김상현을 통해 500만 원을 김대중으로부터 받았다(Later he received 5 million won from Kim trough Kim Sang-hyun)”고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김대중 등을 내란 혐의 등으로 기소한 군검찰은 ‘사진·인쇄된 전단지·반란을 촉구하는 지하 신문·일기장·무기 등 형태의 물적 증거(material evidence in the form of photos, printed leaflets and underground newspapers urging rebellion, and diaries and arms)’를 재판의 증거로 확보한 점도 미 대사관 직원이 워싱턴에 보고한 것으로 나타났다.
헨리 스콧-스톡스 NYT 기자.헨리 스콧-스톡스(Henry Scott-Stokes) 전 뉴욕타임스(NYT) 지국장은 저서 ‘영국기자가 본 연합국전승사관의 허망’ 중 ‘내가 만난 아시아 지도자’ 대목에서 “김대중은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라며 “광주사건이야말로 김대중의 민주주의 기만이 뚜렷이 드러난 사건”이라고 일갈한 것도 5.18의 성격을 재정의하는 데 주목할 만한 점이다.
그는 “김대중이 노린 것은 권력이었고 광주사건이 벌어진 가운데 김대중은 권력을 쟁취하는 것에 가장 많이 신경을 썼다”고 혹평했다. 그러면서 “1980년 광주사태는 김대중 자신이 민주화 기수를 가장해 대통령이 되기 위해 폭동을 사주한 사건이었다”며 “광주사건을 일으킨 사람들, 김대중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김대중이 얼마나 세속적 지위나 돈을 중요시하고 일족의 재산 축적에 혈안이 돼 있었는지 잘 알고 있다. 우리 외국 언론들은 그 사실을 감춰 왔다”고 했다. 또한 “저널리스트로서 어리석었던 나 자신이 부끄럽다”며 “재산 축적보다 훨씬 무거운 죄는 나라를 팔아버린 국가 반역 행위였다. 말할 것도 없이 북한과 연관된 일이다”고 덧붙였다.
DJ는 1982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제출한 자필 각서에서 국가안보에 누를 끼친 잘못을 자백했고 향후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DJ를 비롯해 관련자들을 대대적으로 석방했고 ‘광주의 아픔’을 묻고 가겠다며 더는 폭동의 배후를 캐묻지 않았다. 그러나 DJ의 5·18 무장반란은 노태우의 6공화국 비자금이 탄로 나면서 정치적 야합의 서사 구도가 형성되는 가운데 민주화운동으로 점차 탈바꿈돼 갔다.
화순경찰서 유치장 800명 습격… “유치인 내놓으라” 총 쏘며 무기탈취 시도
활동 기간 내내 좌편향 지적과 잡음이 잇따랐던 5·18조사위 내부에서도 편향적인 결론에 반기를 드는 일도 있었다.
이에 따라 마치 ‘민주화 운동’으로 답을 정한듯한 5·18조사위의 잠정 결론에도 심각한 타격을 줬다.
보수당 추천 조사위원들은 5·18 당시 폭도 800여 명이 5월21일 ‘집단발포’ 이전에 경찰 유치장에 갇힌 이들을 빼내려고 총을 쏘며 경찰서를 습격했다는 정부 기록물을 새롭게 발굴해 폭로했다.
지금까지 시위대가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한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수감돼 있는 구금자를 빼내기 위해 총을 쏘며 경찰을 위협한 사실이 정부 문건으로 공식 확인되기는 처음이었다.
새롭게 발굴돼 일반에 공개된 ‘화순경찰서 종합상황실 근무일지’ 등 정부 기록물 4건에는 ‘폭도 800여 명’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다. 이는 지금까지 전남 일대의 무기고를 습격한 폭도 또는 시위대의 규모로는 가장 큰 것이다.
이로써 순수한 민주화운동을 자처한 이들이 왜 경찰서 유치장을 습격했는지 낱낱이 규명해야 했지만 5·18유공자 송선태가 이끄는 조사위는 비중을 축소하려 했고, 위원 3인과 갈등을 빚었다.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충정작전결과’ 보고서에는 이미 5월21일 오전 11시30분에 ‘시위 군중 330명이 전(남)대 지역 3공수여단 공격’ ‘차량 12대로 돌진공격 감행’이라고 적시됐다. 전교사 자료집.
5·18 정부 조사위원들이 ‘화순경찰서 습격 및 유치인 탈출 총격 시도’ 사건을 근거로 시위대 선제 무장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진상규명 가능’에서 ‘불가능’으로 결론이 180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교도소와 구치소·유치장 등 국가 교정시설에 구금된 양형 확정 기결수 또는 미결수나 피의자를 탈옥시키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반(反)사회성을 수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수형 시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 행위에 대해선 강력하게 대응한다. 총을 든 무장 습격이라면 더욱더 강력한 사법적 제재가 뒤따른다. 5·18을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뒤바꾼 1997년 대법원 재판부는 이런 역사적 사실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보수당 추천 위원들에 따르면 이 사실은 최근 새롭게 발굴됐기 때문이다. 향후 재심 가능성을 열어젖혔다는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시위대의 무기고 습격 시점은 2000년대 들어 꾸준히 ‘뜨거운 감자’였지만 당시 새롭게 발굴된 정부 문건으로 우파 중심의 추가 조사의 여지가 확대됐다. 문재인 조사위의 한계를 드러내고 우파 중심의 조사위 구성이 절실하다는 새로운 시사점을 던지며 마무리된 것으로 볼 수 있어서다.
사정이 이런데도 덮어놓고 ‘민주화운동’이라고 일의적으로 획정하고, 이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합리적 반론을 제시하는 연구가·학자 또는 기자에 대해 '5·18 특별법'을 제정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재갈을 물리려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실정이다.
역사적 사실을 한 방향으로만 해석하도록 법으로 강제하는 게 물리적으로 가능하냐는 힐난도 그치질 않고 있다.
“5·18 정신은 봉사정신이다.”
5·18특별법을 앞세워 고소·고발을 남발하고 있는 5·18기념재단 고위 관계자가 재단을 방문한 취재진으로부터 5·18 정신이라는 게 무엇인데 헌법 전문에 넣으려 하냐는 질문을 받자 이같이 답했다.
그 즉시 “할 짓이 없어서 봉사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으려고 그 난리냐”는 비아냥이 나온 건 어쩔 수 없었다. 헛웃음은 그들이 초래했다.
경찰 감청 기록에 등장한 “청천강”… “5·18 기간 광주~北 교신 5000회”
이같이 5·18은 이유 불문하고 민주화운동으로만 규정짓도록 법까지 제정한 그들이 있는 반면 균형 잡힌 시각에서 5·18의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고자 좌우의 관점을 연구하는 이들도 많다.
기자가 익명의 연구가로부터 입수한 20사단 60·61연대 진압 상황일지에 따르면 경찰은 5월29일 전남 영광의 불갑산 중계소에서 특이한 교신 내용을 감청했다.
‘청천강’이라는 호출부호가 이날 오후 2시43분 경찰에 포착된 것이다.
청천강은 북한의 평안북도와 평안남도의 경계를 이루는 강이다. 남쪽에는 평양을 가로지르는 대동강이 흐르고 북쪽에는 압록강이 있다.
무전 청취 기록에 따르면 청천강으로 호출한 괴한은 “천 61번지가 정확히 어데쯤되는가?”라고 묻는다. “어데”라는 표현은 북한식 말투이다. 감청 청취자가 간첩 간 교신으로 판단해 의도적으로 이 말투를 기록한 것인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어 오후 4시01분 무전 청취에선 “감도가 나쁘다. 서울 재식이에게 안부 전해라”고 말한다. 13분이 흐른 4시14분에는 “편지 가져와라. 막바로 이렇게 하면 알아들을 거요”라고 교신했고 다시 “3개 안부 전해라”고 대답한 것으로 무전 청취됐다고 상황일지는 기록했다.
경찰 감청일지에 등장한 ‘청천강’이라는 호출부호. / 20사단 진압 상황일지 캡처.
일지는 전남 영광 불갑산 중계소와 해안 경찰의 상호 교신을 육군 60연대 하모 중위가 입수해 기록한 것이다. 군은 이날 오전 9시30분 경찰관 39명에 대한 배속을 해제했다. 일부 경찰력이 계엄 기간 군의 지휘를 받다가 비로소 자율적 활동에 들어간 것이다. 이에 따라 광주 서부경찰서는 통신감청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60연대 하 중위가 경찰이 감청한 마지막 교신 기록을 기재한 시각은 오후 5시20분이다. 마지막 무전 청취로부터 33분 흐른 시점이다.
다시 일지 기록시간으로부터 50분 뒤인 오후 6시10분 서부경찰서 경비과장은 무장 폭도 은신 첩보를 입수한다. 금동 남도극장 부근에 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난동자 15명이 은신해 있다는 내용이다. 경찰 17명과 장교 2명·사병 30명으로 구성된 1개 소대가 출동했고 오후 7시40분 현장 수색에서 용의자 6명을 붙잡아 경찰에 인계했다. 이들의 대공 혐의점 등 추가 정보에 관한 정부 문서는 공개되지 않았다.
이보다 50분 앞선 오후 6시50분에는 전일빌딩 뒤편에서 카빈 4정·실탄 81발·경찰요대 1개와 탄창 6개·경찰봉 2개 등을 61연대 2대대가 노획한 것으로 일지에 기록됐다. 비슷한 시각인 오후 7시10분 보안대의 심모 중사는 충정작전 관계 첩보를 20사단 연대와 경찰·전투병과교육사령부(CAC)에 통보한다. 주요 내용은 △폭도가 대인동 사창가에 총 소지하고 은신 △광주시 프린스호텔과 대흥여관은 5월27일까지 폭도 아지트로 사용 등이다.
송선태가 이끄는 5·18조사위는 최종 보고서에서 이런 내용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사안에 따라서는 외부세력의 개입을 충분히 의심할 만한 정부의 공식 기록이지만 송선태는 이를 빼고 보고서를 만들었다.
5·18 기간에 광주에서 북으로 넘어간 교신이 5000회가 넘는다는 복수의 증언도 있었다.
북한 호출부호로 추정되는 다량의 교신을 경찰이 감청한 정황이다. 5·18 연구가들은 이것이 사실상 고정간첩 또는 남파간첩이 암약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좌편향된 정부 조사위에 맞서기 위해 취재진 중심으로 구성된 민간5·18진상규명진상조사위원회(민진사·위원장 정성홍)는 “5·18 전 기간 걸쳐 ‘광주에서 북으로 넘어가는 통신을 오대산 감청기지에서 5000회 이상 잡았다’는 말을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예비역 군단장급 고위 정보원에게서 들었다”고 했고, 당시 합동수사본부의 고위 관계자도 같은 증언을 기자에게 전한 바 있다.
5·18 당시 통신감청은 오늘날 시긴트(SIGINT·신호정보)로 표현된다. 각종 첨단 장비를 활용해 통신·통화 등을 도·감청해 취득한 정보다. 2021년 CNN이 김정은 사망설을 보도했지만 한·미 정보당국이 느긋했던 이유는 시긴트 때문이다. 긴박한 상황이 발생하면 통신량이 폭증하지만 당시 양국 정보기관은 북한의 통신 이상 징후를 감지하지 못해 김정은 신변에 이상이 있진 않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군이 감청을 통해 간첩 활동을 파악했다는 유력한 증언도 있다. 전두환 회고록은 “무전 감청 결과 현장에는 무수한 간첩이 있었다“며 “하지만 정체를 밝히기 위해 군을 투입할 입장이 아니었다. 투입하면 내전이 되고 내전이 되면 북이 침략한다”고 공개했다.
폭도와 혼재된 북한 간첩 색출이 지지부진했던 이유를 전두환 11·12대 대통령 스스로 분석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처럼, 간첩을 잡으려다 확전하는 상황을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이 우려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5·18 D-4 무등산 절서 수상한 외지인 100명 우리 장교 70명에 목격돼
지만원 박사의 최근 판결문이 북한의 소규모 공작원과 고정간첩의 활동 가능성을 판결문에 기재한 것은 센세이션한 일인 반면 국내외 공문서와 증언들은 일찌감치 불온 세력이 암약한 그림자를 담고 있었다.
구체적인 증언 가운데는 5·18 직전 광주 무등산의 한 절에서 100여 명의 외지 남성들이 국군 장교들에 의해 목격된 점도 꼽힌다.
당시 기자의 취재를 종합하면, 광주시 동구 운림동 무등산 자락에 자리한 증심사(證心寺)에서 5·18 직전 낯선 청년 100여 명이 우리 군 장교들에 의해 목격됐다. 이들에 관한 목격 증언이 공개되기는 당시가 처음이었다.
광주에 있는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군수지원단 소속 장병과 군무원 약 70명은 1980년 5월14일 점심 식사 이후 무등산을 등반했다. 의무병과 사진병 2명만 사병이었고 소수의 군무원을 제외하면 모두 장교들이었다.
이 시점은 5·18로부터 4일 전이다. 목격자들은 그날이 수요일이었다고 증언했다. 대한민국 육군은 매주 수요일을 ‘전투체육의 날’로 정해 구보와 등산 등 체력강화 훈련을 한다. 그해 5월18일은 일요일이고 5월14일은 수요일이다.
증언은 대단히 구체적이다. 버스는 지산동에서 담양군 남면 방향의 무등산을 넘어가는 산길 도로를 지났다. 이곳은 현재 ‘무등산 옛길’로 불린다. 이어 김덕령묘지 충장사에 도착한 뒤 군인들은 버스에서 내렸다.
국군 일행은 충장사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무등산 산악행군길에 올랐다.
충장사(김덕령 묘지)~바람재~토끼봉을 거쳐 오후 3시쯤 중머리재 정상에 오른 뒤 무등산 정상의 육군 미사일부대가 보이도록 단체 사진 한 컷을 찍은 것으로 장병들은 기억했다.
이후 증심사 계곡의 소로길(작은길)로 내려오던 중 100명이 넘는 수상한 남성들이 장교들의 시야에 잡혔다. 머리는 긴 장발이었고 눈빛은 살기가 돌았다고 목격자들은 증언했다. 군인들은 “극도의 경계심을 갖는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한 이들이었고 긴장한 모습이 있었다”고 훗날 증언했다.
하산길에 계곡 사이에 난 작은 길 양옆으로 약 50명씩 거동 수상자가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그사이를 걸어 내려가던 군인 중에는 대화를 주고받은 이도 있었다. 거동 수상자들을 학생으로 여긴 한 증언자는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왜 여기에 있나?”라고 물었고 한참 뜸을 들이다가 그들 중 누군가가 “그저 놀러 왔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엔 군과 시민군이 교전을 벌이거나 유혈 충돌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광주의 애국시민들은 적어도 5·18과 같은 현대사의 처참한 비극이 안방에서 일어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시점이다. 시민군이 트럭과 버스를 계엄군 쪽으로 질주·충돌하며 군의 총격과 대응 사격을 유발해 양측의 격전이 벌어졌다는 시기보다 훨씬 앞선 때였다.
이에 따라 이들이 무기고 탈취와 교도소 습격의 조직적인 무장봉기에 가담했는지, 이들의 정체를 둘러싼 의문이 새롭게 증폭된 바 있다.
이 절은 김대중 정부가 2000년 9월 북으로 돌려보낸 비전향 장기수 손성모가 스님으로 신분을 감추고 간첩으로 암약했던 당시 반(反)국가세력의 거점으로 일부 기능했다. 손성모는 1988년 4월 첫 재판에서 “나는 간첩이 아니다”라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일체를 부인하면서도 “김일성 주석님의 조국통일 노선을 실현하기 위해 나선 사람”이라고 자신의 남파 경위를 직접 밝힌 바 있다.
민주화백서 등 5·18 증언집에서는 시민군이 이 절을 ‘사수’ 하려 했다는 증언이 다수 발견된다. 이런 장소에 5·18 사건의 최초 충돌로 간주되는 전남대 앞 유혈사태 4일 전에 거동 수상자 100여 명이 우리 군에게 포착된 구체적인 증언이 확보된 것이었다.
순수하고 순박한 대다수 광주시민을 40여 년간 가스라이팅한 배후 세력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 실체를 벗기고 전모를 낱낱이 드러내는 일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DJ 내란 음모 사건은 과연 음모론에 불과했나
문재인 정부가 만든 5·18조사위의 최종 보고서를 액면 그대로 신뢰할 수 없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1980년 5·18 당시 내란 혐의로 재판을 받던 판사 출신 이택돈(2012년 작고) 전 신민당 국회의원이 김대중(DJ)의 공산주의 커넥션에 대해 검찰이 제시한 증거를 보고 놀랐으며 “DJ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 신민당은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법정에서 진술한 사실이 최근 기밀해제된 미국 정부문건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지금까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재판 속기록은 모두 공개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
미 국무부가 11월20일(현지시간) 추가로 기밀 해제한 5·18 당시 외교전문(80SEOUL 011401)에 따르면 1980년 8월28·29일 2심 재판에서 이택돈은 “김대중이 공산주의자인 걸 알고 놀랐다”고 말했다고 주한미국대사관이 워싱턴에 보고했다. 미 국무부 기밀해제 문서 캡처.
미 국무부가 작년 11월20일(현지시간) 추가로 기밀 해제한 5·18 당시 외교전문(80SEOUL 011401)에 따르면 1980년 8월28·29일 2심 재판을 참관한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는 “이택돈은 김대중이 그의 이념에 대해 자기에게 거짓말했다고 폭로했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이 전 의원은 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직접 지칭하며 “일부 구성원은 공산주의자들이었음을 알았어야 했다(And should have known that some members of the ‘HANMINTONG’ (two were mentioned by name) were communists)”고 후회하면서 공산주의자 2명의 실명을 법정에서 공개했다고 미 대사관은 본국에 보고했다.
DJ는 또 1980년 5월11일 “월남처럼 도시게릴라전(戰)을 하라”고 대중을 선동한 사실도 드러났다.
당시 기자가 단독 입수한 영상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은 1980년 5·18 발생 일주일 전인 5월11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월남식으로 국민 속에 침투해 도시게릴라 농촌게릴라전을 하라”는 대중 선동 문구로 열변을 토해낸 것으로 확인됐다.
정확히 일주일 뒤 5·18 항쟁 기간에 현실이 됐고, 44년이 흐른 오늘날 김대중은 ‘민주화의 영웅’으로 각각 자리매김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펼쳐졌다.
이밖에도 5·18 정부 조사위는 끝내 전남도청 앞 ‘헬기 기총사격’ 규명에 실패했다. 계엄군이 헬기에서 시민들에게 총을 쐈다는 선전·선동의 적나라한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이쯤 되면 실체적 진실이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정치적 해석이 민주화운동이었다는 비판을 받아들여야 할 정도였다.
조사위는 부실한 근거와 추정으로 진상이 규명됐다고 무리수를 던졌지만 ‘이런 식으로 결론 내려선 곤란하다’는 조사위 내부 반발에 부딪힌 결과, 사실관계를 입증하는 데 실패했다.
이로써 조비오 신부(본명 조철현·2016년 사망) 등이 1989년 국회 청문회에서 처음 공개 증언하면서 촉발된 ‘기총소사’ 논란은 35년 만에 실체 확인이 불가능한 일방의 주장인 것으로 일단락됐다.
그동안 전일빌딩 최고층인 10층(옛 전일방송) 천장과 중앙 기둥에 있는 총탄 자국(탄흔)은 계엄군 헬기가 쏜 ‘기총소사’ 때문이라는 주장이 지속됐고, 결과적으로 계엄군의 무자비한 잔혹성을 집중 부각함으로써 국민을 호도하고 군의 사기와 명예를 떨어뜨렸다는 비난이 있었다.
5·18조사위는 또 적법한 증거 조사도 하지 않고 계엄군 성폭행(강간) 의혹 사건을 ‘진상 규명’으로 처리하려다 퇴짜를 맞기도 했다. 피해 진술 중에는 계엄군이 금남로 시위 진압 도중 버스에서 강간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위원 9명 중 7명이 ‘신빙성이 낮다’며 증거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전두환=악마’에 이어 ‘계엄군=악마’라는 등식을 억지로 짜맞추려 했다는 비난이 뒤따랐다.
송선태가 이끄는 5·18조사위는 피해자의 진술이 당시 계엄군의 작전 위치·상황과 맞지 않자 뒤늦게 가해자의 소속 부대를 보고서에 바꿔 넣었는가 하면 법률상 조사위에 부여된 충분한 권한으로 가해자의 신원을 특정할 수 있는데도 ‘피해자의 증언이 믿을 만하다’는 이유로 조사 없이 진상이 규명됐다고 결론 내리기도 했다.
또 검증되지 않은 채로 존재해 왔던 과거 제1~7차 보상 심의 자료를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손쉽게 업데이트한 사례도 있어 국민 세금이 무색할 정도로 무책임하게 운용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조사도 하지 않고 과거의 자료를 답습할 것이면 왜 조사위를 구성했냐는 날 선 비판이 제기됐다.
사정이 이런데도 무조건 ‘민주화운동’이라고 결론 내린 그들의 뇌 구조를 들여다 봐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마저 들렸다.
스데의 5·18 시리즈 통 삭제… ‘5·18 北개입’ 실체 규명 열쇠는 광주가 쥐고 있어
이번 보도에 인용된 사례들은, 스카이데일리(사장 민경두)가 올여름 일방적으로 삭제한 기자의 5·18 시리즈 중 극히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2년간의 취재 기록은 한 편당 평균 1만 단어씩 계산해도 모두 40편이면, 워드 기준으로 40만 단어가 된다.
올바른 여론이 조성되도록 진실을 국민에게 알려야 할 언론의 책무를 스데가 져버렸다는 비판이 여전히 계속 나오는 이유다. 민씨를 두고 “경을 쳐야 한다”는 일각의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5·18을 우파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면밀히 들여다봐야 할 이유들은 차고 넘친다. 일개의 ‘5·18 특별법’ 따위가 가로막을 수 없는 절체절명의 시대적 과제라는 인식이 보수 일각에서 자리잡고 있다.
또한 가짜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5·18유공자 명단을 스스로 공개함으로써 ‘5·18 北 개입’의 실체를 규명할 열쇠는 결국 광주가 쥐고 있다는 신중한 의견도 제시된다.
5·18 연구가들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보강하기 위한 조사가 아니라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실체를 조사할 정파적 시비가 없는 조사위 구성이 필요하다고 일치된 의견을 내고 있다.
한 5·18 연구가는 “호남을 차별하고 민주화운동을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군인이 먼저 쏜 것처럼 꾸며 낸 북한의 모략과 거짓 선동 때문에 ‘남·남 갈등(남한 시민군과 계엄군의 총격전)’이 시작된 원인을 파헤친 뒤 미얀마 아웅산 테러와 대한항공(KAL) 격추 테러 사건처럼 북한에 책임을 묻고 공산주의가 우리 사회에 끼친 해악을 국민에게 있는 그대로 알려야 할 필요성이 크다”고 본지에 알려왔다.
전직 CIA 요원인 마이클 이 박사는 “광주 5·18 사태를 원래대로 국가전복 무장 폭동으로 복원 판결하고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일갈했다.
1980년 5월21일(추정) 시민들이 모여 있는 금남로 인근 건물 옥상에 머리띠를 한 민간인이 장총으로 추정되는 집기를 오른손에 들고 있는 모습이 본지 취재에서 포착됐다. 시민군은 21일 ‘집단발포(포 사격이 아니므로 정확한 표현은 집단사격)’ 이후 총기류를 탈취·획득했다고 밝히고 있어 그 주장에 따르면 사진 촬영 시점이 최소 21일 이전일 가능성은 없다.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접수한 21일 이후에는 위와 같은 금남로 시위가 열릴 이유가 없다. 위 왼쪽 큰 사진의 붉은색 사각형 건물은 당시 가톨릭센터와 전일빌딩 사이에 위치한 동구청이다. 이 건물 옥상을 확대한 오른쪽 사진 속 노란색 원안에 총기류로 추정되는 집기를 든 사람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있다. 이 사람은 민간인으로 보인다. 옆 사람이 흰바지를 입고 있다. 시민군과 무장 계엄군이 함께 서 있을 순 없다. 카메라에서 가까운 쪽 사람도 왼손에 총기류를 집총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숨진 시민 희생자들의 시신 검시 결과, 건물 위에서 아래로 하향사격한 총흔이 대거 발견됐다. 이에 따라 금남로 일대 건물들의 옥상에서 계엄군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적개심을 키우려고 누군가 고의로 시민에게 총을 쏘고 계엄군에게 덮어씌우는 ‘이간질 공작(모략전)’을 펼쳤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다. 이에 대해 미군 정보요원으로 근무했다는 김용장 씨 등은 2019년 기자회견에서 신군부가 주도했다고 허위 증언을 했다가 거짓으로 들통났으며 5·18조사위는 건물 옥상에서 하향사격한 계엄군을 찾았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문화예술계에도 사태를 촉발한 주범을 계엄군으로 확정적으로 예단하는 작품들이 많다. 하성흡 작가의 ‘1980년 5월 21일 발포(2017년 작)’에는 전일빌딩 옥상에서 아래로 총을 겨누는 이들이 계엄군(추정)을 연상케하 듯 그려져 있다(아래 파란색 사진 속 노란 원안). 그러나 아래 왼쪽 큰 사진 속 B건물(동구청)은 C건물(전일빌딩)에서 전방 장애물 없이 곧바로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다. 만일 전일빌딩 옥상에 계엄군이 있었다면 B건물(동구청) 옥상에 있는 민간인들은 계엄군의 조준 사정권에 들어오게 된다. 가장 높은 C건물(전일빌딩)에선 A건물(가톨릭센터) 옥상도 시야에 들어온다. 위 사진에서 보듯 B건물 옥상에 머리띠를 두른 민간인이 오른손에 쥔 것이 총기류가 맞는다면 전일빌딩 옥상에는 같은 시각 계엄군이 없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광주를 취재했던 일본인 카지마 고이치(風間公一) 프리랜서 기자도 “건물에서 사진촬영하면 불을 지르겠다는 통고가 있었다”며 계엄군이 아닌 이들이 이미 점령한 건물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증언했고 실제 국내 신문사 사진기자들도 쫓겨났다. 사정이 이런데도 미군 임시직 통역요원이었던 김씨는 대국민 기자회견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사살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하는 등 신군부 시나리오라고 허위 증언했고 전국의 신문방송들이 대대적으로 앞다퉈 보도했다. 임시직이었기 때문에 미국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김용장은 현재 남태평양 피지에 칩거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허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