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 연합뉴스
편집위원·육사 40기한국 경제는 지금 ‘고환율의 덫’에 걸려 있다. 환율은 숫자가 아니라 국가 신뢰와 생존의 가격표다. 환율은 국가 신뢰를 가장 빠르게 반영하는 지표다. 외교·안보·경제 정책이 엇박자를 내면 시장은 즉각 반응한다. 고환율은 “이 국가는 위기 상황에서 일관된 결정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가격으로 드러난 결과다. 원·달러 환율의 고공 행진은 단순한 외환시장 변동이 아니다. 고환율은 국가 재정 안정과 존립과 직결되는 지표다.
고환율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미국의 고금리 장기화와 달러 강세, 중동과 동북아의 지정학적 불안, 에너지·원자재 수입 비용 증가 등 외부적 요인과 안보·외교 리스크 심화와 정책의 일관성 상실에 따른 국가 신뢰도 추락, 방만한 재정 운용과 부채 증가, 기업 경쟁력 약화와 시장과의 소통 부재 등 내부 요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
문제는 같은 외부 충격 속에서도 한국의 환율이 유독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국내·외 환경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과 정부 정책 신뢰도 추락이 환율 변동성을 증폭시켰다는 진단을 피할 수 없다.
고환율은 현 정부를 향한 경고다. 중대재해처벌법·노란봉투법·상법 개정 등 반기업적 규제는 기업 리스크와 불확실성을 키워 투자 위축을 낳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정부의 정책 기조는 외국 자본의 이탈과 국내 기업의 해외 이전을 부추겼고, 이는 원화 수요를 약화시켰다. 고환율은 글로벌 환경과 구조적 취약성과 정부 정책 신뢰도 추락에 따른 안보·외교 리스크가 만든 결과다.
고환율은 경제의 ‘고혈압’과 같다. 고혈압이 장기(臟器)를 서서히 손상시키듯, 고환율은 경제 전반을 만성 피로 상태를 거쳐 마비로 몰아넣는다. 환율이 오르면 수입 물가가 상승하고 가계의 실질 소득과 구매력은 급격히 낮아진다.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 경기가 위축되고, 경기를 살리려 완화하면 환율이 다시 불안해지는 딜레마가 반복된다. 악순환 과정이 길어질수록 정책의 일관성은 흔들리고, 시장은 정부의 판단 능력을 의심하게 된다.
고환율은 수출기업에 단기적 이익을 주지만, 내수와 수입 의존 산업에는 치명적이다. 에너지와 식료품, 원자재 가격 상승은 기업 비용 증가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소비자 물가로 돌아간다. 고환율로 가계 부담이 커질수록 사회적 불만과 갈등도 증폭된다. 다수 국민은 실질 소득과 자산 가치를 추락시킨 반시장 경제 정책을 ‘경제 내란’으로 인식한다.
고환율은 경제를 넘어 안보에도 치명적이다. 에너지와 원자재, 핵심 부품을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에서 환율 상승은 ‘전·평시 에너지 보급’의 가격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낸다. 전쟁이 아니어도 산업 가동 비용과 국방 조달 비용이 급등하고, 국방 예산의 실질 구매력은 눈에 띄게 약화된다. 환율이 불안정하면 통화 정책의 선택지가 줄고, 외교·안보 협상에서 활용할 전략적 카드도 제한된다. 고혈압이 심혈관계 질환으로 이어지듯, 고환율은 산업과 소비와 안보 역량까지 마비시키는 치명적 위협이다.
해법은 단기 처방이 아니라 기업 친화적 정책을 통한 경제의 기초체력 재건이다. 몸에 열이 나면 해열제만으로 치유할 수 없다. 근본 원인을 진단하고 처방해야 하듯 환율 위기를 자초한 원인을 진단하고 제거해야 한다.
고환율은 일시적 시장 소음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체력, 정책의 일관성, 그리고 위기 대응 능력이 동시에 시험받고 있다는 신호다. 외국 돈을 빌리는 구조나 갚는 시점, 통화 차이에서 생길 수 있는 위험을 미리 점검해서, 외환에 문제가 생겨도 안전하게 버틸 수 있게 해야 한다. 기관과 기업의 달러 매수를 규칙화해 시기·규모를 분산하고, 달러를 막는 정책이 아니라, 환율이 폭주하지 않도록 미리 속도를 제한하는 안전장치로 환율 쏠림과 급변동을 막아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고부가가치 산업과 기술 경쟁력을 키워 수출 체력을 높이고, 예측 가능한 정책을 통해 국가 신뢰 자본을 축적해야 한다. 고환율은 임시 처방전인 외환시장 개입이라는 해열제로 해결할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경제·안보 체력을 동시에 점검하라는 경고다. 현재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은 국제적 협조를 구해야 한다.
구두 개입으로 버틸 수 있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환율을 ‘관리 대상’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 경보’로 인식하는 전환이다.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은 채 국민연금이라는 최후의 미래 자산을 동원하여 환율을 인위적으로 방어하다가 ‘외환조작국’으로 낙인찍히면 그날부로 대한민국은 무정부 상태로 추락한다.
국가를 혼미 상태로 내몬 ‘내란 정국’을 종식하고, 범정부적 고환율 극복 TF를 구성하며, 현재 고환율 상황을 국외 요인으로만 돌리지 말고 국민과 기업과 야당에게 알리고 협조를 구해야 한다.
내년도 지방선거를 의식하여 밀실에서만 언 발에 오줌 누는 극약 처방을 지속하고 국익과 상식에 반하는 경제와 안보 정책을 지속한다면 현 정부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민심과 군심은 대한민국을 흔드는 3각 파고(안보위기, 고환율, 성장둔화)와 격랑이 어디서 오는지를 정확히 진단하고, 국가 위기를 극복하고 정부 신뢰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인적 쇄신과 전면적인 정책 기조 변경을 촉구한다.
한미일보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