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9월9일, 북한 정권 수립 직후 북한 내각 성원들의 기념 촬영. 중앙에 있는 김일성이 수상, 양쪽의 박헌영(왼쪽)과 홍명희(오른쪽)가 각기 부수상을 맡았다.
1949년은 남로당 계열이 남한에서 정치 조직으로서 존립 가능성을 사실상 상실한 해다.
이 시기를 단순히 ‘탄압의 시기’로만 규정하면, 역사해석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1949년에 벌어진 일들은 억울한 피해의 연속이 아니라, 이미 실패한 노선이 현실에서 붕괴한 과정이었다.
남로당은 1946년 이후 합법 정치 경쟁이 아니라 지하조직·폭력·외부 권력 의존이라는 정책적 선택을 해왔고, 1949년은 그 선택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드러낸 시점이었다.
이때부터 종북 좌파의 오래된 기술이 본격적으로 굳어진다. 실패를 오류로 보지 않고, 실패를 ‘탄압의 증거’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남조선로동당, 1946~49년 3년간 활동
남조선로동당은 1946년 11월 23~24일 결당대회를 통해 공식 출범했다. 초대 위원장은 허헌, 부위원장은 박헌영, 이기석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노선은 분명했다. 선거와 의회를 통한 합법 경쟁보다, 정국을 교란하고 체제를 흔드는 방식이 우선되었다.
이후의 행보를 연표를 통해 알아보자.
1945년 8월 이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관여
1946년 9월: 전국 총파업 주도
1946년 10월: 대구·경북 10월 폭동
1947년 3월 1일: 기념 집회 충돌
1948년 4월: 제주 4·3 무장 봉기
1948년 10월: 여수·순천 반란
이 일련의 사건은 남로당의 지속된 노선 선택의 결과였다. 대중의 표를 얻지 못하자, 남로당은 폭력과 무장, 지하조직으로 방향을 고정했고, 이 선택이 1949년의 붕괴로 이어진다.
남로당 붕괴의 전조는 이미 1948년에 나타났다. 최고 책임자 박헌영은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남한으로 복귀하지 않았다. 흔히 ‘월북’으로 표현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남한 정치 현실에서 책임을 지지 않는 선택이었다.
지도자가 남한 내부에서 노선 실패를 정리하거나 대중 앞에서 정치적 책임을 지는 대신, 북한 권력 구조 속으로 이동했다. 이는 남로당이 말해온 ‘남조선 혁명’이 실제로는 자생적 정치 노선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패배의 수습은 남한이 아니라, 북에서 찾았다.
1949년 남로당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은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49년 5월~8월 사이,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이 국회 내부에 침투했다는 혐의로 현역 국회의원 다수가 검거, 기소된 사건이다.
조사의 출발점은 남로당원 전우겸의 진술이었다.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등 국회의원들이 연루됐다.
이 사건은 법적 판단을 둘러싸고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남로당은 대중의 선택으로 권력을 얻는 길이 아니라, 제도 내부를 잠식하는 방식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이는 혁명이 아니라 정치적 파탄이었다. 정상적인 정당은 패배하면 정책과 메시지를 바꾸지만, 지하조직은 패배할수록 음지로 더 깊이 들어간다. 1949년의 남로당은 바로 그 단계에 있었다.
1949년 6월 24일, 남로당은 공식적으로 해산된다. 같은 해 6월 말, 북조선노동당과의 합당을 통해 조선노동당이 결성된다. 이 과정에서 남로당은 독립된 정치 세력으로서 완전히 소멸하고, 김일성 체제의 하부 구성 요소로 흡수된다.
이 장면은 중요하다. ‘민족’과 ‘자주’를 외치던 조직이, 실제로는 북한 정권에 종속되는 구조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종북 좌파가 반복해 보여주는 습관, 즉 겉으로는 자주를 말하면서, 실제 판단은 북한의 이해관계에 끌려가는 습관은 바로 여기서 만들어진다.
‘피해 의식’을 정치 자산으로 삼다
남로당 해산 이후에도 잔존 조직은 남한 곳곳에 남아 있었다. 1949년 8~9월, 서울과 경기, 전라도 일대에서 대규모 검거가 이어진다. 1949년 9월 21일, 서울시 경찰국은 남로당 서울시당 수뇌부를 포함한 1000여 명의 검거를 발표한다.
1946년경의 박헌영.
이 수치는 당시 발표 특성상 과장이 있을 수 있다. ‘불순분자’라는 표현 또한 명백히 권력의 언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949년의 정치 환경이 합법 경쟁의 장이 아니라 지하조직 소탕 국면이었다는 사실이다. 남로당은 더 이상 정치 세력이 아니었고, 잔존 조직은 경찰과 군의 정보망에 걸려 소탕되었다.
같은 해 1949년 4월,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한다. 공식 목적은 좌익 전향자의 계몽과 관리였다. 이 제도는 훗날 한국전쟁 초기의 비극과 연결되며 큰 상처를 남긴다.
그러나 1949년 시점에서 보면, 국가는 좌익 잔존을 ‘전향, 관리’ 대상으로, 경찰은 ‘소탕’ 대상으로 분리하는 이중 구조를 만든다.
이 구조는 남로당 잔존 세력에게 매우 유리한 생존 환경을 제공했다. 조직은 붕괴할수록, “우리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탄압받았다”는 식으로 피해 의식을 자신들의 정치 자산으로 삼아버렸다.
실패를 따지면 노선이 무너지기 때문에 남로당 잔존세력은 자신들의 실패를 박해로 바꿔버리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남로당 지하조직의 마지막 핵심 붕괴는 1950년 3월, 박헌영의 부하들인 김삼룡과 이주하의 체포로 이어진다. 이 사건은 남로당 잔존 지하조직의 실질적 종말을 의미한다.
그러나 결정적 전환점은 이미 1949년에 지나갔다. 지도부 이탈, 조직 해산, 대규모 검거, 제도권 침투 실패가 한 해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1949년 남로당 잔존 조직의 붕괴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종북 좌파가 이후 80년 동안 반복하는 패배 처리 방식의 원형이다.
즉 “패배를 인정하면 노선을 고쳐야 한다” “노선은 고칠 수 없기 때문에, 패배를 피해로 바꾼다” 1949년은 이 공식이 처음으로 완성된 해다. 그리고 그 공식은 이후에도 수없이 반복된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전 이승만학당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