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만난 김정관 장관(왼쪽)과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 [사진=연합뉴스]
27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 국회의 비준 이행을 직접 거론하며 자동차 관세 25%를 언급했다.
이를 두고 국내에서는 ‘돌발 압박’이나 ‘외교적 소통 실패’라는 해석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번 조치는 새로운 요구나 즉흥적 대응이 아니라, 이미 합의된 사안의 이행 여부를 점검한 뒤 집행 단계로 넘어간 상황에서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조치 중 하나라는 점은 분명하다.
팩트시트에 드러난 트럼프의 '업 프론트'
이번 사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시간표와 합의의 성격이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가 일관되게 요구해 온 ‘업 프론트(up-front)’ 방식, 즉 선(先)이행을 기준으로 관계를 판단하는 거래 문법이 핵심이다.
트럼프식 업 프론트란 합의 이후의 정치적 사정이나 단계적 조정을 감안하기보다, 약속이 먼저 이행됐는지를 기준으로 협력과 압박을 결정하는 방식을 뜻한다.
이 점은 한·미 정상 간 합의 직후 공개된 한·미 공동 팩트시트(fact sheet)의 성격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 문서는 정치적 선언이나 방향 제시에 그치는 공동성명이 아니라, 미국이 향후 이행 여부를 점검하기 위한 사실상의 ‘체크 리스트’에 가깝다.
실제로 디지털 규제, 투자 환경, 비차별 원칙, 공급망 협력 등은 모두 이행 여부를 따질 수 있도록 정리된 항목들로 구성돼 있다.
또한, 미국의 경고는 올드미디어들의 보도처럼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팩트시트 이행 여부를 기준으로 단계적으로 진행됐는데, 한국 정부가 이를 무시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몰라서 그런 것인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미 행정부의 3차례 경고
1월 13일, 제임스 헬러 주한 미국 대사대리는 한국 정부에 공식 서한을 보내 이 공동 팩트시트의 후속 이행을 촉구했다.
이는 외교적 의견 교환이 아니라, 합의문에 적힌 항목이 실제 정책과 제도로 옮겨지고 있는지 묻는 공식 점검이었다.
이어 1월 14일 전후,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은 환율 문제를 거론하며 합의 이행과 금융·시장 안정이 분리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는 이행 지연이 통상 문제에 그치지 않고, 외환과 자본시장으로 확산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었다.
1월 16일,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미국에 투자하지 않으면 100% 관세를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며, 관세를 협상용 수사가 아닌 집행 수단으로 명시했다.
반도체를 포함한 전략 산업 투자 문제를 정면으로 겨냥한 발언이었다. 트럼프식 업 프론트 문법상, 이는 이미 ‘말의 단계’를 넘어선 신호였다.
네 번째 경고에 나선 트럼프… 핫라인으로 망신당한 김민석
이 모든 경고가 순차적으로 누적된 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국회의 ‘비준’ 미이행을 직접 지목하며 자동차 관세 25%를 언급했다.
여기서도 핵심은 자동차가 아니었다. 트럼프가 문제 삼은 것은 특정 품목이 아니라, 팩트시트에 담긴 약속을 한국이 제도적으로 이행할 의지가 있는가라는 점이었다.
책임의 초점은 외교 채널이 아니라, 한국 내부의 이행 구조로 옮겨졌다.
이 과정에서 김민석 국무총리의 ‘핫라인 개설’ 발언이 논란이 된 이유도 분명하다.
이 발언은 미 부통령 J.D. 밴스를 만난 직후 외교 성과처럼 공개됐고, 바로 다음 날 트럼프 대통령이 비준 이행을 직접 거론하며 관세 25%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 시간차는 독자에게 자연스러운 의문을 남겼다.
“미국이 업 프론트 이행을 요구하는 국면에서, 무슨 핫라인이 있다는 것인가.”
문제는 핫라인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성과 언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는 원인이 아니라, 무능을 드러내는 하나의 근거에 불과하다.
트럼프 비준 요구를 특별법으로 치환한 청와대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이 국면을 조정했어야 할 청와대의 판단 오류다.
비준 이행 여부와 그에 따른 대미 메시지 관리, 집행 가능성에 대한 판단은 개별 장관이나 총리의 몫이 아니라 대통령실의 책임 영역이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관세 언급 이후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다”는 취지의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문제 삼은 ‘국회 비준’ 쟁점을 이행 수단에 불과한 ‘특별법’ 문제로 치환했다.
이는 쟁점을 관리한 것이 아니라, 질문을 잘못 이해한 채 다른 답을 내놓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외교 실패가 아니라, 국정의 최종 판단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낸 장면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트럼프는 국회 비준을 원한다
더 주목할 대목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 합의가 자신의 임기 이후에도 지속돼야 한다는 점을 수차례 강조해 왔다는 사실이다.
“This has to last beyond my presidency.”
(이건 내 임기 이후에도 지속돼야 한다)
이는 행정부 차원의 정책 조치나 한시적 입법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차기 정권에서도 구속력을 갖는 정치적·제도적 승인, 즉 국회 비준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국이 특별법을 통과시키더라도 트럼프가 다시 비준 문제를 꺼낼 가능성은 여전히 크다.
미국이 묻고 있는 것은 이행 방식이 아니라, 이 합의를 국가 차원에서 책임질 준비가 돼 있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올드미디어가 던졌어야 할 질문들
그럼에도 한국의 올드미디어들 상당수는 이 사안을 여전히 ‘외교적 소통 실패’나 ‘돌발 변수’로 설명했다.
누가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채널이 열렸는지에 집중한 나머지, 사안의 본질인 이행과 집행의 구조는 뒷전으로 밀렸다.
그러나 트럼프식 업 프론트 거래 구조에서 소통은 결과를 바꾸는 요소가 아니다.
이행이 없으면 집행이 온다는 단순한 공식이 작동했을 뿐이다.
올드미디어가 던졌어야 할 질문은 분명했다.
"왜 미국은 협상보다 이행을 앞세우는가.
왜 팩트시트가 선언이 아니라 집행 기준이 됐는가.
왜 관세·환율·투자가 하나의 묶음으로 움직이는가.
왜 그 시간표 속에서 정부는 무엇을 결정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이 빠진 보도는 사안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정부의 판단 실패만이 아니라, 트럼프식 거래 문법과 팩트시트의 성격을 읽지 못한 언론의 해석 실패이기도 하다.
무능한 정권은 무책임하다
더 중요한 점은 이번 사안이 자동차 관세 하나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반도체 투자, 공급망 재편, 환율 정책, 디지털 규제 등 팩트시트에 적힌 항목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자동차 관세는 시작일 뿐이다.
본질은 업 프론트 이행을 전제로 움직이는 미국의 집행 논리를 한국 사회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다.
이번 관세 발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묻고 있는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이미 합의된 약속을 이행할 준비가 돼 있는지 여부다.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외교 이벤트와 소통 서사만 좇는다면, 다음 집행의 대상이 무엇이 될지는 시간문제다.
그때마다 정부는 또다시 ‘돌발 변수’를 말할지 모르지만, 판단을 미룬 대가는 정책 담당자가 아니라 산업과 시장, 그리고 국민이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