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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을 ‘동족상잔’으로 ‘물타기’하다 [松山 칼럼ㅣ종북 좌파 80년사 ⑧]
  • 松山 시인
  • 등록 2026-01-30 18:4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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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북 세력, 전쟁 원인을 ‘상호 충돌’로 흐리다
  • 6·25는 김일성이 기획하고 스탈린이 승인한 범죄
  • 사료는 증언한다… “미·소 대리전 담론은 허구”

6·25전쟁 당시 탱크를 앞세운 북한 인민군 보병부대가 서울로 진입하고 있다. [사진=우드로윌슨센터]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은 38선 전 구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남하를 개시했다. ‘개성–문산’ ‘철원–의정부’ ‘춘천–홍천’ 축선이 동시에 열렸다. 

 

주공은 개성–문산 방면이었다. 북한군 제1·2·3·4군단이 투입됐고, 병력은 약 13만 명으로 추산된다. 소련제 T-34 전차 약 150대가 전면에 배치됐으며, 122mm·152mm급 야포와 곡사포 수백 문이 동원됐다. 

 

6·25전쟁은 김일성과 스탈린 공모의 결과


공격 개시는 새벽 시간대에 맞춰 일괄 진행됐고, 군단 단위의 지휘·통신 체계가 사전에 정비돼 있었다. 이는 정찰이나 국지 충돌의 연장선이 아니라, 전면 침공의 전형적인 양상이었다.

 

6·25전쟁은 즉흥적 결정이 아니었다. 1950년 4월,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해 이오시프 스탈린과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의 요지는 소련 외교·군사 문서에 남아 있다. 남침 계획은 사전에 검토됐고, 전차와 항공 전력 지원, 군사고문단 파견이 승인됐다. 

 

특히 이 문서에는 전쟁 개시 방식을 두고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불분명하게 보이도록” 하는 방안이 논의됐다는 대목이 포함돼 있다. 이는 침공 책임을 흐리기 위한 의도적 장치가 작전 단계에서부터 검토됐음을 보여준다.

 

같은 해 5월, 김일성은 베이징에서 마오쩌둥과 접촉했다. 중국은 즉각적인 참전을 약속하지는 않았으나, 사후 개입 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를 취했다. 

 

이 접촉은 전쟁의 외교적 후방을 다지는 과정이었다. 남침 개시 시점은 우기 이전이라는 기상 조건, 남한군의 전력 공백, 국제 정세를 고려해 계산됐다. 날짜는 상징이 아니라 군사적 선택이었다.

 

전쟁 발발 직후 국제사회의 판단은 분명했다. 1950년 6월25일 뉴욕에서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안보리 결의 82호를 채택해 북한의 무력 공격을 규정했다. 

 

결의문은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무력 공격을 개시했음을 전제로, 적대행위의 즉각 중지와 38선으로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 문서는 전쟁을 ‘내전’이나 ‘상호 충돌’로 보지 않았다. 침공 주체와 행위를 명시했다. 

 

이어 6월27일 채택된 안보리 결의 83호는 회원국들에게 대한민국을 돕도록 권고했다. 국제법적 판단의 출발점은 명확했다.

 

북한 동부 원산항의 보급 창고와 부두 시설에 제5공군 소속 B-26 인베이더 경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공식 기록도 같은 시간 순서를 보여준다. 백악관과 국무부 기록에는 6월25일 새벽 북한군의 전면 공격이 보고돼 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6월27일 성명을 통해 미 공군과 해군이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했음을 공표했다. 이는 공중·해상 지원에 관한 결정이었다. 

 

지상군 투입은 그 이후 단계적으로 승인됐다. 즉, 침공이 먼저였고, 국제적 개입은 그 다음이었다. 이 시간 순서는 대통령 성명과 미 정부의 공식 문서로 고정돼 있다.

 

“동족상잔”으로 피해자 가해자 구분 흐리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부터 책임을 흐리는 표현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동족상잔”이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이 표현은 참상을 강조하지만,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애매모호하게 만든다.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앞세우면, 누가 먼저 공격했는지는 뒤로 밀린다. 출발점이 흐려지고, 결과의 비극만 남는다. 이때부터 전쟁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로 변조된다.

 

1950년대 후반 일부 언론과 학계에서는 전쟁의 원인을 “38선의 긴장”으로 돌리는 설명이 등장했다. 

 

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의 국지적 교전을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이 교전들은 정찰과 소규모 충돌이었다. 전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병력 규모, 장비 수준, 작전 지속 시간, 지휘 체계가 전혀 다르다. 이 차이를 지운 채 “서로 쐈다”는 문장으로 정리하면서, 침공의 준비성과 책임을 감추기 시작했다.

 

북한 측 사료는 침공 준비를 충실히 보여준다. 북한군의 편성 문서와 훈련 기록에는 전차부대 운용과 포병 집중 운용 계획이 포함돼 있다. 이는 단기간에 조성할 수 없는 준비다. 

 

소련 군사고문단의 보고서에는 전차 운용 훈련, 보급 체계 점검, 작전 숙달 과정이 언급돼 있다. 이 기록들은 전쟁이 우발적 충돌이 아니라 사전에 준비된 작전이었음을 보여준다.

 

1960년대 이후 책임 회피는 정치적 해석으로 굳어졌다. 전쟁 책임을 남한 정부의 “강경 발언”이나 “북진 주장”으로 돌리는 설명이 등장됐다. 그러나 발언은 전차를 움직이지 않는다. 

 

실제 병력 이동과 포격 개시는 북한군이 수행했다. 결정은 김일성이 내렸다. 장소는 개성·문산·의정부·춘천이었다. 시간은 1950년 6월25일 새벽이었다. 이 기본 사실을 건너뛰는 설명은 사료를 벗어나는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발언이 전쟁을 촉발했다는 주장은 시간 순서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미 공중·해상 지원 결정은 침공 이후인 6월27일에 공표됐다. 지상군 투입은 그 뒤에 단계적으로 승인됐다. 침공 이전에 외국 군대가 전쟁을 개시했다는 주장은 사료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시간 순서를 바꾸면 당연히 책임도 바뀐다. 그래서 책임 회피는 늘 시간 순서를 흐리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미국의 군사적 개입, 남침 이후 시작돼 


장소를 지우는 방식도 같은 효과를 낸다. 개성에서 문산으로 넘어온 전차 행렬, 의정부 방면으로 진격한 기계화 부대, 춘천 일대의 포격 지점은 공식 기록과 전투 보고서로 확인된다. 

 

그러나 이 구체적 사실은 종종 서술에서 빠진다. 대신 “한반도 전역의 혼란” 같은 말이 자리를 차지한다. 구체적 사실이 사라지면 책임도 사라진다.

 

1970~80년대 대학가와 일부 지식인 사회에서는 한국전쟁을 “미국의 대리전”으로 규정하는 담론이 확산됐다. 그러나 이 규정은 전쟁의 개시 주체와 개입 주체를 의도적으로 혼동시키고 있다. 

 

대리전이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전쟁의 개시 결정과 초기 작전 통제가 미국에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사료는 정반대를 보여준다. 

 

전쟁은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군의 전면 침공으로 시작됐고, 그 시점까지 미국은 전쟁 개시에 대한 결정권도, 작전 통제권도 행사하지 않았다.

 

미국의 군사적 개입은 침공 이후에 이뤄졌다. 미국 대통령의 공중·해상 지원 명령은 6월27일에 공표됐고, 지상군 투입은 그 뒤 단계적으로 승인됐다. 

 

이는 전쟁을 ‘시작한 행위’가 아니라, 이미 개시된 침공에 대한 대응이었다. 대리전이라면 대리인의 개입이 전쟁의 원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개입은 결과였다. 원인은 북한의 침공이었다.

 

더 나아가, 전쟁 초기 북한군의 침공 계획은 김일성의 결정 아래 소련과 중국의 승인·조율을 거쳐 수립됐고, 작전 개시는 북한군이 독자적으로 수행했다. 

 

미국은 전쟁 개시 시점에 작전 현장에 존재하지 않았고, 통제하지도 않았다. 이 기본 사실을 무시한 채 전쟁 전체를 “미국의 대리전”으로 규정하는 것은, 개입과 개시를 구분하지 않는 오류다.

 

따라서 ‘대리전’이라는 규정은 설명이 아니라 본말의 전도다. 전쟁을 시작한 주체의 책임을 흐리기 위해, 사후 개입을 사전 기획처럼 뒤집는 방식이다. 

 

이 담론이 작동하는 순간, 침공을 결정한 권력은 사라지고, 모든 책임은 외부로 이전된다. 이것이 1970~80년대 대학가에서 유통된 ‘대리전’ 담론의 구조적 문제다.

 

중국의 개입 역시 사료로 구분된다.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은 1950년 10월 이후다. 이는 침공의 시작이 아니라 전쟁의 확대 국면이다. 시작과 확대를 혼동하면 책임의 초점은 흐려진다. 사료는 구분을 요구한다.

 

전후 서술에서도 같은 방식이 반복됐다. 전쟁의 원인을 “불가피한 비극”으로 규정하면, 책임을 묻는 질문은 사라진다. 누가 전쟁을 결심했고, 어떤 판단으로 침공을 감행했는지는 더 이상 따지지 않게 된다. 

 

전쟁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마치 사고처럼 처리되고, 침공을 명령한 권력과 이를 정당화한 이념은 책임의 자리에서 빠져나온다. 비판은 가해자가 아니라 시대 상황이나 국제 정세로 이동한다.

 

1950년 6월25일을 ‘상호 충돌’로 부르면, 사실 기록은 감정 처리용 문장으로 둔갑한다. 전쟁은 비극일 수 있다. 그러나 비극이라는 말이 침공의 책임을 지워주지는 않는다. 

 

남침을 남침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태도, 그 지점이 종북 좌파 80년사의 출발점이다. 총성이 울린 날보다, 그 총성의 의미를 흐린 시간이 더 오래 영향을 남겼다.

 




◆ 松山 

 

시인이자 역사·철학 연구자. 이승만학당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연구 고문, 철학 포럼 리케이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권을 출간했고 ‘후크고지의 영웅’을 공동 번역했다. 松山은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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